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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 민중항쟁이 대통령을 몰아내다

6월 6일 볼리비아 대통령 카를로스 메사가 사임했다. 지난 몇 주 동안 계속된 민중 항쟁이 결국 메사를 몰아낸 것이다.

지난 5월 16일 볼리비아에서 석유와 천연가스 국유화를 요구하는 시위, 점거, 도로봉쇄 등의 투쟁이 분출했다.

수도 라파스와 인근 원주민 밀집 지구인 엘 알토의 빈민가에서 몰려나온 시위대가 관공서들을 평화적으로 “접수”한 채 국회를 폐쇄해버리고 대통령을 퇴진시키겠다고 위협했다.

볼리비아노총(COB) 지도자는 이렇게 말했다. “노동자들은 볼리비아의 천연가스를 되찾고 싶어한다. 그들은 볼리비아인들을 위한, 볼리비아인들의 대통령을 원한다.”

코차밤바 시 남부에서는 가스수호회복연합이 학생 단체들, 농민 단체들, 다른 사회 단체들과 함께 정유공장을 “상징적으로” 접수했다. 가스연합 지도자 오스카 올리베라는 이렇게 선언했다. “이것은 마지막 ‘상징적’ 접수다. 다음 번에는 사람들이 우리의 국가 재산을 되찾고 운용하고 자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실질적 접수를 감행할 것이다.”

라파스 주변의 인구 밀집 지역인 고산지대에서는 농민들이 라파스로 이어지는 도로를 점거하고 봉쇄해버렸다. 엘 알토에서는 시의원들조차 단식 투쟁을 선언하고 메사의 퇴진을 요구했다.

메사의 사임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이 거둔 또 하나의 승리다. 지난 4월 에콰도르 대통령 루시오 구티에레스에 이어 메사도 쫓겨남으로써 라틴아메리카는 다시 한번 정치적 충격에 휩싸였다.

볼리비아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아이티 다음으로 가난한 나라지만,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에서는 핵심적인 구실을 하고 있다.

지난 2000년에 코차밤바 시에서는 소농, 시장 상인, 노동자, 원주민 등의 대중 운동이 정부의 물 사유화 계획을 철회시켰다.

당시 볼리비아 정부는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의 경제적 지원을 받는 대가로 물 사유화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코차밤바 주민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 후퇴해야 했다.

물 사유화는 볼리비아의 자원을 다국적 기업들에게 ‘개방’하려는 더 광범한 신자유주의 전략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그 전략에는 이른바 ‘마약 전쟁’도 포함돼 있었다. 마약 전쟁의 주된 표적은 고산지대에서 코카를 재배하는 소농들, 즉 코칼레로스였다.

이 소농들은 대부분 고산지대의 주석 광산들이 폐광된 뒤 토지를 불하받은 광부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영웅적인 노동계급 투쟁의 전통이 강력한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이었다. 그런 집단적 투쟁의 기억을 간직한 채 농촌으로 옮겨간 사람들이 코차밤바 항쟁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코차밤바 항쟁은 또 당시 대통령 곤살로 산체스 데 로사다의 신자유주의 정책들이 거센 저항에 부딪힐 것임을 예고하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로사다는 물과 천연가스 사유화 전략을 적극 추진한 데서 여실히 드러나듯이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를 맹종하는 자였다.

코차밤바 항쟁은 사회적 저항의 확산이 시작됐음을 입증하는 사건이었다. 로사다의 경제 정책들 때문에 타격을 입은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모두 이런 사회적 저항에 가담했다.

2003년에 그들은 수도 라파스 인근의 원주민 밀집 거주 도시 엘 알토에서 로사다와 다시 대결했다.

9월에 볼리비아 전역에서 50만 명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들은 천연자원을 외국 자본에 넘기지 말고 국가가 계속 통제하라고 요구했다. 정부군의 발포로 민간인 4명이 사망했다.

10월 들어 엘 알토에서는 총파업이 선포됐다. 충돌이 격화됐고 엘 알토와 여타 지역들에서는 새로운 민중 권력 기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0월 12일 시위 도중 31명이 살해당했다. 대중의 분노가 폭발했고 결국 로사다는 카를로스 메사로 교체됐다.

그러나 메사 집권 후 몇 달이 지나도 상황은 전혀 바뀌지 않았고, 2004년 중반에 파업과 도로봉쇄가 다시 시작됐다. 메사의 대응은 새로운 석유법을 국민투표에 부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0월이 되자 국민의 압도 다수는 국가가 석유를 통제하기를 바란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올해 초 메사는 다국적 석유회사들, 특히 비피 아모코와 스페인의 렙솔에게 석유와 가스를 싸게 공급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저항을 불러일으켰을 뿐이다.

3월 초에 메사는 대통령직 사퇴와 8월 조기 총선을 협박 카드로 꺼내들었다. 이것은 단지 시간을 벌기 위한 책략이었지만, 코칼레로스의 지도자 모랄레스 같은 사람들조차 ‘사회 안정’의 허울 아래 일시적으로 메사의 책략에 넘어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국가의 석유 통제와 2003년 10월 학살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대중의 저항과 운동은 계속됐다. 그들은 국회와 대통령이 다국적 석유회사들의 이윤에 50퍼센트의 세금을 매기는 법률을 제정하라고 요구했다.

4월에 국회가 통과시킨 탄화수소법은 이런 요구를 받아들인 것처럼 보였다.(물론 좌파들은 이 법도 여전히 신자유주의에 충실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메사는 이 법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밀어붙이는 데 부족하다고 생각해 새 법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5월 투쟁을 주도한 세력들은 요구 수준을 높이는 것으로 대응했다. 3월에 시위대는 50퍼센트의 세금을 요구했을 뿐 메사의 퇴진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두 달 뒤에는 보상 없는 전면 국유화와 메사 퇴진을 요구했고 결국 이를 실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