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게재
톈안먼 항쟁 30주년:
서구식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학생들의 운동이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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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정부의 방역 조처에 반발하는 학생 시위들이 잇따르는 상황에서 텐안먼 항쟁 33주년이 다가오자, 중국 정부가 톈안먼 항쟁을 기리는 행동들에 히스테릭하게 반응하고 있다. 2019년 톈안먼 항쟁 30주년을 맞아 발표한 글이 이런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해 재게재한다.
올해로 중국 톈안먼 항쟁이 벌어진 지 30년이 됐다. 한 세대가 지나는 동안 중국은 이런저런 변화를 겪었고 미국과 경쟁할 정도로 부상했지만,
톈안먼이 기억되는 법: 지우거나 제멋대로거나
먼저, 중국 지배자들에게 톈안먼 항쟁은 미치도록 지우고 싶은 기억이다. 중국 정부는 이 투쟁을 공식적으로
서구 지배자들은 어떨까? 이들은 자국에서 벌어지는 계급투쟁은 맹비난하면서도, 톈안먼 항쟁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한
그러나 우리는 이런 지배자들의 역사관에 모두 반대하며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들춰내야 한다. 그래야만 톈안먼 항쟁의 진정한 성격을 밝힐 수 있고, 그 위대함과 교훈을 고스란히 배울 수 있다. 게다가
항쟁의 배경: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항쟁의 구체적 전개를 알아보기에 앞서 그것을 불러일으킨 여러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나서 1978년 덩샤오핑이라는 새로운 지도자가 떠오른다. 그를 비롯한
이쯤에서 마오쩌둥의 중국이
당시 국제 정세의 변화도 중요한데,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이 패하자 소련과 중국 사이의 긴장은 더욱 커졌다. 그 전쟁에서 미국을 우회적으로 지원한 중국은 결국 1979년 미국과 수교를 맺어 세계 속에 자신을 더 깊숙이 밀어 넣는다. 대만
이런 상황에서 흘러간 개혁
게다가 톈안먼 항쟁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느닷없는 투쟁이 결코 아니었다. 웨이징성을 필두로 1978~1983년에
소수민족들의 투쟁도 빼놓을 수 없다. 1950~1951년에 홍군이 입성해 식민지처럼 돼 버린 지역에서 끊임없이 반란이 벌어졌는데, 그 중심은 티베트였다. 1989년 3월 라싸에서는 팔레스타인 인티파다
항쟁의 전개: 반란에서 진압까지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 전 총서기가 갑작스레 사망한다. 그에게 꽤나 기대를 걸었던 학생들은 4월 22일 톈안먼 광장 내 인민대회당 앞에서 공식 추도회를 연다. 무려 20만 명이 참여한 이 집회에서는 적기가 휘날리고 인터내셔널가가 울려 퍼졌다.
4월 26일,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에 한 사설이 실렸다.
5월 4일, 1919년 5
5월 13일, 광장에서 학생들의 단식투쟁이 시작됐다. 이를 계기로 시위는 어마어마한 규모로 성장하고 완전히 전국적인 운동이 된다.
5월 19일쯤에는
5월 20일, 마침내 계엄령이 발동된다. 이것도 베이징에서 건국 최초였다. 즉각 노동자들이 주축이 돼 시내 곳곳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됐다. 수도철강회사 노동자 7만 명은 연대파업을 벌였고, 베이징 인구의 절반인 500만 명이 거리로 뛰쳐 나왔다. 지하철 노동자들은 병력 수송을 막으려고 전기를 차단하기까지 했다.
시위는 잠시 교착상태에 놓였다. 운동의 방향을 둘러싸고 쉴 새 없이 논쟁이 벌어졌다. 동시에 지배자들도 재정비할 시간을 벌었다. 진압을 할지 말지 갈팡질팡하면서도 사병들을 철수시키고 그 자리에 노련한 직업군인들을 앉혔다. 이때
6월 4일, 기어코 덩샤오핑은 대학살을 작정하고 무력 진압에 나섰다. 학생 지도부는 무기 탈취를 끝까지 거부한다. 류샤오보 등 지식인들은 학생과 군인 사이를 중재하는 데 열을 올린다. 이 틈을 탄 군대는 장갑차와 탱크로 밀고 들어와 바리케이드를 파괴하고 무차별 사격을 개시했다. 사망자는 수천에서 1만 명에 이르렀다. 권위를 회복할 방법이 달리 없던 중국 지배자들이 자기 인민들에게 내전을 선언해 버린 꼴이었지만, 벽돌과 화염병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진압 이후에도 체포는 계속돼 수만 명이 붙잡히고 그중 상당수가 처형된다. 끔찍한 살육이었다. 이를 두고 당시 서구 지배자들은 전체주의적 독재국가의 인권 탄압이라며 맹공을 퍼붓지만, 이것이 위선일 뿐이라는 사례는 수도 없다.
대중운동: 그곳에 노동자도 있었다
이미 살펴봤듯이 톈안먼 항쟁은 학생들만의 운동이 전혀 아니었다. 이는 프랑스에서 시작된 1968년 반란에 관한 오해와 비슷하다. 중국에서도 학생뿐 아니라 다양한 집단이 참여한 대중운동이 벌어졌던 것이다. 물론 학생은 시위 촉발의 주체였다는 점에서 무척 중요한 구실을 했다.
여러 집단 중에서 특히
한국의 5
진정한 성격: 독재국가와 시장에 맞선 반란
이제 톈안먼 항쟁의 진정한 성격을 규정해야겠다. 물론 당시 학생들 가운데 일부는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는 일부에 불과했고, 그들의 머릿속은 되레 모순과 혼란이 지배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지향을
또, 서구 지배자들은 얄밉게도 1978년에 덩샤오핑이 부상하자마자 그를
요컨대, 톈안먼 항쟁은 부패하고 불평등을 강요하는 중국 지배계급에 맞서 진정한 해방의 잠재력이 등장한 사건이었다. 1968년 체코
우리에게 어떤 의미와 교훈이?
톈안먼 항쟁이 물리적으로 패배함에 따라 중국 지배자들은 1990년대에 개혁
우리는 톈안먼 항쟁의 위대함과 더불어 아쉬운 점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운동이 기로에 섰을 때 엄청난 무장력으로 조직된 국가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 것인가가 그중 하나다. 국가에 맞서려면
끝으로, 지난해 여름 광둥성 선전시 자스커지 노동자들의 독립 노조 건설 투쟁을 떠올려 보자. 1989년 이후로 금지된 독립 노조를 만들겠다며 싸움에 나선 노동자들과 그들에게 지지를 보낸 학생들은 지금도 무지막지한 탄압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올해 들어서도 광둥 지역을 중심으로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은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톈안먼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