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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고참 회원을 보내며

말도 안 되는 현실을 수긍해야 할 순간이다. 그가 10개월 동안 죽음을 준비하고 우리에게도 그 죽음을 맞이할 시간을 줬는데도 현실감이 떨어진다.

그 10개월은 승민 씨가 아주 의연한 사람이었음을 깨닫게 해 준 시간이었다.

그전에도 나에게 승민 씨는 근성 있고 억척스러운 혁명가였다. 맡은 일을 제 기간에 해내려고 악착같았다. 밤잠도 줄이고 식사도 거르며 임무를 수행했다. 건강이 승민 씨의 이런 책임감을 시샘했음에 틀림없다.

그와 한 팀으로 일할 때면 믿음이 갔다.

2006년 그때 우리는 민주노동당에서 활동했다. 내가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 후보로 출마했을 때, 승민 씨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돌리고, 돈을 모으는 일을 했다. 돈과 사람은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다. 언제 연락을 다 돌리나 싶은 수만 명의 당원 명부가 선본에 도착했다. 밤잠을 줄여 가며 우리 선본은 정말 많은 당원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선거가 끝난 뒤 자기에게 연락을 준 선본은 당신들밖에 없었다는 당원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그중에는 크리스 하먼의 《민중의 세계사》를 세미나 하던 교사 노동자 그룹도 있었다. 승민 씨의 악바리 근성이 톡톡히 한몫했던 성과였다.

2008년 내가 되도 않게 민주노동당 소속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했을 때, 승민 씨는 정말 열심히 돈을 모아 줬다. ‘내가 많이 애썼으니 선거 잘하시오’라고 쿡 찌르곤 했다.

승민 씨 덕에 한번은 사우디아라비아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은 적이 있다. 2004년 1월 인도 뭄바이에서 개최된 세계사회포럼이 끝난 뒤 비행기 출발까지 몇 시간이 남았다. 나는 영어를 못해 시내 여행을 엄두도 못 냈다. 그때 뉴질랜드 유학생 출신(?) 승민 씨가 백기사로 등장했다. 그 덕에 인도양이 내다 보이는 사우디아라비아 레스토랑에 갔다. 그는 종업원에게 영어로 유창하게 이것저것 물어가며 음식을 주문했다.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1인당 1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배부르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던 승민 씨가 번역에 도전한 것은 신선했다. 그는 원치 않았던 뉴질랜드 유학 생활에서 터득한 영어 실력을 혁명 운동에 사용했다. 내가 속해 있는 지회에서 《노동조합 속의 사회주의자들》을 교재 삼아 몇 차례 정치 토론을 하며 그에게 고마움을 많이 느꼈다. 이미 그는 투병 중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가 각고의 노력으로 내놓은 그 책을 갖고 회원들이 토론하면 건강 회복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내심 버리지 못했다. 승민 씨가 간난신고하며 그 책을 번역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보다 일찍 트로츠키주의 정치 운동에 뛰어든 고참 활동가였다. 그는 집과 학교와 보안경찰의 숨막히는 감시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미래 인생을 정말 어린 나이에 단호하게 결단한 나의 영원한 고참이다. 그렇다고 해서 죽는 것마저 고참이 되다니!

혁명적 원칙에 투철하면서도 근성 있는 혁명가를 너무 일찍 떠나 보내는 게 못내 안타깝다. 그가 없는 자리를 메우는 것은 남은 우리들의 몫일 것이다.

그리고 승민 씨의 소중한 연인 종환 씨에게 위로의 말을 전한다.

2004년 ‘전쟁과 변혁의 시대’ 포럼에서 발제하는 필자 김인식과 사회자였던 이승민
2016년 맑시즘 폐막 토론장에서

※ 이승민 동지를 기억하는 여러분들의 추모의 글과 사진을 신문사(wspaper@ws.or.kr)로 보내 주세요. 함께 모아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