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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민 씨가 떠난 자리에서

내가 승민 씨를 처음 만난 건 1997년이다. 그러나 그녀와 동고동락하게 된 것은 7년 전 그녀가 내가 일하는 책갈피 출판사의 문을 두드리면서부터였다.

우리는 “승민 씨는 자기가 문 열고 들어온 경우”라는 농담을 자주 했는데, 정말 사실이었다. 그녀는 제 발로 찾아와 책갈피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고, 마치 오래전부터 거기 있던 사람처럼 어느새 우리의 일부가 됐다. 교정지를 파일에 반영하는 일을 돕겠다며 자리를 잡고 앉더니 “왜 이렇게 고친 거죠? 아 그렇구나. 그런데 이렇게 고치는 건 어때요?” 하며 끊임없이 질문 세례를 퍼부어 우리를 곤혹스럽게 했다.

승민 씨에게 왜 출판사에서 일하고 싶은지 물어봤다. “이론이 약한 게 약점이라 번역이나 편집 일을 하면서 발전시키려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는 번역이나 편집 일을 한다고 자동으로 이론이 발전하는 건 아니라고, 같은 일을 하더라도 ‘어떻게’ 하는지가 중요하다고 몇 가지 조언을 해 줬다. (앞질러 하는 얘기지만, 승민 씨는 그 뒤 몇 년 동안 정말로 이론을 발전시켰다. 특히 차별 쟁점의 책을 번역하고 편집하면서 그 분야를 깊이 파고들었다. 그런 성과를 바탕으로 그녀가 어떤 모임에서 동성애를 주제로 발표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끝나고 나서 “지금까지 동성애 주제 강연을 여러 번 들었는데 오늘이 가장 좋았다”고 말해 줬다. 진심이었다.)

리더로서의 이승민

2013년 가을부터는 사실상 승민 씨와 내가 함께 출판사를 이끌게 됐다. 우리는 어찌 보면 상반된 스타일이었다. 나는 이것저것 생각하느라 결정이나 실행을 미적거리는 경우가 많았고, 승민 씨는 “일단 지르고 보는” 스타일이었다(그녀 자신의 표현). 그래서 서로 으르렁거릴 때도 많았지만, 한편으로 상호 보완적이어서 적어도 내게는 그녀가 도움이 많이 됐다.

승민 씨는 ‘타성’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언제나 우리에게 새로운 고민을 던져 줬고, 특히 나를 많이 채찍질해 줬다. 2016년 가을, 신입 편집자를 3명이나 뽑아 교육할 때였다. 어느 날 모두 함께 회식을 하고 헤어지려는데 그녀가 내게 사무실에 돌아가서 좀 더 얘기하자고 했다. 무슨 할 얘기가 있나 보다 했는데, 신입 편집자들을 어떻게 성장시킬 것인지, 나 자신의 경험은 어땠는지, 자신의 생각은 이런데 내 생각은 어떤지 등등 이런 질문들을 밤새도록 던졌다. 커피 한 잔 놓고 시작한 얘기가 해가 뜰 때까지 계속됐다. 그런데도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결국 내가 먼저 “한숨만 자게 해 달라”고 사정한 기억이 난다.

승민 씨는 지치지 않는 리더이기도 했다. 신간을 홍보하려고 집회장에 홍보 부스를 차릴 때면, 우리는 자연스레 승민 씨에게 현장 ‘지휘’를 맡겼다. 그녀는 몸이 약해서 홍보 리플릿을 들고 돌아다닐 수는 없어도(몇 번 시켜 보고 후유증이 심해서 중단시켰다), 부스를 지키며 우리를 적재적소에 보내고 격려하는 데는 능했기 때문이다. 더운 날씨에 힘들어서 ‘이제 그만할까’ 하고 부스로 돌아오면 승민 씨가 단호하게 다그쳐 다시 내보내곤 했다.

책을 편집하거나 번역할 때 승민 씨는 굉장히 치밀하고 꼼꼼했다. 한 권의 책을 번역하기 위해 10여 편의 책과 논문을 미리 읽기도 했다. 지난해 여름,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직전까지 그녀는 독일 혁명을 분석한 크리스 하먼의 명저 The Lost Revolution: Germany 1918 to 1923 를 번역하고 있었다. 번역을 시작하기 전, 군대의 체계와 군사 용어를 알아야겠다며 육군 방위병 출신인 내게 알려 달라고 했다(심지어 해군의 체계까지!). 현역 출신의 다른 편집자와 기억을 맞춰 가며 설명해 줬고, 그녀는 우리의 설명을 자신이 조사한 독일군 체계와 비교해 보더니 표를 만들어 책상 앞에 붙이고 번역을 시작했다(안타깝게도 번역은 3분의 1에서 중단됐고 그 표는 여전히 주인 잃은 책상 앞에 덩그러니 붙어 있다).

투병

2018년 봄, 그녀가 소화가 안 된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워낙 평소에 여기저기 아픈 데가 많아서 큰 걱정은 하지 않은 채, 그녀의 파트너인 종환 씨와 내가 운동 좀 하라고 잔소리를 늘어놨다. 내시경 검사를 해도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해서 정말 운동 부족인 줄만 알았다.

2018년 여름, 그녀의 증상은 점점 심해졌고, 마침내 거의 아무것도 먹을 수 없게 되자 큰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그녀가 1년도 살기 어려울 거라고 했다. 나는 의사 말을 믿을 수 없다고, 더 큰 병원으로 옮기자고 했다. 같은 진단이 나왔다.

2018년 가을과 겨울, 그녀는 밝은 표정으로 병마와 싸우고 있었다. 한 끼에 150그램밖에 못 먹지만, 마치 운동선수처럼 하루 여섯 번씩 걷기 운동을 한다고 했다. 그렇게 몸을 만들어 항암 치료를 이어 가고 있었다. 어쩌면 기적을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2019년 여름, 그녀가 호스피스 병원으로 옮겼다. 그녀와 종환 씨를 둘만 있게 하지 않으려고 순번을 짜서 병실을 지키기로 했는데, 7월 4일 저녁이 내 차례였다. 그녀는 이미 의식이 거의 없었다.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잠들어 있었다. “우리 말소리는 들릴 것”이라는 의사의 말에, 그녀의 손을 잡고 꼭 해 주고 싶던 얘기를 했다. “잘 살았어, 승민. 우리도 당신처럼 잘 살게. 걱정 말고 편히 쉬어.” 승민 씨가 혼자 있다고 느낄까 봐 종환 씨와 함께 옆에서 계속 말을 걸었다. 동지들이 보내 오는 메시지를 읽어 주려 하는데, 종환 씨는 자꾸만 터져 나오는 울음에 제대로 읽을 수가 없어서 내가 대신 읽어 줬다.

밤 10시경 다음 순번과 교대했다. “승민, 아침에 올게” 하고 돌아왔다. 아침에 일어나니 메시지가 와 있었다. “방금 승민 떠났어요.” 너무 황망해서 울고 있는 내게 아이들이 잠에서 깨 위로해 줬다. “승민 이모가 세상을 떠났대.”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인 아이들도 그게 무슨 뜻인지 아는 듯했다.

사실, 그녀가 병에 걸린 것을 안 뒤로 내 심경은 늘 복잡했다. 그녀가 안쓰러워서만은 아니었다. 내가 출판사에서 좀 더 잘했더라면, 내가 매사에 좀 더 현명하고 발 빠르게 대응했더라면, 그녀가 덜 힘들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녀의 병도 없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답답했고, 어쩔 수 없이 평생 가지고 갈 마음의 짐이 된 것 같다.

그래도 내가 할 일은 남았다. 이제 “잔소리꾼”, “투덜이”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그녀 자신의 표현), 아무 일이나 맡겨도 든든하고 믿음직스럽게 해내던 승민 씨는 우리 곁에 없지만, 그녀가 못다 이룬 꿈은 남았다. 남은 우리가 그 일을 이뤄 내야 하고 우리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 그녀도 그걸 가장 바랄 것이다.

오랫동안 함께했는데 함께 찍은 사진이 거의 없다. 2017년 노동절 집회 책갈피 부스에서 낙태죄 폐지 촉구 인증샷 찍기에 응한 모습으로 맨 오른쪽이 승민 씨다. 우연히 타 단체 페이스북에서 발견했다
승민 씨가 떠난 빈자리

※ 이승민 동지를 기억하는 여러분들의 추모의 글과 사진을 신문사(wspaper@ws.or.kr)로 보내 주세요. 함께 모아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