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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버팀목 승민 씨를 떠나보내며

승민 씨를 생각하면 그를 처음 알게 된 날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내가 신입 회원이던 시절 서울역에서 열린 한 노동자 집회에서였다. 집회 시작 전이라 노동자들이 거의 없이 한산했고, 조금 일찍 도착한 나는 마침 우리 신문 가판 옆에 있던 책갈피 가판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그때, 지나가던 한 중년 남성이 시비를 걸었다. 여차하면 책을 집어 던지기라도 할 기세였다. 당시 가입한 지 채 1년도 안 된 풋내기였던 나는 잔뜩 ‘졸아’서 순간 숨을 죽였다. 그러자 가판을 홀로 지키고 있던 여성 동지가 단호하고 당당한 목소리로 “시비 걸지 말고 가세요!” 하고 대응했고, 여성들밖에 없어서 만만하게 보고 덤볐던 아저씨는 혼잣말로 몇 마디 중얼거리다 이내 자리를 떴다.

그 작은 ‘전투’를 목격한 나는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혁명적 사회주의자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배울 수 있었고, 그 장면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았다. 그때 그 가판을 지키던 여성 동지가 바로 승민 씨였다. 어쩌면 이 사건을 계기로 내게 출판사 동지들에 대한 좋은 이미지와 신뢰가 생겨났고, 후에 진로를 결정할 때 책갈피 출판사를 망설임 없이 선택하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출판사에 들어와 승민 씨와 공동 작업할 기회가 많았다. 첫 작업은 《동성애 혐오의 원인과 해방의 전망》이었다. 승민 씨와 내가 글 하나씩을 번역하고 서로 교환해 교정·교열을 했다. 승민 씨는 내가 번역한 글뿐 아니라 내가 한 교정·교열 작업까지 꼼꼼하게 검토하고서 잘 고친 부분, 고쳐야 하는 것은 맞지만 불충분하거나 잘못 고친 부분, 고치지 않아도 되는데 손대서 오역을 만든 부분을 나눠서 세세하게 지적해 줬다. 바쁜 와중에도 승민 씨가 시간을 내서 내게 피드백을 해 준 덕에 많이 배울 수 있었다. 그 후에도 《계급·소외·차별》, 《노동조합 속의 사회주의자들》 등의 책을 만들 때 승민 씨와 공동 작업을 했다. 덤벙거리고 철저하지 못한 구석이 있는 내게 꼼꼼하고 작은 것 하나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 승민 씨는 최고의 교육자였다.

뭐든 승민 씨의 손에 들어가면 쉽게 ‘오케이’가 되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승민 씨에게 글을 검토받기 전이면 깐깐한 선생님에게 숙제 검사를 받아야 하는 학생 같은 심정이 돼서 ‘승민 씨라면 뭘 지적할까?’ 하는 생각으로 글을 다시 보곤 했다. 그러면 꼭 하나씩 새롭게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물론 그렇게 고쳐서 가져 가도 빨간 색 줄이 그어지는 부분은 꼭 있었다. 지금도 그때의 습관이 남아 다른 사람에게 글을 보여 주기 전이면 글을 새로운 눈으로 다시 한번 보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하듯 승민 씨는 흔히 말하는 ‘악바리’ 근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토론 자리에서 풀리지 않는 것이 있다면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술도 마시지 않는 사람이 술자리를 2차, 3차까지 이어 가며 풀리지 않는 쟁점을 해결하려 하기도 했다. 2017년 초에 급박하게 《박근혜 퇴진 촛불 운동: 현장 보고와 분석》을 낼 때는 출판사 성원들이 모두 달려들어 며칠씩 야근을 해야 했는데, 그때도 승민 씨는 훨씬 나이가 젊은 나보다도 더 늦은 시간까지 피곤한 기색도 없이 일을 묵묵히 해냈다. 막차 시간을 넘겨 일하겠다는 걸 택시비가 많이 드니(승민 씨가 출판사 성원 중 집이 가장 멀었다) 얼른 가라고 등을 떠밀어야 할 정도였다.

《트랜스젠더 차별과 해방》을 낼 때 승민 씨의 끈덕짐과 정치적으로 쌓아 온 자산이 빛을 발했다. 이 책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촉박한 일정에 맞춰 작업을 해야 했는데, 그 때문에 그동안 차별 문제에 관련된 책을 여럿 번역하고 편집했던 승민 씨가 긴급 투입됐다. 승민 씨는 이 책을 제때 출판하기 위해 밤잠을 아끼고 때로는 출퇴근 시간까지 아깝다며 집에서도 일해 결국 예정된 일정에 맞춰 책을 냈다. 덕분에 차별 문제 중에서도 흔히 소홀히 여겨지거나 배제당하는 트랜스젠더 문제에서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선도적으로 제시할 수 있었다.

승민 씨는 내게 정치적인 본보기일 뿐 아니라 마음의 든든한 버팀목이기도 했다. 승민 씨는 주변인에게 애정 어린 관심을 많이 쏟는 사람이었다. 내가 부모님 댁에서 독립해서 새로 살 집을 알아볼 때 승민 씨는 자기 일처럼 인터넷을 뒤져 괜찮은 집을 알아봐 주고, 심지어 집을 보는 데까지 함께 가 줬다. 내가 출근길에 다리가 다쳐 절뚝거리고 들어오자 승민 씨가 그의 파트너인 종환 씨를 시켜 나를 업어서 병원에 데려다 주기도 했다. 정치 활동 속에서 벼려진 예리함은 평상시에도 작동해서 승민 씨는 내가 아침에 사무실에 들어오는 표정만 보고도 내게 어떤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생겼다는 것을 대번에 알아차리고는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 오곤 했다. 그 때문에 승민 씨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못하는 고민이나 개인적인 일을 터놓고 말할 수 있었다.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승민 씨의 조언과 위로가 사무치게 그립다.

승민 씨는 아프게 된 뒤에도 예의 그 쾌활하고 당당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승민 씨에게 안부 인사를 전할 때면 그 응답에 항상 덧붙이던 말이 “잘 싸워서 이겨 낼게요!”였다. 그때마다 그 “싸운다”는 말이 참 승민 씨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을 계급투쟁 속의 크고 작은 전투에 바쳐 온 그에게는 병마와의 싸움도 하나의 중대한 전투였고, 그렇게 생각하니 그가 아프다는 사실에 마냥 슬프고 안타까워하는 대신에 응원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모두의 바람과 달리 너무 막강한 상대를 만나 그 밝은 모습을 잃게 돼 속이 아프다. 내 고마움과 존경하는 마음을 승민 씨가 있을 때 온전히 전했다면 좋았을 텐데. 슬픈 마음에 하염없이 눈물만 흐르다가도 승민 씨가 곁에 있었다면 내 어깨에 손을 두르며 “에이, 괜찮아! 울지 마!” 하고 말해 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눈물을 닦고 일어서게 된다. 이제 그를 마음에 담고서 그가 가려 했던 길을 후배 활동가이자 후배 편집자로서 이어 가야겠다. 어려운 일이 닥칠 때면 승민 씨를 떠올리며 “잘 싸워서 이겨 낼게요!” 하고 마음을 다잡아야겠다.

2018년 5월 함께 한강에 소풍을 갔을 때. 초점이 잘 맞지 않은 것이 아깝다
같은 날, 승민 씨가 찍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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