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노동과 자본》:
임금과 임금 투쟁의 의미를 설명한 마르크스주의 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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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 일각에는 상대적 고임금층 노동자들의 임금 투쟁을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가 여전히 꽤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달랐다. 노동운동에 참여하고부터 이미 그는 임금 계약의 이면에 착취가 숨겨져 있으며 따라서 노동자들(어떤 ‘을’의 처지에 있든)의 임금 투쟁은 꼭 필요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마르크스의 《임금노동과 자본》은 그의 1847년 강연 원고들을 다듬어 1849년 출판한 자그마한 책이다. 그 강연은 유럽을 뒤흔든 1848년 혁명의 전야에 독일 노동자들을 상대로 브뤼셀에서 한 강연이었다.
이 책의 목적은 “계급 간 투쟁의 물질적 기초를 이루는 경제적 조건들”을 설명하는 것이다. 마르크스 설명의 근거이자 전제는 사용자가 지급하는 임금이 노동자가 한 일에 대해서가 아니라 노동자의 일할 능력, 곧 노동력에 대해서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력은 다른 여느 상품처럼 매매되지만, 사용될 때는 다른 여느 상품과 달리 그것의 생산에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한다.
다른 여느 상품처럼 노동력의 가치도 그것의 생산에 드는 노동의 양에 달려 있다.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제공하려면 노동자는 의식주 + α (α에는 차세대 노동력 제공자인 자녀의 양육비도 포함된다)가 필요하다. 임금은 이 비용이 돼야 하는 것이다. 즉, 노동자의 의식주 + α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 노동의 양과 일치해야 하는 것이다.
노동력 생산과 재생산에 드는 이 비용이 결국 노동력의 가격인 임금을 결정한다. 그러나 노동자가 하는 노동은 이 비용을 대는 데 필요한 노동의 양보다 더 크다. 예컨대 노동력 충전 비용이 될 만큼을 노동자가 생산하는 데 하루 네 시간이 걸린다고 하자. 그러나 노동자의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9시간이라고 하자.(한국인은 2016년 당시 무려 연평균 2052시간 일해 OECD 평균인 1707시간을 훨씬 웃돌았다.) 그러면 가외 노동시간인 5시간은 자본가 차지인 셈이다. 이를 두고 잉여 가치라고 하는데, 바로 잉여 가치가 자본가가 얻는 이윤의 출처인 것이다.
비밀
이런 착취 방식은 임금 계약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데, 바로 이 비밀 때문에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에 본질적인 이해 충돌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가 있는 것이다. 노사관계는 대등한 사람들 간의 평등한 관계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사용자는 노동자가 노동을 제공하는 것에 대한 대가로 임금을 주기로 합의한 것처럼 보인다. 임금과 맞바꾸기 되는 것은 실은 노동력인데도 마치 노동인 듯한 외관을 나타내는 것이다. 노예나 농노와 달리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는 일을 해야만 하는 법적 강제를 받지 않는다. 노동자는 이 점에서 자유롭다. 노동력과 임금의 교환은 자발적 행위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런 형식적 평등은 더 깊이, 근저에 있는 노동자와 자본가 간 불평등을 숨긴다. 자본가는 노동자의 생계 수단인 생산수단 접근(일자리 얻기)을 통제하고, 노동자는 보잘것없는 기초생활수급비로 사는 극빈자나 심지어 노숙인이 되지 않으려면 자본가에게 고용돼야만 한다.
노동자들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어떤 점에서 ‘자유롭다’. 하지만 어떤 특정 자본가 개인에게 고용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자유롭다는 것이지, 전체로 보았을 때 자본가 계급 밑에서 일하지 않고는 도저히 못 배기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노동자는 원할 때는 언제든 자신을 고용하고 있는 자본가를 떠나고, 자본가도 더는 노동자에게서 아무 이익도 얻지 못하거나 예상된 이익을 얻지 못하게 되면 언제든 노동자를 해고한다. 그러나 노동력의 판매가 유일한 생계의 원천인 노동자는 삶을 포기하지 않는 한 구매자 계급 전체, 즉 자본가 계급을 떠날 수 없다. 그는 특정 자본가 차지는 아니어도 자본가 계급 차지다. [물론] 자기 상전을 찾는 것, 즉 자본가 계급 속에서 [노동력]구매자를 찾는 것은 노동자에게 달려 있다.”(강조는 마르크스 자신의 것. 필자가 번역을 일부 수정했다.)
자본은 경쟁적 축적과 착취를 놓고 형성된 사회적 관계망이다
자본가가 노동력을 구매해 그것을 사용할 때마다 그 결과로 노동자에게서 잉여 가치가 추출된다. 자본가는 이 잉여 가치를 사용해 추가로 생산수단을 축적할 수 있다. 사실, 자본가는 이윤을 재투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지 않으면 다른 자본가들과의 경쟁에서 밀려나, 사업을 그만둘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자본가들이 생산수단을 축적할수록 그들은 노동자들을 불평등한 조건으로 일하도록 더한층 위협할 수 있게 된다. 즉, 자본은 그저 물질적 생산수단이 아니라 축적된 과거 노동이고, 이는 산 노동의 삶을 지배한다. 마르크스는 말한다. “면방직 공장의 노동자가 면포만을 생산하는가? 아니다. 그는 자본을 생산한다. 그가 생산하는 가치들은 그의 노동을 지휘하고 이를 통해 새 가치들을 창조하는 데 다시 기여한다.” 그래서 “자본들의 이해관계와 임금노동의 이해관계는 서로 정반대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리고 단지 이 이유만으로도 노동계급은 최종 결판이 날 때까지 계급투쟁을 벌여야 하는 것이다.
덧붙이는 말 ― 사회진보연대를 위한 고언(苦言)
사회진보연대는 공공운수노조의 정책 결정 과정에 무시 못 할 영향을 미친다. 그 단체의 핵심 이론가인 마르크스주의자 한지원 씨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뿐 아니라 심지어 최저임금 대상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 투쟁조차 부정적으로 본다.
사회진보연대는 2000년대에 가장 훌륭한 좌파 단체였다. 비록 단체 자체가 혁명적이진 않았지만, 거의 다 20대와 30대의 매우 똑똑한 급진적 젊은이들로 이뤄진 활력 있는 급진좌파 단체였다. 하지만 2010년대부터 노동조합 기구들(특히 공공부문)의 일꾼으로 활동하는 길을 채택하더니만 마침내 최근에는 그들의 상사인 개혁주의적 노조 지도자들과 비슷한 관점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그 ‘효과’가 바로 임금 문제에서조차 후퇴하는 것이었다. 계급투쟁과 대중 정서가 보편적으로 고양되지 않는 ‘일상적’ 시기에 노동조합 기구는 급진좌파가 활동하기에는 온건화의 압력과 유혹이 많은 곳이다.
1970년대 초 서구에서는 임금 인상이 이윤을 압박해 경제 위기가 발생한다는 학설을 개진한 일단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있었다(앤드류 글린, 봅 서클리프, 존 해리슨 등). 그들 중 일부는 임금 인상 투쟁으로 경제 위기를 발생시켜 이를 혁명으로 전환시키자는 초좌파적(그리고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 추구로 귀결될) 주장을 편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존 해리슨이 그랬다. 그럼에도 이런 주장이 한지원 씨의 임금 인상 반대론보다는 비할 데 없이 훨씬 덜 귀에 거슬린다.
사실, 이 세계의 재화와 용역 중 압도적 부분이 노동계급에 의해 생산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 부(富) 가운데 적은 일부만을 돌려받는 노동계급이 임금 인상을 아무리 많이 요구한들 그게 뭐가 문제인가? 왜 노동운동가들이 임금 인상 요구에 대해 변명해야 하는가? 하물며 왜 자본주의 생산성을 걱정해야 하는가? 한지원 씨의 주장을 듣노라면, 러시아의 자본주의 발전을 기준으로 《자본론》을 해석하면서, 친자본주의적 개혁주의자들을 지지하거나 아니면 멘셰비즘 쪽으로 흐른 합법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생각난다.
물론 사회진보연대는 러시아 얘기만 나오면 손사래를 치며 쓸데없는 얘기하지 말라는 듯한 자세로 일관했다. 그러니 합법 마르크스주의 얘기는 더 하지 않겠다. 그러나 똑똑한 급진좌파 청년들이 어찌하여 온건 개혁주의 쪽으로 우경화하고 있는지 곰곰이 숙고해야 한다. 사회진보연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운동과 좌파의 향방 자체와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이렇게 고언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