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한지원 씨의 임금 투쟁 무용론을 다시 반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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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한지원 씨(이하 존칭 생략)는 지난 5월 ‘저임금·임금격차에 대한 노동자운동의 접근방향’이라는 글을 발표해 최저임금 인상 투쟁을 포함한 임금 투쟁을 비판했다. 그는 또한 정규직 양보론을 주장했다. 다시 그가 최근 ‘같은 방법으로 다른 결과를 기대할 수는 없다’는 글을 발표했다. 거기서 그는 나의 비판(강동훈, ‘계급 단결은 비현실적 도덕주의로는 이룰 수 없다’, 〈노동자 연대〉 287호)을 반박하면서 자신의 임금 투쟁 무용론을 반복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마르크스를 인용하고 있지만, 견강부회와 아전인수로써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인 계급투쟁의 의의를 계속 폄하하고 있어, 그 정치적 결론은 부르주아 경제학이 제시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임금, 가격, 이윤》에 대한 견강부회 식 해석
지난 기사에서 나는 한지원이 《임금, 가격, 이윤》의 한 문구를 인용하며 자신의 ‘임금 인상 투쟁 무용론’의 근거로 삼는 것을 비판했다. 한지원은 이를 반박한다며, 내 주장이 《임금, 가격, 이윤》에 대한 “피상적 이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마르크스는 오언주의자 웨스턴의 임금투쟁 무효론과 영국 노동조합의 임금투쟁 몰입을 동시에 비판하기 위해 팸플릿을 썼다.”
두루 알듯이, 마르크스는 임금 투쟁만으로 자본주의(“임금 제도”)를 철폐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한지원이 인용한 것처럼 《임금, 가격, 이윤》에서도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조직된 힘을 노동자 계급의 종국적 해방을 위한, 말하자면 임금 제도의 궁극적 철폐를 위한 지렛대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실패한다.”
그러나 내가 이 한 문장의 의미를 둘러싸고서만 한지원에게 반론을 폈던가? 물론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 문장만 인용하는 식으로 《임금, 가격, 이윤》의 논지 전체를 왜곡하는 한지원을 비판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인용을 “문맥에서 완전히 떼어 낸” 것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그는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이고 있지만, 여전히 《임금, 가격, 이윤》의 내용 전체(사실 한지원이 인용한 한두 문구 정도를 빼면)가 임금 투쟁 무용론을 주장하고 있는 존 웨스턴에 대한 반박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임금, 가격, 이윤》이 발간된 1865년 당시의 역사적 맥락을 보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때는 1857년 경제 위기가 끝나면서 1860년대 초부터 각지에서 파업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모처럼 활발하게 벌어지는 노동자 투쟁에 악영향을 줄까 봐 마르크스는 웨스턴의 임금 인상 투쟁 무용론을 비판하는 게 특히 중요하다고 봤다.
한지원이 인용한 구절만 보아도 마르크스가 임금 인상 투쟁이 쓸모없다고 주장하지 않았음을 쉽사리 알 수 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유격전[임금 인상 투쟁]에만 자신을 국한하면 … 실패한다”고 말했다. 이는 임금 인상 투쟁 이상의 것도 필요하다고 말한 것이지, 임금 인상 투쟁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이처럼 《임금, 가격, 이윤》이 발간된 역사적 맥락과 그 소책자의 전체 취지와 비판의 분량, 심지어 한지원이 인용한 문구의 내용 등을 종합해 “피상적 이해”를 넘어서 살펴봐도 마르크스는 임금 인상 투쟁 무용론을 비판하려고 《임금, 가격, 이윤》을 썼다. 이는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한지원도 “마르크스는 오언주의자 웨스턴의 임금투쟁 무효론과 영국 노동조합의 임금투쟁 몰입을 동시에 비판하기 위해 팸플릿을 썼다” 하고 말한 것 아닌가(강조는 인용자). 그런데도 여전히 그는 마르크스의 《임금, 가격, 이윤》을 자신의 임금 인상 투쟁 무용론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삼으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징후적 독해’를 한 것이라고 호도할지도 모르겠지만, 보통 이런 식의 해석을 ‘견강부회’라고 부른다.
《자본론》의 결론을 부르주아 경제학처럼 만들다
한지원은 마르크스의 임금 이론을 잘 이해하려면 《자본론》을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마르크스의 임금 이론을 이렇게 정리한다. “임금이 상승하면, ‘이윤율 하락→투자 감소→산업예비군증가→일자리 경쟁→임금 하락→이윤율 회복’이라는 동역학이 작동한다.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 것이 구조이고, 자본주의 구조는 이윤율 동역학이다.” 그러면서 그는 내 주장의 문제점이 “실은 임금 수준이 오로지 투쟁의 강도에 따라 결정된다고 전제하는 것에서부터 파생된다”는 것이라며 비판하고 있다. 그는 내가 “[한지원 주장의] 가장 큰 난점은 바로 임금이 계급투쟁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을 완전히 놓치고 있다는 것”이라고 비판한 부분을 염두에 둔 듯하다.
그러나 한지원의 반박은 단순히 ‘허수아비 때리기’ 오류일 뿐이다. 나는 “임금 수준이 오로지 투쟁의 강도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한 바가 없기 때문이다. 지난 기사에서 나는 마르크스 《임금, 가격, 이윤》의 다음 부분을 인용했다.
“사태의 경향이 그러하다는 것[상대적 과잉인구로 임금이 최소 한계까지 억눌린다는 점]이 바로, 노동자 계급은 자본의 침략에 대한 저항을 포기해야 하며 자신들의 처지를 일시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가끔씩 주어지는 기회를 최대한 이용하려는 시도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가? 만약 노동자들이 그렇게 하고 만다면, 그들은 구제할 때를 놓친 파탄자의 무리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강조는 강동훈의 것)
여기서 마르크스가 말한 “사태의 경향이 그러하다는 것”이 바로 임금 인상이 노동시장의 변화를 낳으면 이는 다시 임금을 하락시키려는 반작용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나는 한지원이 말하는 “동역학”을 부정한 적이 없고 오히려 마르크스를 인용해 노동시장의 반작용과 이에 맞서는 노동자 투쟁, 두 가지 모두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지원이야말로 “구조”(시장의 반작용)와 “의지”(계급투쟁)를 대치시키고는, “임금 수준이 오로지 투쟁의 강도에 따라 결정된다”는 잘못된 허수아비를 나에게 떠넘기고 있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임금 이론은 “구조”와 “의지” 중 “구조”를 선택하는 것인가? 물론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력이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사고팔리는 상품이며, 따라서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그 재생산 비용에 의해 가치(임금)가 결정된다고 봤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노동력 가치의 결정은 다른 상품과 차이점도 있다고 주장했다. 노동력은 인간 자신과 분리될 수 없으며, 따라서 자본가들이 노동력을 구입했을 때 마주하게 되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다른 상품들의 경우와는 달리 노동력의 가치 규정에는 역사적·도덕적 요소가 포함된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 “역사적·도덕적 요소”에는 노동자 투쟁의 누적된 효과도 포함된다. 이 점은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리카도 같은 고전파 경제학자들과 마르크스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의 하나이다. 마르크스는 노동력 가치의 결정 요소로 “역사적·도덕적 요소”를 포함시킴으로써, 임금이 노동자들의 육체적 생존에 필요한 최소 수준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고 한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임금철칙설’을 반박했다.
임금기금설
이처럼 마르크스는 임금 결정 요소로 시장의 작동과 계급투쟁을 모두 말했지, 한지원처럼 둘을 대치시키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한지원은 이 둘을 대치시키는가? 임금 결정에서 계급투쟁의 요소를 부정하고 시장의 작동만을 강조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내 주장을 ‘임금은 오로지 투쟁으로만 결정된다’는 허수아비로 만든 다음 이를 격파해 자신의 주장을 옹호하려는 부당한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임금 결정 요소로서 계급투쟁 같은 “역사적·도덕적 요소”를 조금이라도 인정하게 되면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 투쟁이 너무도 당연하고 필요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한지원은 임금 결정의 요소로서 “역사적·도덕적 요소”를 무시하기 때문에 그의 임금 이론은 마르크스의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것과 비슷해진다.
지난 글에서 한지원은 임금이 노동생산성이 오르는 만큼만 오를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최저임금 1만 원’ 요구와 최저임금 인상 투쟁을 비판했다. ‘급격한 임금 인상은 시장의 반격을 받는다’ 등등 운운하면서 노동생산성 향상 이상으로 임금을 올리는 게 불가능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번 글에서도 한지원은 “자본주의 이윤율 동역학 안에서 임금이 ‘장기적’으로 상승하려면, 노동생산성 상승이 동반되어야만 한다. 노동생산성에 비례해 임금이 상승할 경우 이윤율은 변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이 뒷문장은 틀렸다. “노동생산성에 비례해 임금이 상승”(착취율 불변)해도 불변자본 투자량에 따라 이윤율은 오르거나 내릴 수 있다.
그러나 더 큰 오류가 있다. 임금이 노동생산성에 비례해서만 오를 수 있다는 주장은 임금을 ‘노동의 가치(대가)’로 보면서 노동생산성만큼만 임금을 받을 수 있다고 보는 부르주아 경제학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바로 이런 친자본주의 경제학자들이 기업주 언론을 통해서, 최근의 최저임금이 노동생산성 이상으로 올라 문제가 된다며 격렬히 반대했을 때 한지원이 사실상 이들과 한편에 섰던 것은 우연한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임금이 노동생산성에 비례해서만 오를 수 있다는 생각을 사회 전체로 확대해 보면, 임금몫은 전체 생산물 중 일정 비율 이상을 넘을 수 없다는 ‘임금기금설’로 손쉽게 연결된다. 실제로 한지원(과 사회진보연대)은 마르크스가 노동소득분배율(착취율)을 불변으로 봤다고 왜곡하면서, ‘임금기금설’(마르크스가 비판했던)을 되살리려 거듭 애쓰고 있다. 그래서 나는 지난 기사에서 이렇게 비판했다. “임금기금론은 노동자들이 받을 수 있는 임금 총액이 정해져 있어서, 일부 노동자들이 임금을 올리면 다른 노동자들은 임금이 삭감될 수밖에 없다는 (그릇된) 이론이다. 그 실천적 함의인즉슨, 투쟁으로 조건을 개선하려는 시도는 결국 힘 있는 대사업장 정규직 노동자들이 더 많은 몫을 가져가게 되는 결과만을 낳아, 노동계급 내부 격차가 더 벌어질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지원은 이 비판에 여전히 한마디도 답변하지 않고 있다.
사실 한지원(과 사회진보연대)이 소득 주도 성장론을 비판하고 이에 덧붙여 최저임금 인상까지 비판하는 것은 소득 주도 성장론을 받아들이는 노동운동 내 가장 온건파(특히 국민파)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 비판의 방향과 내용이 잘못돼 한지원(과 사회진보연대)의 결론도 결국 가장 온건파가 주장하는 정규직 양보론으로 귀결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이렇다. 가장 온건파(예컨대 김유선 씨)는 정규직 양보론이 사실상 임금기금론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이 이론이 잘못됐다고 비판하면서도, 수줍게 ‘현실론’을 내세우면서 정규직 양보론을 주장한다. 반면, 한지원(과 사회진보연대)은 마르크스의 주장을 임금기금론으로 왜곡하고서는 이를 근거로 더 노골적이고 적극적으로 정규직 양보론을 주장한다. 그래서 온건파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최저임금 인상 투쟁을 부담으로 여기며 소극적일 때 한지원은 노골적으로 최저임금 인상 투쟁 무용론을 편 것이다.(그래서 그 유명한 한석호 씨가 한지원 씨를 즉각 방어하고 나섰던 것 같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는 착취율을 불변으로 봤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자본론》 중 상대적 잉여가치를 설명하는 부분은 임금의 절대적·상대적 크기의 변화와 그에 따른 착취율의 변화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마찬가지로 마르크스는 《임금, 가격, 이윤》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예컨대 8이라는 주어진 숫자가 있다고 하자. 이 숫자에는 절대적 한계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숫자의 상대적 한계가 변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만약 이윤이 6이고 임금이 2라면, 임금이 6으로 증가하고 이윤이 2로 감소할 수 있으며, 그래도 총액은 여전히 8이다.”
사실 마르크스가 임금을 ‘노동의 가치’가 아니라 ‘노동력의 가치’라고 정의한 것이 뜻하는 바 하나는, 임금이 생산물의 가치와 직접적으로 연계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이라고 하는 별도의 기준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체 생산물이 임금과 이윤으로 6 대 2로 나뉠지, 2 대 6으로 나뉠지는 미리 결정된 사항이 아니라는 뜻이다.
반면 앞서 살펴봤듯이 한지원은 ‘노동생산성에 비례하는 임금’, ‘전체 생산물 중 일정 비율로 정해진 임금몫’이라는 잘못된 주장을 거듭 하면서, 마르크스가 비판한 부르주아 경제학으로 후퇴하고 있다.
노동소득분배율 하락에 대해서는 왜 대답이 없나?
한지원은 내가 지난 기사에서 제시한 그래프를 비판한다. ‘한국의 노동소득분배율 추이’와 ‘대기업 중소기업의 임금 추이’ 그래프이다. 그는 이 중 ‘대기업 중소기업의 임금 추이’ 그래프에 대해 “노동자연대가 그려놓은 그래프의 기울기를 보면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임금격차가 벌어지고 있는 것을 오히려 확인할 수 있다”면서, 자신의 임금 인상 투쟁 무용론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해석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내 주장에 대한 반박은 전혀 되지 못한다. 이미 지난 기사에서 내가 이렇게 썼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이의 임금은 함께 오르내리는 경향이 있다. 그 간격은 때로는 더 좁아지거나 넓어지기도 하지만 결코 반대로 향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은 함께 오르내린다는 내 지적은 바로 한지원이 주장한 임금기금론이나 정규직 양보론에 대한 반박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지원은 이 점은 보지 않은 채, 자신의 입맛에만 맞는 임금 격차에만 주목하고 있다.
더 중요한 점은 한지원이 노동소득분배율이 20여 년간 하락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그래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말이 없다는 점이다. 이 그래프가 착취율이 불변이라는 그의 주장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반박인데도 말이다. 그는 최근의 최저임금 인상을 비판하면서, 2~3년간 노동생산성 향상보다 급격하게 오른 최저임금이 시장의 반격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20여 년간 노동소득분배율이 하락한 것을 고려하면, 최근의 최저임금 인상도 노동자의 몫이 상대적으로 감소한 것을 만회하려는 움직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한지원이 노동소득분배율 그래프에는 이처럼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임금 격차에만 집중하는 것은, 이윤몫을 되찾는다는 생각이 그 자신에게 전혀 없다는 점을 보여 준다.
노동자 몫의 감소
한지원은 내가 두 그래프를 동시에 제시한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길 바란다. 지난 20여 년간 노동자의 몫이 상대적으로 감소했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동자의 임금이 함께 오르내렸다. 임금 격차가 “더 좁아지거나 넓어지기도 하지만”,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동자의 임금이 서로 결코 반대로 향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대기업·중소기업 노동자들이 상대적인 임금몫 하락에 반대해 사용자들에게 맞서 연대해 싸워야 하며, 이런 투쟁 속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동자의 임금을 함께 올리며 그 격차도 줄여 나아가는 길을 찾아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한지원(과 사회진보연대)이 마르크스의 임금 이론을 ‘임금기금론’ 식으로 왜곡하는 점이나, 국민총소득을 전체 취업자 수로 나눈 연봉 5000만 원을 ‘공정한 몫’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이상의 임금을 받는 상대적 고임금 노동자들을 비난하는 것을 보면, 이들이 과연 대기업·공공부문 노동자들이 착취받고 있다고 보는지 의구심이 든다.(한지원과 사회진보연대는 자동차산업 1차 하청 노동자들의 임금 수준도 높다면서 이들의 투쟁도 폄하한다.) 한지원(과 사회진보연대)은 대기업·공공부문 정규직 노동자들이 저임금 노동자들이 생산한 가치의 일부를 이전받아, 대기업·공공부문 노동자들이 생산한 가치 이상으로 임금을 받고 있다고 보는 듯하다. 만약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라면, 이는 사실상 대기업·공공부문 정규직 노동자들이 다른 노동자들과 하나의 계급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이해관계
물론 마르크스의 관점으로 볼 때, 대기업·공공부문 정규직 노동자들의 이해관계가 다른 노동자들과 다르다는 생각은 그릇된 생각이다. 마르크스는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상업노동자들이 착취받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는 그들도 착취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상업노동자의 노동 덕분에 상업자본가들이 잉여가치 중 일부를 이윤으로 전취할 힘이 생기며, 상업노동자의 임금도 다른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최소한으로 억제된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들면서 말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상업노동자가 상업자본가의 착취에 맞서 싸우는 것도 완전히 정당하다고 봤다.
물론 상업노동자와 상업자본가를 불러 낸 나의 유추가 엉뚱하고 넘겨짚기 식인 추론으로, 사회진보연대의 주장을 곡해하는 것이라고 반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사회진보연대가 착취받고 있는 대기업·공공부문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 투쟁을 폄하하는 것을 보고 있자면 이런 의구심을 떨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한편, 사회진보연대는 기업주 언론들이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을 반대하거나, 부도 기업의 국유화로 일자리를 보장하라는 노동자연대 같은 좌파들의 주장을 반박할 때 ‘혈세를 낭비한다’며 하는 주장을 고스란히 반복한다는 점도 지적해야겠다. 이런 주장을 보자면, 사회진보연대에게서 계급투쟁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많이 사라졌는지 절감하게 된다. 그러나 세금이라는 것도 노동자들이 생산한 생산물의 일부일 뿐이다. 이를 공공부문 노동자 임금이나 일자리 보호를 위한 정부지출 또는 복지를 위해 쓰는 것은 모두 임금몫을 늘리는 일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해야 할 것은 세금을 최대한 이윤몫에서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지, 공공부문 노동자의 임금 인상이나 복지 확대를 반대할 일은 아닌 것이다.
임금 투쟁의 “도덕적·정치적 결과”(마르크스)를 고려해야
한지원은 자신과 나 사이의 쟁점이 “최저임금 인상을 결정하면 실제 시장이 목표한 대로 그렇게 움직이는지 여부”라고 주장한다. 임금 투쟁의 성과는 “실제 임금이 그만큼 오르느냐”로만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강동훈은 결과와 관계없이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을 내걸고 투쟁하는 과정이 노동자 단결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한지원이 쟁점을 이런 식으로 규정하는 것 자체가 바로 한지원의 난점을 보여 준다. 이런 관점은 노동자들의 의식과 조직이 일상적인 투쟁 속에서 성장한다는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을 완전히 놓치고 있는 것이다.
임금 투쟁은 단지 경제적 성과를 얻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물론 임금 투쟁은 통상 노동자들이 임금과 노동조건을 지키려고 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 투쟁을 하다 보면 연대와 집단적 자부심이 높아지고, 이것이 처음에 들고 나왔던 임금과 노동조건 향상만큼이나 중요해지게 된다(특히 임금 투쟁이 파업을 동반할 경우 이런 효과는 더욱 커진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투쟁으로 인한 온갖 고통을 참아 내면서 뜨거운 동지애를 발휘하고, 사용자에 대한 적개심을 품게 된다. 단지 자신의 일터에서 임금 투쟁을 할 때조차도 이 투쟁은 노동자들을 자신의 사용자와 주변 동료뿐 아니라 자본가 계급 전체와 노동자 계급 전체를 생각하도록 가르치고, 국가의 본질에 대해 눈뜨게 만든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이런 “항상적 전쟁” 속에서만 노동자들이 노예와는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반대로 나는 임금의 상승과 하락의 교대, 그리고 그에 기인한 고용주와 노동자들 간의 지속적 갈등은, 산업의 현재 조직에서 노동계급의 정신을 지탱해 주고, 노동자들을 지배계급의 침탈에 대항하는 하나의 거대한 연합으로 단결시키며, 노동자들이 무감각하고 아무 생각 없는 잘 먹인 생산도구가 되는 것을 방지해 주는 필수불가결한 수단이라고 확신한다. … 우리는 그[파업과 결사] 경제적 결과들이 겉보기에 하찮다고 해서 그것들에 눈감아서는 안 되며, 무엇보다도 그 도덕적·정치적 결과를 고려해야 한다.”
즉, 한지원의 주장과 달리 마르크스는 임금 투쟁의 성과와 관련해 단지 경제적 결과뿐 아니라 의식과 조직의 발전이라는 “도덕적·정치적 결과”를 고려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폴란드계 독일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임금 투쟁을 “시시포스의 노동”이라고 불렀다. 그리스 신화의 등장 인물인 시시포스는 신으로부터 큰 돌을 가파른 언덕 위로 밀어올려야 하는 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 돌을 정상에 올리면 돌은 다시 밑으로 굴러떨어진다.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돌을 밀어올리는 일을 시작해야 했다. 즉, 임금 투쟁은 올려놓아도 굴러떨어지는 돌처럼 한계가 명확한 것이기는 하지만, 또한 자본주의 사회의 임금 노동자라면 불가피하게 해야만 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엘리트주의
그럼 “시시포스의 노동”은 무의미한 것인가? 오히려 로자 룩셈부르크는 임금 투쟁 같은 “일상의 실천인 투쟁이 … [노동자 계급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임금체계를 폐지한다는 최종 목표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강조했다.
어느 모로 보나 고전적,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임금 투쟁에서 얻는 경제적 성과에만 의의를 둔 게 아니다. 그래서 나는 지난 기사에서 일상적인 임금 투쟁 속에서 조직과 의식을 발전시키는 것을 건너뛰고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철폐 투쟁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와는 거리가 멀다고 한지원을 비판했다. 같은 이유에서 나는 설사 한지원의 주장처럼 최저임금 투쟁이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 투쟁이 전혀 쓸모없는 게 아니라고도 주장했다.
반면 한지원(사회진보연대)은 노동자들이 어떻게 계급의식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보는가? 그간의 주장과 실천을 보건대, 한지원(과 사회진보연대)은 ‘과학적’ 대안을 제시하고, 이를 노동조합 기구를 이용해 교육하는 것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계급의식을 줄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그러나 자본주의 노동시장이 노동자들에게 가하는 소외와 파편화 경험과 이 경험을 극대화하려는 지배자들의 더 체계적이고 거대한 기구들에 맞서, 교육과 선전으로 대항할 수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공상적이다. 이런 생각은 노동자들이 일상의 투쟁 속에서 겪는 승리의 희열과 쓰디쓴 패배의 경험 속에서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고, 실수와 오류를 정정하며 효과적 대안을 찾아 나아간다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사회주의와 거리가 먼 엘리트주의일 뿐이다.
물론 한지원은 이렇게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최근의 최저임금 인상 투쟁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를 확대했는가? 또는 대기업·공공부문 정규직 노동자들이 중소기업·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제대로 연대했는가? 물론 이런 상황이 현실이긴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런 투쟁들 속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를 어떻게 확대할 것인지에 대한 대안을 내놓아야지 이런 투쟁 자체를 폄하해 일축하고, 오히려 투쟁과 연대 자체를 가로막는 주장을 펴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인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사회진보연대를 비롯한 적잖은 활동가들조차 대기업·공공부문 정규직 노동자들과 다른 노동자들의 이해관계가 다르다고 보면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중소기업·비정규직 노동자들과의 연대로 나아가도록 하는 일을 회피하지 않았는지 돌아볼 일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함 ― 일상의 투쟁에서 연대를 구축해야
끝으로, 한지원이 내 질문에 침묵하며 답변하고 있지 않은 것이 또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한지원은 경제불황기에 임금 투쟁이 노동자들의 임금을 늘리지도 못하고, 노동자 사이의 격차를 축소하지도 못한다고 주장한다. 곧바로 시장의 반격을 당한다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대기업·공공부문 정규직들이 임금을 양보하는 대신에 일자리를 계속 늘려나가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물론 이 방법은 시장의 반격을 당하지 않을 것처럼 주장한다.
그러나 자본가들이 이윤 확대를 위해 임금 상승에 반작용한다면서, 도대체 일자리 확대에는 반작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는 무엇인가? 일자리를 계속 늘려나가면 시장의 반격을 극복할 수 있다는 주장은 임금을 계속 올려나가면 자본주의를 폐지할 수 있다는 주장만큼이나 허황하다.
그럼에도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한지원(과 사회진보연대)이 자본의 이윤을 침해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며, 노동자들 사이에서의 나눔만이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다고 본다는 점이다. 사실 그들이 계급투쟁의 의의를 폄훼했을 때 그 논리적 결론은 노동자 사이의 나눔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한지원과 사회진보연대는 마르크스주의에서 계급투쟁을 도려냄으로써 자신의 사상을 부르주아 경제학과 비슷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한지원은 마르크스의 경제 이론에서 계급투쟁을 배제하는 것이야말로 ‘과학적’인 것인 양 생각하는 듯한데, 이런 관점은 이론과 실천 사이의 관계를 끊어 버린 알튀세르 식 과학 개념일 수는 있어도, 마르크스가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에서 밝힌 개념은 결코 아니다. 애덤 스미스나 데이비드 리카도 같은 일급 경제학자들도 밝히지 못한 문제들을 마르크스가 해결한 것은 노동자들이 계급투쟁을 통해 의식과 조직을 발전시키고, 그 힘으로 자본주의 국가를 타도하고 노동자 국가를 구축해 자본주의를 철폐한다는 전략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회진보연대가 이론과 정치 모두에서 계급투쟁의 의의를 깨닫고, 노동자들의 일상적 투쟁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