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은 대안 모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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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 〈다함께〉 신문이 지적했듯이,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유럽헌법 부결은 20년 넘게 유럽 사회를 지배한 신자유주의 정책 때문에 여러 해 동안 고통을 겪은 사람들의 승리였다. 그것은 또한 신자유주의적인 사회를 꿈꾸는 자들의 패배였다.
그러나 윤효원 〈매일노동뉴스〉 국제담당 객원기자(이하 윤효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매일노동뉴스〉 6월 12일치.)
그는 사람들이 유럽헌법을 제대로 알고나 반대했을까 하고 말한다. 극우파와 극좌파의 선동에 대중이 부화뇌동했다는 투다.(그는 1987년 한국의 개헌 국민투표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잘 모르고 찬성했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당시 국민투표는 6월항쟁의 핵심 요구인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찬성이 압도적이었던 것은 너무 당연했다.)
유럽헌법은 프랑스 전역에서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때문에 “무료로 배포된 [유럽헌법] 안내서 이외에 프랑스인들은 직접 서점을 찾아 수십 종에 이르는 관련 서적까지 구입”했다.(〈오마이뉴스〉 6월 18일치.)
수많은 토론과 수백 개의 모임이 열렸다. 1천 개의 지역사회 단체들이 신자유주의적이고 반민주적인 유럽헌법 비준에 반대해 뭉쳤다.
이 과정에서 극우파의 구실은 매우 미미했다.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LCR)의 지도자 올리비에 브장스노는 “반대 운동은 인종차별적이지도, 국수주의적이지도, 반(反)터키적이지도 않았다. 헌법 반대는 사회적이고 유럽적이며 반신자유주의적이다.” 하고 주장했다.
윤효원은 유럽헌법의 “기본권 헌장”을 찬양한다. 그러나, 헌법 전체는 노동계급과 피억압 민중에게 해로운 조항으로 가득하다.
헌법은 여성의 자유롭고 합법적인 낙태 선택권을 부정한다. 포르투갈·아일랜드·폴란드에 만연해 있는 야만적인 여성 억압 상태를 용인하는 것이다.
또, 회원국 거주자 중 3분의 1이 시민권(투표권을 포함해)을 인정받지 못한다. 이것은 난민들에게 굳게 닫혀 있는 “요새화한 유럽”을 건설하겠다는 뜻이다.
헌법은 회원국들의 다국적인 성격을 부인하고, 영토보전 원칙의 이름으로 피억압 국민의 자결권과 “국가 없는 국민”을 거부한다.
또, 준독재적이고 비민주적인 유럽 공동체를 만들려 한다. 진정한 정치 권력은 정부들과 선출되지 않는 위원회 같은 기구들의 수중에 집중돼 있다.
유럽중앙은행은 “독립성” ― 그 권한은 시민이나 민중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 을 유지할 것이고, 기업과 주주를 제외한 나머지에게는 아무 책임도 지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4억 5천만 유럽인들에게 굳게 닫힌 문 뒤에서 유럽 정부들이 고안한 것이다. 대다수 유럽인들은 사후적으로도 직접 비준할 수 없(었)다. 대다수 회원국들은 간접적으로 비준 절차를 거쳤거나 거칠 것이다.
그럼에도 윤효원이 헌법 부결을 환영하지 않는 진정한 까닭은 유럽연합이 미국 권력에 맞서는 대항 세력이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단일 패권국인 미국 일방주의의 폐해가 심각해질 대로 심각해진 상황”에서 “통합된 유럽의 등장은 바람직하다.” 그래서 유럽헌법 비준과 제정은 고무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 맞서 경쟁 열강의 성장을 지지하는 것은, 냉전이 그랬듯이 자원 낭비, 인류의 생존 위협과 함께 새로운 무기 경쟁을 부추길 것이다. 실제로, 헌법(I-41-3)은 “회원국들이 점차 군사력을 증강”하도록 규정해 놓았다.
또, “연대 조항”(I-43)은 “테러리스트의 위협에 맞서 선제 행동을 하고” “민주적인 제도들과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군사적 조처를 포함한 모든 수단을 재량껏”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을 유럽연합에 부여한다. “테러리스트”의 개념은 구체적으로 명시돼 있지 않다.
이것은 미국 제국주의가 아닌 대안이기는커녕, 유럽의 군국주의화를 뜻하며 제국주의 질서를 강화할 뿐이다.
유럽헌법이 “‘경제적 가치’보다 ‘사회적 가치’를 우위에 놓는”(윤효원) 것도 아니다.
유럽헌법은 자유시장을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만들어 놓았다. 사유재산과 시장 질서 침해를 법으로 금한다. 이것은 한 세기 반 동안 노동자 투쟁을 통해 국민국가 수준에서 획득한 사회적 성과물을 법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또, 이미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통해 제도화한 긴축 재정을 고수한다. 사회복지를 철저하게 삭감하고 공공 경제정책을 좌절시키겠다는 뜻이다.
이에 항의해 프랑스전력청(EDF) 노동자들은 유럽헌법의 상징적인 인물 프리츠 폴케슈타인[유럽연합 역내시장 담당 집행위원]의 전기를 끊어버리기도 했다.
유럽헌법은 결코 미국 주도의 세계화를 저지할 수 있는 방벽이 아니다. 유럽은 자본주의 질서를 지닌 미국의 경쟁자고, 세계화 속에서 미국의 주도권에 도전하고 싶어할 따름이다.
따라서 유럽 지배자들이 건설하려는 유럽은 결코 미국에 대한 대항 모델이거나 대안 모델이 될 수 없다.
프랑스 노동자들은 유럽 지배자들의 프로젝트와는 완전히 다른, 한 나라 법 중에서 최상의 것을 택해 모든 사람들이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사회적 유럽’을 원했다. 그들이 가난과 전쟁을 공유할 까닭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