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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홍콩 투쟁의 역사적 배경과 쟁점

2019년 9월 4일 홍콩 행정장관 캐리 람이 범죄인 인도 법안(일명 송환법)을 철회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캐리 람의 철회 발표가 너무 늦었고 나머지 4대 요구1를 쟁취할 때까지 투쟁하겠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캐리 람의 송환법 철회 발표 뒤에도 시위는 이어졌다.

홍콩 투쟁에서 또 한 번의 전환점은 2019년 10월 1일이었다. 시진핑이 “동지들, 수고했어요!”라며 신중국 건국 7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치렀지만 홍콩에서 시위 고등학생이 경찰의 근거리 사격으로 사경을 헤맨다는 소식이 국제 언론을 도배했다. 그로부터 또 며칠 뒤에는 의문사를 당한 시위 참가 여고생이 발견되면서 홍콩 투쟁이 다시 폭발할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10월 5일 홍콩 행정당국은 복면금지법을 발표하며 결코 양보할 뜻이 없음을 밝혔다. 시위를 조직하는 민간인권전선2 대표가 테러를 당하는 등 조직 폭력배의 백색테러도 횡행한다. 홍콩 투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하다. 이번 송환법 반대 투쟁은 2014년 10월 79일 동안 센트럴을 점령했던 우산운동이 끝난 지점에서 시작됐다.

이 글은 홍콩에서 투쟁이 등장한 배경을 설명하고 홍콩 투쟁과 이를 둘러싼 정치적 쟁점에 대한 평가를 하고 향후 전망을 제시하고자 한다.

역사와 배경

명나라 시절 홍콩은 향나무를 실어 나르는 조그마한 항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던 홍콩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은 영국을 포함한 제국주의 열강이 중국을 침략하면서였다.

아편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난징조약 제3조에는 “빅토리아 여왕과 그 후손들이 ‘영구히 홍콩 섬을 소유’하고, 그들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지배하도록 할 것”(스펜스 2007: 199)이라고 명시돼 있었다. 외세는 중국을 침략해 난도질했다. 난징조약은 그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난징조약으로 성에 차지 않았던 영국은 1856년 애로호 사건을 벌여 제2차 아편전쟁을 시작했다. 1860년 영국-프랑스 연합군은 베이징을 점령해 보물을 약탈했을 뿐 아니라 원명원을 불태웠다. 1860년 청나라는 영국에게 카오룽 반도를 내주는 베이징 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1898년 영국은 카오룽반도 위의 신계(New Territories)와 란터우 섬을 장악하고 99년간 조차지로 삼았다.3

그림1 홍콩과 주변 지역 홍콩 섬 위쪽의 신계 지역은 선전 시와 인접해 있다

그 뒤로 홍콩은 영국의 중국 진출을 위한 전초기지이자 동양 최대의 항구 구실을 했다. 1920년대 홍콩은 중국 내륙에 비해 경제적으로 발전했고, 따라서 노동계급이 많이 형성돼 있었다.

1922년 홍콩 선원 파업은 중국 대륙이 1925년 5·30운동과 1925~1927년의 중국혁명으로 나아가는 발판이 됐다. 그 당시 막 등장한 중국공산당 당원 소조징(蘇兆徵)과 임위민(林偉民)가 지도한 이 파업은 50여 일 동안 지속돼 홍콩 전역에서 동조파업으로 확산됐다. 이 파업이 승리하자 홍콩 시민 20만 명이 파업 승리를 축하하며 홍콩 거리를 누볐다(웨일스 1981: 45-46).

1949년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공산당이 대륙에서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자 중국공산당에 반대하지만 장제스의 안하무인(眼下無人)과 권위주의 통치에도 반대한 사람들이 홍콩으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최근 영국 국기인 유니언 잭을 흔드는 일부 시위대가 부추기는 환상과 달리, 영국 식민지 홍콩은 자유와 민주주의가 온전히 보장되는 곳이 결코 아니었다.

1997년 중국 반환 때까지 홍콩인들은 대표를 선출할 권리가 없었다. 1973년 교사들의 저항이 있기까지 식민지 홍콩의 공식 언어는 영어뿐이었다. 홍콩 노동자의 경제적 조건도 좋지 않았다. 1967년 산포콩에 있는 조화(造花) 공장에서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싸우던 노동자들이 경찰과 충돌하면서 노동자 21명이 체포됐다. 이 때문에 투쟁은 더 격렬해졌고, 당시 문화대혁명의 영향을 받은 친(親)중국공산당 세력들이 거리에 폭탄을 설치하는 무장투쟁을 벌였다. 이로 인해 51명이 죽고, 832명이 부상했다. 사실 영국 정부가 강력한 탄압에 나선 계기는 당시 총리인 저우언라이가 홍콩이 영국 식민지임을 재확인하며 불개입 입장을 표명한 것이었다. 이 덕분에 영국은 마음 놓고 홍콩 내 좌파를 탄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반란 때문에 식민 당국은 유화책을 내놓을 필요를 느꼈다. 이런 개혁 조처들에는 빈민에 대한 공적 부조, 9년 무상교육, 정부 지원의 사회복지 등이 있었다. 또한 식민 당국은 1970년 당시 인구 400만 명 중 과반수에게 주택을 공급하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공공 주택제도를 확립했다(엔다콧 2006: 293-296; Hung 2010).

1967년 반란과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던 68운동의 영향으로 홍콩에서도 학생운동이 급진화했지만 이내 두 경향으로 분열했다. 하나는 마오주의 분파인데 이들은 중국을 사회주의로 여겼으며, 중국의 성공을 고무·찬양하는 데 초점을 맞췄고 홍콩 내 투쟁에 대해서는 관심을 덜 기울였다. 다른 한편에는 중국을 권위주의 체제로 보고 중국공산당에 비판적이었으며, 지역의 사회운동에 초점을 뒀다. 1997년 이후 전자는 중국공산당과 친화적인 조직들로 재구성됐고, 후자는 범민주 세력으로 재집결했다.

경제 발전

홍콩은 풍부한 저임금 노동력(중국 본토와 동남아시아에서 온 이주 노동자), 선박 서비스, 영국의 관세특혜, 효율적인 은행과 보험 등의 요인 덕분에 전후에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섬유, 합성수지, 전자 등 제조업이 일찍부터 발전했다. 이 덕분에 1971년 홍콩 제조업 노동자의 임금 수준은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높았다(엔다콧 2006: 294).

1970년대부터 홍콩 경제는 제조업 중심에서 은행업, 금융, 그리고 부동산 등으로 다변화하기 시작했다. 1972년 닉슨의 중국 방문을 계기로 홍콩은 수출입 화물들의 중계항이자 글로벌 금융 중심지로 우뚝 솟았다. 이 덕분에 홍콩은 아시아 4인방 중 하나가 됐다. 그리고 1978년 덩샤오핑이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했고 이듬해에 선전시를 중국 최초로 경제자유구역으로 정했다. 이 때문에 중국 지배자들에게 선전시와 주강 삼각주에 인접한 홍콩이 중요해졌다. 이전까지 영국 식민지 홍콩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중국 당국은 1982년부터 시작된 반환 협상에서 홍콩에 대한 주권을 강조했다.

홍콩 경제가 아시아 최대 중계항이자 금융 중심지로 발전하면서 사회간접자본도 팽창했다. 경제 발전 덕분에 노동계급도 급속히 늘어났고, 언론·출판과 (노동조합과 정치단체 등) 결사의 자유가 확립됐다.4

1982년부터 영국과 중국은 홍콩 반환 협상을 진행해, 1984년에 중영공동선언을 내놓았다. 핵심 내용은 세 가지다. 첫째, 1997년 7월 1일에 신계와 란타우 섬뿐 아니라 홍콩 섬과 카오룽 반도도 중국에 반환한다. 둘째, 홍콩은 일국양제(一國兩制) 원칙을 따르는데, 그 내용은 항인치항(港人治港)5과 고도자치(高度自治)이다. 셋째, 일국양제를 2047년까지 50년 동안 유지한다. 이것은 중국과 영국 각자의 이해관계를 적절히 타협한 산물이었다. 영국은 향후 50년 동안 홍콩에 투자한 자국 자본을 그대로 두면서 홍콩을 중국으로 향하는 전초기지로 삼을 수 있었다. 중국은 개방 정책에 따라 홍콩을 외국 자본을 끌어들일 수 있는 통로로 활용할 수 있었다.

중국 당국은 홍콩을 반환받을 때까지 홍콩의 경제적 활력을 그대로 유지하는 데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공산당 정부는 홍콩 노동자들보다 주요 기업가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노력했다. 예를 들어 중국 당국은 홍콩의 헌법에 해당하는 기본법 초안을 작성할 때, 노동자들의 단체교섭권·파업권, 홍콩 행정특구 정부를 구성하는 보통선거 실시 같은 조항을 넣자는 민주세력들의 주장을 철저히 무시했다. 중국 정부는 홍콩 반환 뒤에도 친기업주 입장을 견지했다.

1989년 톈안먼 항쟁과 그 이후

1989년 6월 4일 중국 정부가 톈안먼 항쟁을 진압하자 당시 인구 400만 명의 홍콩에서 150만 명이 거리로 나와 중국 당국을 비판하고 톈안먼 항쟁을 지지했다(Chan 2016). 8년 뒤에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면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국가에 속하게 된다는 점을 우려했기에 자신들의 미래를 위한 항의이기도 했다. 그 이후 매년 6월 4일 빅토리아 공원에서 톈안먼 항쟁을 기념하는 촛불집회가 열렸다. 중국에서 홍콩으로 온 정치적 망명자나 홍콩 내 민주인사들은 중국 민주화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6

1997년 동아시아를 강타한 경제 위기는 홍콩을 비켜가지 않았다. 식민 당국은 반환 직전까지 신자유주의 조처들을 실시했고, 1970년대에 제공한 사회개혁 프로그램들을 축소하거나 폐지했다. 이 때문에 홍콩에서는 빈부격차를 나타내는 지니계수가 1990년대에 더 가파르게 치솟았다.

그래프1 홍콩의 지니계수 지수가 높을수록 빈부격차가 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1997년에 홍콩을 반환받은 중국 정부와 홍콩 행정특구 당국은 몇 가지 점에서 식민 당국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첫째, 홍콩 행정특구 정부는 신자유주의 정책과 더불어 부동산 개발업자와 손잡고 지역 개발 사업(스타 페리 부두 철거, 퀸즈 부두 철거, 인쇄거리 재편 등)을 추진했다. 이 때문에 홍콩 지니계수가 2000년 이후에 계속 상승했다. 1997년을 기점으로 홍콩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재식민화되는 과정에 들어섰다고 보는 것은 과장이지만(Law, 2009: 173-176), 홍콩의 새 정권이 영국 식민 지배로부터 물려받은 협력적 구조와 정실 자본주의를 용인했다는 라우윙상(Law Wing-sang)의 지적은 새겨들을 만하다.

둘째, 중국 당국은 식민 당국으로부터 물려받은 비민주적인 선거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진정한 보통선거를 실시하지 않았다. 홍콩 선거제도는 입법회 의원수가 조금 늘고 행정장관을 선출하는 선거인단 수가 늘어난 것 외에는 영국의 식민지 치하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입법회는 크게 지역구 의원과 직능대표로 구성된다. 지역구에서 35명이 선출되고, 직능대표로 35명이 선출된다. 이때 직능대표 35명 중 30명은 직능별로 1명씩 선출되고, 5명은 직능별 유권자로 등록하지 않은 사람들이 직접 선출한다. 영국 식민정부와 마찬가지로 중국 정부도 직능별 대표가 전체의 절반을 구성하도록 해서 입법회 과반을 친중 인사가 차지하도록 하고 있다. 기업주들 내에서는 친중 입장인 건제파(建制派)가 다수이기 때문이다.

2016년 9월 4일 입법회 선거를 예로 들면, 총유권자 380만 명이 지역구에서 35명을 선출했다. 그리고 직능별 유권자(자연인과 법인)로 등록한 24만 명이 30명을 선출했으며, 380만 명 중 직능별 유권자로 등록하지 않은 356만 명이 5명을 선출했다. 더욱이 직능별 선출을 보면 금융 부문에서는 유권자로 등록한 125명이 1명을 선출했지만, 교육 부문에서는 8만 8185명이 1명을 선출했다. 더 황당한 일은 대기업의 여러 자회사들이 각각 한 표를 행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홍콩에 자회사를 둔 외국계 기업도 직능별 유권자로 등록하면 1표를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이다.

행정장관 선거도 비민주적이다. 2007년 중국 전국인민대표자대회(이하 전인대)는 2012년 홍콩 행정장관을 간선제로 선출하고 선거인단을 800명에서 1200명으로 늘리기로 했으며, 2017년에 직선제를 시행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2014년 8월 전인대는 행정장관을 직선제로 선출하되, 1200명의 선거위원 중 절반 이상의 동의를 얻는 애국 친중인사 2~3명 중 한 명을 선출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발표는 2014년 10월 79일 동안 센트럴을 점령하는 홍콩 우산운동을 촉발했다.7

이 때문에 홍콩 시위에서 입법회와 행정장관에 대한 진정한 보통선거 요구가 계속 제기되는 것이다.

중국 정부의 배신

홍콩을 반환받은 중국 정부는 야금야금 홍콩의 민주적 권리를 제약하기 시작했다. 이는 홍콩 반환 때의 약속, 즉 일국양제·항인치항·고도자치 약속을 어기는 것이다.

2003년은 중국 정부가 불간섭(不干預)에서 개입(有作爲)으로 방향을 전환한 시점이었다. 중국 정부는 기본법 23조에 국가보안법을 삽입하려다8 50만 명이 참가한 대중 저항에 직면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2003년부터 정치국 내 상무위원회가 홍콩을 담당하면서, 중국은 경제적·문화적·정치적 개입을 확대했다. 전인대 상무위원회는 홍콩 기본법을 해석하는 문제에서 홍콩의 정치적·시민적 권리를 제약하는 해석을 지금까지 일곱 번이나 내놓았다.9

2010년 중국 정부는 톈안먼 항쟁 이후 처음으로 민주파를 접촉해 개혁에 관해 협상을 시작했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2012년 중고등학교 교육과정에 애국심을 고취하는 국민교육을 도입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조슈아 웡 같은 학생들이 주도한 저항으로 좌절됐다. 그 후에도 중국 정부는 행정장관 선출 제도를 개악하려 했다. 중국 정부는 행정장관 선거에서 후보추천위원 절반 이상의 지지를 얻은 후보에게만 입후보 자격을 주려고 했다 (후보추천위원은 친중국 성향이 압도 다수다). 이 시도는 2014년 우산운동으로 좌절됐다. 이어서 2019년에는 송환법을 추진하다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2012년 교육 과정에 애국 교육을 포함시키는 시도에 대한 저항에서 학민사조(學民思潮; 나중에 데모시스토당이 됨)가 등장했다. 2013년에는 정부 비판적인 TV 탄압에 대한 저항이 벌어졌다. 이런 저항 이후 본토행동, 토지정의연맹, 열혈공민 등의 단체들이 등장했다. 이와 더불어 홍콩 본토주의 단체들이 2010~2013년 이후 중국 정부의 민주주의 억압 강화, 민주파 세력들의 무능력, 경제적 불평등 확대를 배경으로 급속히 늘어났고, 2014년 우산운동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10

한동안 홍콩 젊은이들은 “평화적이고, 합리적이며, 비폭력적인” 수단을 통해 기성 체제의 규범 내에서 자신들의 관심사를 표명하곤 했지만, 2014년 우산운동 뒤에는 이런 태도가 바뀌었다. 2014년 우산운동은 홍콩의 젊은이들이 새로운 사회적·정치적 의식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됐다.

홍콩 본토주의 등장과 홍콩 정체성

후이와 라우(Hui and Lau 2015)는 “우산운동의 적극적 참가자들이 베이징의 개입에 대체로 반대했다는 점에서, 홍콩에서 민주적 운동의 모든 분파는 본토주의적”이라고 지적했다. 이는 부적절한 지적이다. 홍콩의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모든 이를 본토주의자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 본토주의자들의 영향력이 확대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2014년 우산운동의 여파로 본토주의자 8명이 입법회 선거에서 당선했다. 그중 2명은 선서 과정에서 당선이 취소됐지만 여전히 입법회에 6명이 있다. 하지만 2019년 송환법 반대 운동에서는 본토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쥐지 못했다.

본토주의가 등장한 배경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홍콩 반환 이후 중국 자본이 홍콩에 물밀듯 들어오면서 홍콩 시민들의 경제적 상황이 열악해진 것에 대한 반발이다. 1997년 홍콩 반환 당시 홍콩의 경제 규모는 중국 전체의 18퍼센트에 이르렀지만 2018년에는 중국 경제의 3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했다.

홍콩의 주택난과 일자리 그리고 물가 수준은 더 심각해졌다. 이는 홍콩에 들어온 중국 자본 때문이다. 현재 홍콩에서 기업 활동을 하는 자본의 60퍼센트 이상이 중국 자본이다. 중국 자본이 홍콩에서 부동산 투기를 하니 아파트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랐고, 중국 기업들이 보통화(중국 표준어)를 사용하는 청년들을 선호하니 (광둥어를 쓰는) 홍콩 청년들의 박탈감은 커져갔다.11 그래서 홍콩 젊은이들은 홍콩-선전 간 고속철도인 광선강(XRL)이 홍콩을 광저우시와 선전시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홍콩인들의 생활수준 등락에 따라 스스로 중국인이라는 자부심도 함께 오르내렸다.

둘째, 중국 정부가 1997년에 약속한 50년 동안의 고도자치를 조금씩 훼손하고 홍콩의 민주주의를 짓밟는 시도에 대한 반발이다. 이런 반발을 하는 세력들이 모두 본토주의자들은 아니다. 정치적으로 본토주의자들은 중국 대륙의 통제에 대한 반대에서 더 나아가 홍콩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다양한 사상을 말한다. 중국 정부의 개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범민주파 정당들의 무능이 본토주의자들의 영향력 확대를 초래했다. 그래서 본토주의자들은 친민주 세력과 친중국 세력 모두를 비판한다.

홍콩 젊은이들은 2013년 멜라닌 분유 파동 등을 보면서 홍콩이 중국화되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서 이들은 중국 대륙에서 온 이민자들이나 관광객들을 ‘메뚜기 떼’로 묘사하기도 했다. 본토주의자들은 홍콩으로 들어온 ‘침략자’들에 맞서 특정한 정치적 의제를 갖춘 정치적 정체성을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홍콩의 정체성, 식민지 근대성 같은 용어들이 본토주의 등장을 설명할 때 자주 사용된다.

홍콩 정체성은 중국 대륙과의 차별성을 나타내는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용어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홍콩이 중국에 반환될 때에도 이른바 ‘홍콩 정체성’ 같은 것은 존재하지는 않았다. 1999년 미국 전투기가 유고슬라비아 주재 중국 대사관을 폭격했을 때 중국 본토뿐 아니라 홍콩에서도 반미 시위가 벌어졌다. 2003년 중국의 유인우주선 선저우 5호에 대해 홍콩인들도 감격스러워했다. 특히 우주인 양리웨이가 홍콩을 방문했을 때 홍콩 사람들은 열렬히 환영했다.

일부 본토주의자는 중국인을 비하하는 인종차별적 용어(지나인)를 사용하기도 한다. 또 조슈아 웡 같은 본토주의자들은 중국의 개입에 맞서기 위해 미국과 독일 등과 같은 다른 제국주의 열강을 끌어들이려 한다. 따라서 본토주의자의 정치는 중국과 홍콩 노동계급의 단결을 해친다. 중국공산당 정권에게는 홍콩 운동의 소위 ‘반중국 정서’를 강조하고 부각하는 것이 홍콩의 민주주의 요구가 중국 본토 대중에게 확산되는 것을 막는 편리한 수단이 된다.

그래프2 홍콩에서 벌어진 중국 본토화에 반대한 시위 횟수

홍콩 투쟁의 과제

중국 당국의 개입이 늘어날수록 홍콩 행정특구의 영향력은 줄어들고 따라서 저항과 항의의 대상은 행정특구뿐 아니라 중국 정부로 향하게 됐다(Cheng, 2016). 이런 점에서 홍콩 투쟁의 판돈은 크게 불어났다.

사실 홍콩이라는 도시가 거대 국가인 중국에 맞서 승리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지금까지 홍콩인들이 중국 정부의 개입을 좌절시킨 사례들이 많이 있다. 따라서 홍콩 운동의 승리가 요원한 일은 아니다. 승리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과제들를 수행해야 한다.

첫째, 홍콩 투쟁이 다섯 가지 요구를 쟁취하고 더 나아가려면 노동계급을 동원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 대중의 경제적 요구를 제기해야 한다. 또 잠재적 노동자인 청년을 더 많이 끌어들이기 위해 주택과 일자리 문제를 함께 제기해야 한다.

둘째, 중국 대륙의 노동자 대중에게 호소하고 연대를 건설해야 한다. 중국 경제가 불황을 겪고 그 비용을 노동자들에게 떠넘기면서 중국의 산업 현장에서도 긴장감이 돌고 있다. 특히 광저우시와 선전시 등 홍콩에 인접한 지역들은 제조업 중심지이고 지난 몇 년 동안 노동자들의 파업과 항의 행동이 가장 많았던 곳 중의 하나다. 비록 쉽지는 않겠지만 본토 노동자 대중의 투쟁을 지지하고 이들의 연대를 이끌어내는 것이 핵심 과제 중 하나다. 이런 점 때문에 대륙의 중국인들에 대한 거리 두기는 홍콩 투쟁에 해악적이다.

셋째, 홍콩 투쟁을 중국과 미국의 대립이라는 프리즘으로 보는 진영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중국을 모종의 사회주의 사회로 보거나 그 잔재가 남아 있어 서방 국가들보다 진보적이라고 보는 일부 좌파들은 홍콩 투쟁을 지지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한 비판으로는 김영익(2019)을 참고할 만하다.

넷째, 모든 운동은 자생적으로 생겨나 자발적으로 확산되고 발전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의식적인 노력을 집중하는 혁명적 조직과 정치가 필요하다. 아무리 자생적이고 조야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운동에는 그 나름의 지도력(지도부)이 존재한다. 홍콩 투쟁을 이끄는 민간인권전선은 온건하고 개혁주의적이며 연성 자율주의적이다. 이런 지도부로는 운동을 지속적으로 이끌 수 없을 뿐 아니라 대체로는 운동을 전진시키지 못한다. 러시아혁명과 독일혁명의 상반된 결과는 혁명이 발생하기 전에 혁명적 조직을 건설해야 할 필요성을 가장 잘 드러낸다.

참고문헌

김영익. 2019. “중국 정부의 기만과 탄압에도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다.” 〈노동자 연대〉 9월 18일.

스펜스, 조너선. 2007. 〈현대 중국을 찾아서〉 1. 이산.

엔다콧, G. B. 2006. 〈홍콩의 역사〉. 한국학술정보(주).

웨일스, 님. 1981. 〈중국노동운동사〉. 청사.

Chan Che-po. 2016. Post-Umbrella Movement: Localism and Radicalness of the Hong Kong Student Movement. Contemporary Chinese Political Economy and Strategic Relations: Kaohsiung Wol.2 Iss2.

Chan Chi Kit. 2017. Discursive opportunity structures in post-handover Hong Kong localism: the China factor and beyond. Chinese Journal of Communication. vol.10, no.4.

Cheng W. Edmund. 2016. Street Politics in a Hybrid Regime: The Diffusion of Political Activism in Post-colonial Hong Kong. The China Quarterly No.226.

Hui Po-Keung and Lau Kin-Chi. 2015. “Living in truth” versus realpolitick: Limitations and potentials of the Umbrella Movement. Inter-Asia Cultural Studies Vol.16, No.3.

Hung Ho-feng. 2010. Uncertainty in the Enclave. New Left Review 66. Nov-Dec 2010.

Law Wing Sang. 2009. Collaborative Colonial Power. Hong Kong University Press.

  1. 시위대는 송환법 철회 외에도 구속 시위자 석방, 시위대 폭도 규정 철회, 경찰 폭력에 대한 독립적인 조사위원회 구성, 행정장관과 입법회에 대한 진정한 보통선거를 요구한다. 이 글을 쓰는 현재 구속된 시위대는 2천 명이 넘는다.

  2. 2002년 9월 중국공산당이 홍콩의 민주주의를 제한하는 것에 반대하는 범민주파 정당들(민주당, 공민당, 노동당 등)과 노동자, 학생, 여성 등의 단체들과 여러 시민단체들이 결성한 연대체 기구로, 현재 48개 단체가 참가하고 있다. 홈페이지는 http://www.civilhrfront.org/이다.

  3. 영국은 1997년에 신계 지역과 란터우 섬만 돌려주면 됐다. 홍콩 섬과 주룽 반도는 영원히 영국 영토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984년 덩샤오핑과 마가릿 대처가 홍콩 섬과 주룽 반도를 모두 중국에 돌려주기로 합의했다. 홍콩 섬과 카오룽 반도는 신계 지역에서 전력과 식수 등을 공급받기 때문에 자체로는 도시 기능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영국은 홍콩 섬과 카오룽 반도를 반환하는 대신 50년간의 일국양제 조처를 얻었다.

  4. 홍콩이 제한적이나마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실행했다고는 하지만 이를 과장해서는 안 된다. 1997년까지 홍콩의 빈부격차는 심했고, 민주주의조차 매우 제한됐으며, 1990년대 초반까지 여성의 지위는 형편없었다.

  5. 항인치항이란 홍콩(香港) 사람이 홍콩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6. 2014년 10월 우산운동 실패 이후 홍콩전학련 내에서 분열이 나타났다. 홍콩 본토주의자들과 일부 대학 학생회 등은 6·4 톈안먼 민주화 기념 촛불집회 참가를 거부했는데, 중국의 민주화보다 홍콩의 민주화가 더 시급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체로 대학 학생회는 2015년 당시 렁춘잉(2012-2017년 제3대 홍콩 행정장관)과 중국 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7. 중국 전인대의 이 안은 2015년 6월 개회된 입법회에서 압도 다수의 반대로 부결됐다.

  8. 홍콩 기본법 23조는 중국 인민정부에 대한 반역, 분리 독립, 선동, 전복 또는 국가 기밀 절도 등을 금지하고 외국 정치조직의 홍콩 내 정치활동, 홍콩 내 정치단체와 해외 조직의 연계 등을 금지하는 내용이다.

  9. 홍콩의 최종심은 종심법원에서 이뤄지지만 정작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항은 전인대 산하의 상무위원회에 해석을 의뢰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6년 입법회 선거에 당선된 홍콩 본토주의자 두 명에 대한 의원 자격 박탈 문제였다.

  10. 본토주의 단체로는 ‘홍콩독립운동’, ‘본토행동’, ‘홍콩본토역량’, ‘열혈공민‘, ’본토민주전선‘, ’청년신정‘ 등이 있다. 이 단체들의 주요한 주장을 보려면 Chan(2017)을 참고할 수 있다.

  11. 홍콩은 광둥어를 사용하는데, 이 언어는 중국의 공식 언어인 보통화와는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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