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홍콩 투쟁의 역사적 배경과 쟁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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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4일 홍콩 행정장관 캐리 람이 범죄인 인도 법안
홍콩 투쟁에서 또 한 번의 전환점은 2019년 10월 1일이었다. 시진핑이 “동지들, 수고했어요!”라며 신중국 건국 7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치렀지만 홍콩에서 시위 고등학생이 경찰의 근거리 사격으로 사경을 헤맨다는 소식이 국제 언론을 도배했다. 그로부터 또 며칠 뒤에는 의문사를 당한 시위 참가 여고생이 발견되면서 홍콩 투쟁이 다시 폭발할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10월 5일 홍콩 행정당국은 복면금지법을 발표하며 결코 양보할 뜻이 없음을 밝혔다. 시위를 조직하는 민간인권전선2 대표가 테러를 당하는 등 조직 폭력배의 백색테러도 횡행한다. 홍콩 투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하다. 이번 송환법 반대 투쟁은 2014년 10월 79일 동안 센트럴을 점령했던 우산운동이 끝난 지점에서 시작됐다.
이 글은 홍콩에서 투쟁이 등장한 배경을 설명하고 홍콩 투쟁과 이를 둘러싼 정치적 쟁점에 대한 평가를 하고 향후 전망을 제시하고자 한다.
역사와 배경
명나라 시절 홍콩은 향나무를 실어 나르는 조그마한 항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던 홍콩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은 영국을 포함한 제국주의 열강이 중국을 침략하면서였다.
아편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난징조약 제3조에는 “빅토리아 여왕과 그 후손들이 ‘영구히 홍콩 섬을 소유’하고, 그들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지배하도록 할 것”
그 뒤로 홍콩은 영국의 중국 진출을 위한 전초기지이자 동양 최대의 항구 구실을 했다. 1920년대 홍콩은 중국 내륙에 비해 경제적으로 발전했고, 따라서 노동계급이 많이 형성돼 있었다.
1922년 홍콩 선원 파업은 중국 대륙이 1925년 5·30운동과 1925~1927년의 중국혁명으로 나아가는 발판이 됐다. 그 당시 막 등장한 중국공산당 당원 소조징
1949년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공산당이 대륙에서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자 중국공산당에 반대하지만 장제스의 안하무인
1997년 중국 반환 때까지 홍콩인들은 대표를 선출할 권리가 없었다. 1973년 교사들의 저항이 있기까지 식민지 홍콩의 공식 언어는 영어뿐이었다. 홍콩 노동자의 경제적 조건도 좋지 않았다. 1967년 산포콩에 있는 조화
하지만 이런 반란 때문에 식민 당국은 유화책을 내놓을 필요를 느꼈다. 이런 개혁 조처들에는 빈민에 대한 공적 부조, 9년 무상교육, 정부 지원의 사회복지 등이 있었다. 또한 식민 당국은 1970년 당시 인구 400만 명 중 과반수에게 주택을 공급하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공공 주택제도를 확립했다
1967년 반란과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던 68운동의 영향으로 홍콩에서도 학생운동이 급진화했지만 이내 두 경향으로 분열했다. 하나는 마오주의 분파인데 이들은 중국을 사회주의로 여겼으며, 중국의 성공을 고무·찬양하는 데 초점을 맞췄고 홍콩 내 투쟁에 대해서는 관심을 덜 기울였다. 다른 한편에는 중국을 권위주의 체제로 보고 중국공산당에 비판적이었으며, 지역의 사회운동에 초점을 뒀다. 1997년 이후 전자는 중국공산당과 친화적인 조직들로 재구성됐고, 후자는 범민주 세력으로 재집결했다.
경제 발전
홍콩은 풍부한 저임금 노동력
1970년대부터 홍콩 경제는 제조업 중심에서 은행업, 금융, 그리고 부동산 등으로 다변화하기 시작했다. 1972년 닉슨의 중국 방문을 계기로 홍콩은 수출입 화물들의 중계항이자 글로벌 금융 중심지로 우뚝 솟았다. 이 덕분에 홍콩은 아시아 4인방 중 하나가 됐다. 그리고 1978년 덩샤오핑이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했고 이듬해에 선전시를 중국 최초로 경제자유구역으로 정했다. 이 때문에 중국 지배자들에게 선전시와 주강 삼각주에 인접한 홍콩이 중요해졌다. 이전까지 영국 식민지 홍콩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중국 당국은 1982년부터 시작된 반환 협상에서 홍콩에 대한 주권을 강조했다.
홍콩 경제가 아시아 최대 중계항이자 금융 중심지로 발전하면서 사회간접자본도 팽창했다. 경제 발전 덕분에 노동계급도 급속히 늘어났고, 언론·출판과
1982년부터 영국과 중국은 홍콩 반환 협상을 진행해, 1984년에 중영공동선언을 내놓았다. 핵심 내용은 세 가지다. 첫째, 1997년 7월 1일에 신계와 란타우 섬뿐 아니라 홍콩 섬과 카오룽 반도도 중국에 반환한다. 둘째, 홍콩은 일국양제
중국 당국은 홍콩을 반환받을 때까지 홍콩의 경제적 활력을 그대로 유지하는 데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공산당 정부는 홍콩 노동자들보다 주요 기업가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노력했다. 예를 들어 중국 당국은 홍콩의 헌법에 해당하는 기본법 초안을 작성할 때, 노동자들의 단체교섭권·파업권, 홍콩 행정특구 정부를 구성하는 보통선거 실시 같은 조항을 넣자는 민주세력들의 주장을 철저히 무시했다. 중국 정부는 홍콩 반환 뒤에도 친기업주 입장을 견지했다.
1989년 톈안먼 항쟁과 그 이후
1989년 6월 4일 중국 정부가 톈안먼 항쟁을 진압하자 당시 인구 400만 명의 홍콩에서 150만 명이 거리로 나와 중국 당국을 비판하고 톈안먼 항쟁을 지지했다
1997년 동아시아를 강타한 경제 위기는 홍콩을 비켜가지 않았다. 식민 당국은 반환 직전까지 신자유주의 조처들을 실시했고, 1970년대에 제공한 사회개혁 프로그램들을 축소하거나 폐지했다. 이 때문에 홍콩에서는 빈부격차를 나타내는 지니계수가 1990년대에 더 가파르게 치솟았다.
1997년에 홍콩을 반환받은 중국 정부와 홍콩 행정특구 당국은 몇 가지 점에서 식민 당국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첫째, 홍콩 행정특구 정부는 신자유주의 정책과 더불어 부동산 개발업자와 손잡고 지역 개발 사업
둘째, 중국 당국은 식민 당국으로부터 물려받은 비민주적인 선거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진정한 보통선거를 실시하지 않았다. 홍콩 선거제도는 입법회 의원수가 조금 늘고 행정장관을 선출하는 선거인단 수가 늘어난 것 외에는 영국의 식민지 치하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입법회는 크게 지역구 의원과 직능대표로 구성된다. 지역구에서 35명이 선출되고, 직능대표로 35명이 선출된다. 이때 직능대표 35명 중 30명은 직능별로 1명씩 선출되고, 5명은 직능별 유권자로 등록하지 않은 사람들이 직접 선출한다. 영국 식민정부와 마찬가지로 중국 정부도 직능별 대표가 전체의 절반을 구성하도록 해서 입법회 과반을 친중 인사가 차지하도록 하고 있다. 기업주들 내에서는 친중 입장인 건제파
2016년 9월 4일 입법회 선거를 예로 들면, 총유권자 380만 명이 지역구에서 35명을 선출했다. 그리고 직능별 유권자
행정장관 선거도 비민주적이다. 2007년 중국 전국인민대표자대회
이 때문에 홍콩 시위에서 입법회와 행정장관에 대한 진정한 보통선거 요구가 계속 제기되는 것이다.
중국 정부의 배신
홍콩을 반환받은 중국 정부는 야금야금 홍콩의 민주적 권리를 제약하기 시작했다. 이는 홍콩 반환 때의 약속, 즉 일국양제·항인치항·고도자치 약속을 어기는 것이다.
2003년은 중국 정부가 불간섭
2010년 중국 정부는 톈안먼 항쟁 이후 처음으로 민주파를 접촉해 개혁에 관해 협상을 시작했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2012년 중고등학교 교육과정에 애국심을 고취하는 국민교육을 도입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조슈아 웡 같은 학생들이 주도한 저항으로 좌절됐다. 그 후에도 중국 정부는 행정장관 선출 제도를 개악하려 했다. 중국 정부는 행정장관 선거에서 후보추천위원 절반 이상의 지지를 얻은 후보에게만 입후보 자격을 주려고 했다
2012년 교육 과정에 애국 교육을 포함시키는 시도에 대한 저항에서 학민사조
한동안 홍콩 젊은이들은 “평화적이고, 합리적이며, 비폭력적인” 수단을 통해 기성 체제의 규범 내에서 자신들의 관심사를 표명하곤 했지만, 2014년 우산운동 뒤에는 이런 태도가 바뀌었다. 2014년 우산운동은 홍콩의 젊은이들이 새로운 사회적·정치적 의식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됐다.
홍콩 본토주의 등장과 홍콩 정체성
후이와 라우
최근 본토주의자들의 영향력이 확대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2014년 우산운동의 여파로 본토주의자 8명이 입법회 선거에서 당선했다. 그중 2명은 선서 과정에서 당선이 취소됐지만 여전히 입법회에 6명이 있다. 하지만 2019년 송환법 반대 운동에서는 본토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쥐지 못했다.
본토주의가 등장한 배경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홍콩 반환 이후 중국 자본이 홍콩에 물밀듯 들어오면서 홍콩 시민들의 경제적 상황이 열악해진 것에 대한 반발이다. 1997년 홍콩 반환 당시 홍콩의 경제 규모는 중국 전체의 18퍼센트에 이르렀지만 2018년에는 중국 경제의 3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했다.
홍콩의 주택난과 일자리 그리고 물가 수준은 더 심각해졌다. 이는 홍콩에 들어온 중국 자본 때문이다. 현재 홍콩에서 기업 활동을 하는 자본의 60퍼센트 이상이 중국 자본이다. 중국 자본이 홍콩에서 부동산 투기를 하니 아파트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랐고, 중국 기업들이 보통화
둘째, 중국 정부가 1997년에 약속한 50년 동안의 고도자치를 조금씩 훼손하고 홍콩의 민주주의를 짓밟는 시도에 대한 반발이다. 이런 반발을 하는 세력들이 모두 본토주의자들은 아니다. 정치적으로 본토주의자들은 중국 대륙의 통제에 대한 반대에서 더 나아가 홍콩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다양한 사상을 말한다. 중국 정부의 개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범민주파 정당들의 무능이 본토주의자들의 영향력 확대를 초래했다. 그래서 본토주의자들은 친민주 세력과 친중국 세력 모두를 비판한다.
홍콩 젊은이들은 2013년 멜라닌 분유 파동 등을 보면서 홍콩이 중국화되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서 이들은 중국 대륙에서 온 이민자들이나 관광객들을 ‘메뚜기 떼’로 묘사하기도 했다. 본토주의자들은 홍콩으로 들어온 ‘침략자’들에 맞서 특정한 정치적 의제를 갖춘 정치적 정체성을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홍콩의 정체성, 식민지 근대성 같은 용어들이 본토주의 등장을 설명할 때 자주 사용된다.
홍콩 정체성은 중국 대륙과의 차별성을 나타내는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용어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홍콩이 중국에 반환될 때에도 이른바 ‘홍콩 정체성’ 같은 것은 존재하지는 않았다. 1999년 미국 전투기가 유고슬라비아 주재 중국 대사관을 폭격했을 때 중국 본토뿐 아니라 홍콩에서도 반미 시위가 벌어졌다. 2003년 중국의 유인우주선 선저우 5호에 대해 홍콩인들도 감격스러워했다. 특히 우주인 양리웨이가 홍콩을 방문했을 때 홍콩 사람들은 열렬히 환영했다.
일부 본토주의자는 중국인을 비하하는 인종차별적 용어
홍콩 투쟁의 과제
중국 당국의 개입이 늘어날수록 홍콩 행정특구의 영향력은 줄어들고 따라서 저항과 항의의 대상은 행정특구뿐 아니라 중국 정부로 향하게 됐다
사실 홍콩이라는 도시가 거대 국가인 중국에 맞서 승리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지금까지 홍콩인들이 중국 정부의 개입을 좌절시킨 사례들이 많이 있다. 따라서 홍콩 운동의 승리가 요원한 일은 아니다. 승리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과제들를 수행해야 한다.
첫째, 홍콩 투쟁이 다섯 가지 요구를 쟁취하고 더 나아가려면 노동계급을 동원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 대중의 경제적 요구를 제기해야 한다. 또 잠재적 노동자인 청년을 더 많이 끌어들이기 위해 주택과 일자리 문제를 함께 제기해야 한다.
둘째, 중국 대륙의 노동자 대중에게 호소하고 연대를 건설해야 한다. 중국 경제가 불황을 겪고 그 비용을 노동자들에게 떠넘기면서 중국의 산업 현장에서도 긴장감이 돌고 있다. 특히 광저우시와 선전시 등 홍콩에 인접한 지역들은 제조업 중심지이고 지난 몇 년 동안 노동자들의 파업과 항의 행동이 가장 많았던 곳 중의 하나다. 비록 쉽지는 않겠지만 본토 노동자 대중의 투쟁을 지지하고 이들의 연대를 이끌어내는 것이 핵심 과제 중 하나다. 이런 점 때문에 대륙의 중국인들에 대한 거리 두기는 홍콩 투쟁에 해악적이다.
셋째, 홍콩 투쟁을 중국과 미국의 대립이라는 프리즘으로 보는 진영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중국을 모종의 사회주의 사회로 보거나 그 잔재가 남아 있어 서방 국가들보다 진보적이라고 보는 일부 좌파들은 홍콩 투쟁을 지지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한 비판으로는 김영익
넷째, 모든 운동은 자생적으로 생겨나 자발적으로 확산되고 발전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의식적인 노력을 집중하는 혁명적 조직과 정치가 필요하다. 아무리 자생적이고 조야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운동에는 그 나름의 지도력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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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 Chi Kit. 2017. Discursive opportunity structures in post-handover Hong Kong localism: the China factor and beyond. Chinese Journal of Communication. vol.10, no.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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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w Wing Sang. 2009. Collaborative Colonial Power. Hong Kong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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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대는 송환법 철회 외에도 구속 시위자 석방, 시위대 폭도 규정 철회, 경찰 폭력에 대한 독립적인 조사위원회 구성, 행정장관과 입법회에 대한 진정한 보통선거를 요구한다. 이 글을 쓰는 현재 구속된 시위대는 2천 명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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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9월 중국공산당이 홍콩의 민주주의를 제한하는 것에 반대하는 범민주파 정당들
(민주당, 공민당, 노동당 등) 과 노동자, 학생, 여성 등의 단체들과 여러 시민단체들이 결성한 연대체 기구로, 현재 48개 단체가 참가하고 있다. 홈페이지는 http://www.civilhrfront.org/이다.↩ -
영국은 1997년에 신계 지역과 란터우 섬만 돌려주면 됐다. 홍콩 섬과 주룽 반도는 영원히 영국 영토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984년 덩샤오핑과 마가릿 대처가 홍콩 섬과 주룽 반도를 모두 중국에 돌려주기로 합의했다. 홍콩 섬과 카오룽 반도는 신계 지역에서 전력과 식수 등을 공급받기 때문에 자체로는 도시 기능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영국은 홍콩 섬과 카오룽 반도를 반환하는 대신 50년간의 일국양제 조처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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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이 제한적이나마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실행했다고는 하지만 이를 과장해서는 안 된다. 1997년까지 홍콩의 빈부격차는 심했고, 민주주의조차 매우 제한됐으며, 1990년대 초반까지 여성의 지위는 형편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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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인치항이란 홍콩
(香港) 사람이 홍콩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
2014년 10월 우산운동 실패 이후 홍콩전학련 내에서 분열이 나타났다. 홍콩 본토주의자들과 일부 대학 학생회 등은 6·4 톈안먼 민주화 기념 촛불집회 참가를 거부했는데, 중국의 민주화보다 홍콩의 민주화가 더 시급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체로 대학 학생회는 2015년 당시 렁춘잉
(2012-2017년 제3대 홍콩 행정장관) 과 중국 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
중국 전인대의 이 안은 2015년 6월 개회된 입법회에서 압도 다수의 반대로 부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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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기본법 23조는 중국 인민정부에 대한 반역, 분리 독립, 선동, 전복 또는 국가 기밀 절도 등을 금지하고 외국 정치조직의 홍콩 내 정치활동, 홍콩 내 정치단체와 해외 조직의 연계 등을 금지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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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최종심은 종심법원에서 이뤄지지만 정작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항은 전인대 산하의 상무위원회에 해석을 의뢰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6년 입법회 선거에 당선된 홍콩 본토주의자 두 명에 대한 의원 자격 박탈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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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토주의 단체로는 ‘홍콩독립운동’, ‘본토행동’, ‘홍콩본토역량’, ‘열혈공민‘, ’본토민주전선‘, ’청년신정‘ 등이 있다. 이 단체들의 주요한 주장을 보려면 Chan
(2017) 을 참고할 수 있다.↩ -
홍콩은 광둥어를 사용하는데, 이 언어는 중국의 공식 언어인 보통화와는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언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