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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평의회 논쟁에 부쳐

지난 56호와 58호에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학생 평의회를 둘러싼 논쟁이 실렸다. 이 쟁점이 세 호에 걸쳐 지면을 할애할 만큼 중요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 글들에 이견이 있어 몇 가지 지적을 하려 한다.

먼저, 56호 기사에서 한선희 씨는 사회과학부 평의회 준비모임이 학생들의 지지를 얻었다는 점을 애써 무시하거나 그 의미를 축소하려 했다. 그러나 학생들이 총회에서 그들의 개정 회칙에 지지를 보낸 것은 분명하다.

물론 평의회 준비모임은 여러 후퇴와 양보를 거듭한 끝에야 학생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학생회 선거를 폐지하지 않겠다고 했고, 개정 회칙의 기한이 1년임을 못박았다.

대체로 학생들은 여러 제약을 뒀으니 만큼 1년 동안 ‘입증의 기회를 주자’는 차원에서 지지를 보낸 듯하다.

한선희 씨는 “‘학생 평의회’ 구상의 모순과 비현실성 때문에 설득력을 크게 잃어 준비모임은 자신들의 정치를 고수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평의회모임이 여러 제약 속에서나마 ‘입증의 기회’를 얻었다는 점을 무시한 것이다.

지금 그들은 통과된 회칙을 통해 자신의 정치를 실현하려 하고 있다. 최근의 학생회장 사퇴는 이런 시도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그런데, 한선희 씨는 학생회장의 사퇴가 학생들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며 이렇게 하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평의회를 좌초시켜야 한다고 본 듯하다.

이런 관점은 종파적으로 비칠 위험이 있다. 기본적으로 평의회 측에 대해 비판적 지지 관점에서 출발하면서 그들의 모순을 입증하는 방식을 택할 필요가 있다.

한편, 한선희 씨에 대한 박조은미 씨의 비판은 평의회 준비모임과 전제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박조은미 씨는 총회에서 개정회칙이 통과된 배경이 “‘운동권 학생회’의 비민주적 운영”에 대한 학생들의 반감 때문인 것처럼 분석하고 있다.

사실상 이는 지난해 사회과학부 학생회를 운영했던 다함께 회원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실제로 평의회 준비모임은 “마르크스주의의 헤게모니 때문에 학생들의 능동적 참여가 가로막혔다”며 지난해 사회과학부 학생회를 비난해 왔다.

하지만 이것은 부당한 평가다. 지난해 사회과학부 학생회가 운영에서 몇몇 실수를 했다 해도, 전체적으로는 성공적인 운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작년 사회과학부 학생회를 운영했던 다함께 회원들은 반전행동에 다양한 생각을 가진 학생들의 폭넓은 참여를 이끌었다. 또, 작년 학생회는 워크숍과 같은 학생회 일상 행사에 역대 어느 학생회보다 많은 학생들을 참여시킨 바 있다.

오히려 평의회의 자율주의적 운영방식이 의도치 않게 민주주의의 후퇴를 가져올 수 있다.

예를 들어 개정 회칙에서 학생회 운영 단위로 규정된 ‘의결기구’는 직접 민주주의의 이름을 빌어 누구나 참여 가능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실제로 참여하는 학생들의 숫자는 많아야 15명 안팎에 불과하다.

개정 회칙에 따라 이제 이 ‘의결기구’의 대표가 학생회를 대표하게 됐다. 결국 백수십 명의 학생들에 의해 직접 선출된 학생회장이 고작 15명 안팎이 뽑는 의결기구 대표에 의해 대체되게 된 것이다.

또한, 평의회의 자율주의적 방식이 학생들의 참여와 활력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 이런 일은 사회과학부에서 이미 벌어졌다.

1학년들의 ‘2차 영어시험 거부 투쟁’이 벌어졌을 때 자율주의자들은 “각자 알아서 하라”는 ‘방침’이었다. 이는 시험을 거부하고자 했던 학생들의 활력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 “투쟁을 하지 말자는 주장”과 거의 구분되지 않아 보였다.

따라서 박조은미 씨가 자율주의자들이 “투쟁을 회피하지 않았다”고 한 것은 정확한 평가는 아니다.

‘영어시험공대위’ 회의에서 투쟁에 반대한 몇몇 개인 때문에 시험 당일까지 공대위가 아무 결정도 내리지 못했던 일도 있다. 이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자율주의의자들은 토론과 논쟁, 이에 바탕을 둔 행동 통일이 개인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바람에, 정작 더 큰 범위에서 수많은 학생들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학교 측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저항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지금의 사회과학부 평의회는 진정한 의미의 평의회와는 거리가 멀다.

러시아, 독일, 이란, 칠레 등에서 등장했던 평의회는 변혁적 시기에 등장한 노동자들의 권력기관이었다. 이 평의회들은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를 적절한 수준에서 다양하게 결합시켰다. 노동자 평의회는 생산을 통제하고 소비를 재조직했다. 반동에 맞서 노동자들의 무장을 조직했다. 즉, 혁명적 평의회는 기존 국가를 대체하는 대안 권력이었다.

이런 진정한 평의회와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학생평의회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자율주의자들의 염원과 달리 사회과학부 학생평의회는 자본주의 사회 전체로부터는커녕, 한 학교 권력으로부터도 ‘자율적인 공간’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그들의 이상은 실현되지 못할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런 모순과 약점들 때문에 현실의 학생 평의회는 앙상한 뼈대로 남을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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