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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②:
국유화와 사회주의

1970년대 후반 이래(한국의 경우 1990년대 후반 이래) 신자유주의 정책들(자유무역, ‘민영화’, 규제폐지, 공공지출 삭감 등)을 추진해 온 자들이 이제는 국가 개입에 관해 스스럼없이 얘기하고 있다.(물론 자유무역은 근래에 보호무역으로 상당 부분 전환되고 있다.)

통합당은 꼭 필요한 복지 예산 증액과 정부 지출도 “선심성 퍼주기”라며 “나라가 거덜”난다고 성토해 왔다. 그런 그들도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이 가속시킨 세계 경제 위기 때문에 이제 부양책 펴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전 자유한국당 대표 홍준표도 이렇게 말한다. “우파도 국민에게 도움 되면 좌파 정책을 펼쳐야 한다.”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와 하원의장 낸시 펠로시(민주당)도 대규모 (추가) 경기부양의 필요성에 이의가 없다.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는 무제한 양적완화(통화 공급 증대)를 실시한 데 이어, 중소 지방정부가 발행하는 채권도 대규모로 매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중국도 다양한 추가적 부양책을 고려하고 있다. 실세금리*의 하락을 유도하고자 인민은행은 올해 들어 이미 두 차례 지급준비율* 인하를 단행했다. 그리고 5년 만에 예금 기준금리 인하도 단행할 수 있다고 한다. 지방정부들은 특수목적채권 발행 규모를 확대해 사회기반시설 투자 확대를 유도하려 한다. 또한 중국은 자동차 소비의 촉진을 위한 신에너지차 보조금 지급을 연장한다고 한다.

일본 정부도 역대 최대 규모의 경제 패키지를 승인했다. 일본의 중앙은행인 일본은행도 최근 무제한 양적완화를 선언했다.

이런 일들은 데자뷔가 아니다. 12년 전인 2008년 금융 패닉(이하 공황)이 엄습했을 때 주요국 정부들이 채택한 핵심 정책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금융시장에 막대한 돈을 쏟아붓고 천문학적 규모의 경기부양책을 펴면, 경제정책 입안자들과 경제학계에서 비주류로 내몰렸던 케인스주의가 흔히 위신을 되찾는다. 케인스는 특히, 대량실업이 규제 없는 시장의 특징이므로 고용을 대폭 늘리려면 정부가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적자재정을 포함한)을 통해 총수요를 증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케인스주의에 따르면, 정부가 금리와 세율을 조정해 지출과 투자를 계속 촉진하면 완전 고용과 경제 안정을 이룩할 수 있다고 한다.

“이제 우리 모두 사회주의자다” 2009년 초에 발행된 <뉴스위크> 표지

경제 불황이 지속되면 사회민주주의 정부 경험이 오랜 서구에서는 때때로 사회주의가 공식정치의 담론으로 복귀한다. 2008년 9월 월스트리트 공황으로 미국에서조차 1970년대 이래 처음으로 사회주의가 정치적 화두가 됐다. 2009년 초 〈뉴스위크〉는 “이제 우리 모두 사회주의자다”라는 헤드라인을 표지에 실었다. 2008~2009년 공황 이래로 경제는 지금까지도 회복되지 못했다. 바로 이러한 맥락 속에서 미국민주사회당 DSA가 등장했다.

사회주의에 관한 이러한 논의 일반에 나타나는 특징 하나는, 사회주의 지지자든 반대자든 공통된(그리고 핵심이 빠진) 사회주의 개념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국가의 경제 개입을 사회주의라고 본다. 이런 인식틀로 보면 경제 체제는 국가 개입이나 국유화 수준에 따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연속선상 어딘가에 놓일 것이다. 중국이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전환했다”거나, “아직도 사회주의”라는 주장도 이런 인식틀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인식틀로 경제가 얼마나 ‘사회주의적’인지를 판단하다 보면 중요한 물음을 놓친다. 바로 그 국유화나 국가 개입이 누구의 이익에 부합하느냐는 것이다.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시기나 나라에 따라 어떤 때는 국가의 경제 개입을 선호하기도 했고, 어떤 때는(특히 1990년대와 2000년대)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매우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국가의 경제 개입을 선호할 때조차 주로 자본가 계급에 이익이 되도록 하는 한에서만 그렇게 했다.

2008~2009년 공황기 주요국 정부들의 구제금융은 국가 개입이 사회주의와 같은 게 아님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구제금융’은 도산이나 지급불능 위기로부터 기업이나 은행 등을 구제하기 위해 공적자금을 지원하는 것인 반면, 사회주의는 이윤보다 인간(사람들의 필요)을 앞세운다. 구제금융은 경제 위기에 대처하려면 세계 최대 금융기관조차 동원하기 어려운 막대한 재원을 동원할 수 있는 기관(국가)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줄 뿐이다. 당시에 국가 개입은 거대 은행, 보험사, 대기업 등을 살렸다. 하지만 노동계급 대중의 삶은 가압류와 퇴거, 물가상승, 실업 등으로 파탄나도록 내버려 뒀다. 결국 구제금융은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는 자본주의를 구제하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경제 위기에 놓인 자본가 계급과 국가 개입

1987년부터 2006년까지 거의 20년간 미국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을 지냈던 앨런 그린스펀은 2008년 10월, 당시 공황이 시장경제의 “결함”을 보여 준다고 시인했다. “세상이 돌아가는 법을 규정하는 핵심 작동 구조라고 제가 이해했던 모델에 결함이 있었습니다.”

같은 때 〈파이낸셜 타임스〉는 자신들이 평소에 찬양·고무하던 신자유주의자들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이 구제 정책이 민간 금융자본주의의 종말을 뜻하는가? 당연히 아니다. 이번 위기가 워낙 커서 이례적인 대응이 필요하긴 했지만, 예전부터 되풀이된 은행의 파산과 정부의 구제가 또 한 번 되풀이되는 것일 뿐이다.

한 십 년 동안은 여러 나라에서 은행 국유화가 현실화할 듯하다. … 이 지도자들은 국가에 의한 더 안정적인 지배를 위해 자본주의를 끝장내려는 것이 아니다. 국가를 이용해 시장의 가장 위험한 숙적, 즉 광범한 불황을 막으려 할 뿐이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

당시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 2세는 유럽중앙은행을 따라 금융기관들의 주식을 사들여 미국 금융체계에 자금을 공급하는 계획을 발표하면서 강경 신자유주의자들을 이렇게 달랬다. “이런 조치들은 자유 시장을 접수하려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려는 것이다.”

2009년 4월 2일 열린 G20(주요 20개국) 정상회담에서 당시 미국 대통령 오바마도 전 세계가 조직적으로 부양책을 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직후 한 언론인은 오바마의 연설을 이렇게 요약했다. “오바마는 시장을 더 엄격하게 규제해서 시장을 살리려 한다.”

대규모 국가 개입은 자본주의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운영하는 다른 방법이다. 물론 자본가 계급이 국유화 등 국가 개입을 확대해야 하는 현실에 좌절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다. 통상적인 조건 하에서 기업은 규제폐지와 자유 시장을 선호한다. 이윤을 얻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가령 1980년대 이래 정부의 규제가 없었던 덕분에 은행 등 금융회사들은 거대한 파생금융상품 시장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정부가 금융 회사를 구제하고 은행을 국유화하는 것은 노동계급이 낸 세금으로 월가 투기꾼들이 낸 손실을 메우는 것과 다름없다.

신자유주의 옹호자들은 선진국 경제들이 ‘자유’ 시장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국가의 경제 개입은 자본주의의 지속적 특징이었다. 신자유주의의 대명사 미국도 20세기에 철도·탄광·제철소를 이따금 국유화했으며 곧잘 은행 금리도 조정했다. 전시에 국가는 생산과 분배를 군사 목적에 이용하려고 경제에 개입했다. 또, 파산하는 기업이나 은행을 국유화하기도 했다. 그런 파산이 경제 전체에 미칠 파장을 고려해서 말이다. 1930년대 대불황기에 루스벨트 정부는 수많은 은행들의 지분을 매입했고, 경제 활성화를 위해 막대한 정부 지출을 단행하고, 일련의 금융 규제를 도입했다.

일상적 시기에도 국가는 자유 시장 외부에 막대한 규모의 투자를 한다. 고속도로를 건설·유지·보수하고, 군비를 지출하고, 연구·개발에 지출하는 것이 그런 사례다. 그러나 기업들은 그런 투자에서 직접·간접으로 득을 보므로 그런 투자를 사회주의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그런 투자를 두고 국가가 “건전한 기업 환경”을 조성하는 유익한 구실을 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지금까지 서술한 일들은 이미 150년 전에 엥겔스가 다음과 같이 설명한 동학의 일부다.

자본주의 사회의 공식 대표인 국가는 결국 생산 관리를 떠맡을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국유화의 필요성은 처음에 우편·전신·철도 같은 대규모 교통·통신 기관에서 생겨난다.

근대의 생산력을 계속 운영할 능력이 부르주아지에게 없다는 것이 경제 위기가 보여 주는 바라면, 생산과 분배를 위한 대규모 기구들이 주식회사, 트러스트, 국유재산으로 바뀌는 것은 부르주아지가 그런 목적에도 아무런 쓸모가 없음을 보여 준다. 자본가가 하는 사회적 구실이라고는 배당을 챙기고, 이자를 걷고, 온갖 자본가들이 서로의 자본을 빼앗아먹는 주식시장에서 도박을 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주식회사나 트러스트, 국유재산이 된다고 해서 생산력의 자본주의적 성격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주식회사나 트러스트의 경우 이는 명백하다. 근대 국가도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외적 조건 전반을 노동자나 개별 자본가가 침해하지 못하도록 지키기 위해 부르주아 사회가 의지하는 조직일 뿐이다. 근대 국가는 그 형태가 무엇이건 간에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적 기구이며, 자본가들의, 관념적 총자본의 국가이다. 국가는 더 많은 생산력을 장악할수록 더 명실상부한 총자본이 되며, 더 많은 국민을 착취하게 된다. 노동자는 여전히 임금노동자, 즉 프롤레타리아다. 자본주의적 관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러면서 전혀 다른 것으로 변질된다. 생산력의 국유화는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다. 그러나 국유화는 모순을 해결할 실마리, 형식적 수단을 그 안에 품고 있다.

국가자본주의의 등장

이런 폭넓은 국가 개입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국민국가와 자본주의 발전의 더 일반적인 추세를 반영한다. 이 시기에는 경쟁의 결과로 자본이 집적·집중(자본들의 수가 줄고 그 규모가 커짐)되면서 독점 기업이 출현했다. 이런 식으로 미국에서는 철도·석유 대기업이 등장하고, 자본재 생산에 필수적인 산업(철강 산업, 구리 등의 채굴 산업)이 성장했다. 한편 경제가 세계화하면서 시장, 원료, 저발전 지역의 값싼 노동력을 차지하려는 국민국가들 간 경쟁이 급속히 치열해졌다.

이러한 동학에 따라 각국 정부가 국내 자원을 동원해 국내외에서 자국 산업을 장려하고 성장시키고 해외로 진출시키려 하면서 “국가자본주의 트러스트”(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 니콜라이 부하린의 용어)가 발전했다. 이런 추세는 20세기 초반에 세계적으로 강화됐다. 그리고 1930년대 대불황 중에 각국이 자국 경제를 재활성화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면서 이런 추세의 압력은 더욱 커졌다.

그러나 이처럼 국가와 자본이 유착되는 정도는 나라마다 달랐다. 스탈린 치하 소련의 지령경제와 나치 독일의 경제 통제 그리고 일본 히로히토 천황제 국가의 경제 통제는 이러한 추세의 한 극단을 나타냈다. 루스벨트 시기의 뉴딜 정책도 같은 추세가 비교적 덜 극단적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지난 세기에 세계 각국 정부들은 시기나 지역별로 상이한 수준으로 경제에 개입해서 자본주의의 성장을 촉진하거나 그 밖의 정치적 난관에 대처했다. 유럽에서 노동자 투쟁이 크게 분출하자 많은 국가가 적극적으로 복지 지출을 늘려 노동자 운동을 달래고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더 근본적인 도전을 막으려 했다.

그리고 제1·2차세계대전이 남긴 폐허에서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막대한 자원을 동원하면서 많은 유럽 국가가 옛 식민지로부터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들로 투자를 돌렸다.

옛 소련에서는 스탈린이 지휘하는 당·국가 관료가 노동자 민주주의와 노동자 통제(생산 통제)를 철폐하는 데 성공한 후, 노동계급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를 토대로 생산력을 급속하게 증대시켰다. 그 덕분에 소련은 경제가 한참 뒤쳐졌었는데도 향후 수십 년 동안 세계적 패권을 겨룰 만큼 급성장했다.

이처럼 미국을 포함한 다양한 나라들이 경제를 성장시키거나 이런저런 시점에 불거진 경제 위기에 대처하려고 국가자본주의 방식을 이용했다. 이는 자본주의를 지키는 수단이었지, 자본주의를 폐지하는 수단이 아니었다.

혁명적 좌파와 국유화

자본가 계급은 대개의 경우에 국유화보다는 규제폐지와 민영화(사유화)를 선호하면서도 국가 개입 문제에 대해서는 결코 잘 모르겠다는 식의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혁명적 좌파도 결코 그런 문제들에 불분명한 태도를 취할 수 없다. 국유화 자체는 사회주의가 아니다. 하지만 전기·가스·수도·도로·병원·학교 등 모든 것을 사유화하려는 신자유주의 정책들은 노동계급의 이익을 공격한다. 민영화는 효율성이라는 미명 하에 기업들이 노동자를 해고하고, 임금을 삭감하고, 공공서비스를 감축하고, 납세자의 혈세를 이윤의 형태로 떼먹을 수 있게 한다. 예를 들어, 의료 서비스가 절실한 사람들이 의료 서비스를 누리지 못하게 해서 이윤을 얻는 민간 보험과 영리 의료 체계에 비하면 국영 의료 체계는 커다란 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민영화는 그러한 서비스에 대한 의사결정 과정을 공공영역에서 들어내 버린다. 공공영역에서는 그래도 그런 쟁점이 정치적 압력이나 정치적 요구에 노출되는데 말이다. 민영화는 그런 서비스에 대한 결정권을 ‘민간’(개인) 자본가에게 넘긴다. 이들은 유권자의 압력을 (제한적으로나마) 받는 정치인들과는 달리 아무런 공적 책임도 지지 않는다.

한편 역사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은 파산 위험에 처한 기업을 국유화해 노동자의 일자리를 보호하고 필수 서비스를 계속 제공하라고 요구해 왔다. 우리는 전기·가스·수도 같은 노동계급의 기본·필수 서비스를 사기업에게서 빼앗아 국유화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노동자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국유화하라 지난해 4월 10일 대우조선 매각반대 민주노총 영남권 노동자대회 ⓒ박충범

그러나 국유화를 요구할 때 좌파는 이런 기업(또는 산업)을 노동자 통제 하에 둘 것을 요구해야 한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국유화된 기업도 여전히 자본주의라는 더 큰 맥락 안에서 운영될 것이고, 따라서 자본이 아닌 노동계급의 필요에 부응하라는 압력을 아래로부터 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저발전국에서는 국유화에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그런 곳에서 국유화 요구는 해외 기업의 자산을 국고로 귀속시키고, 대규모 산업과 천연자원에서 나오는 이윤을 국가가 장악해 그 이윤을 해외로 유출되지 않게 하고 국내 산업 발전과 사회 복지에 쓰게 하기 위한 것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세계 각지의 좌파적 민족주의·민중주의 정부들은 제국주의로부터의 방어책으로서 국유화를 시행한 바 있다. 1956년 수에즈운하를 국유화한 이집트의 나세르 정권, 1972년 해외기업 소유의 구리 광산을 국유화한 칠레, 2006년 해외기업 소유의 석유·가스를 국유화한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정부 등이 그런 사례다.

시장의 온존이 장벽이다

그런데 사회주의가 그저 주요 경제부문의 국유화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면, 과연 더 나아가서 무엇일까? 물론 기간산업이 국유화돼야 불합리한 금융시장에 휘둘리지 않고 진정으로 합리적인 방법으로 투자를 결정할 수 있다. 자본주의에는 기업과 개인의 저축을 생산적 투자로 전환시킬 효과적 수단이 필요한데, 은행이 이익을 기대하고 미래에 돈을 걺으로써 그런 구실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은행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 은행은 호황기에는 지나치게 확장하고 불황기에는 지나치게 조심해서 경제 변동을 악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또한 기업들이 생산을 결정할 때 고려하는 유일한 사항은 시장에서 그 생산물이 판매되며 이윤을 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시장 경제는 근본적으로 세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 사람들이 필요로 하지만 구입할 형편이 안 되는 상품들은 생산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식료품과 주택이 더 많이 필요해도 돈이 없어서, 즉 구매력이 없어서 그들의 수요는 ‘유효하지’ 못하다. 따라서 기업들이 상품을 생산해 시장에 내놓아도 이윤이 나지 않는다.

둘째, 사회의 생산력을 전반적으로 합의된 사회적 목표를 위해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사용하려 해도 자본 투자가 시장 원리에 따라 할당되면 그 목표는 끊임없이 좌절된다. 예컨대 과학자들은 지구의 생명을 위협하는 기후변화나 그 밖의 생태계 교란을 해결할 지속 가능하고 다양한 전략을 제시해 왔다. 그러나 이를 구현하려는 노력은 자동차 산업이나 석유 등 에너지 산업들을 지배하는 대기업들의 경제적·정치적 영향력 때문에 장벽에 부딪힐 것이다. 이런 기업들의 전략적 사고와 장기적 계획은 오로지 한 가지 목표에 사로잡혀 있다. 그 목표란 바로 이윤을 내는 것이다. 모든 기업 경영자는 이 기본적인 사실을 항상 통감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회사의 재정이 파탄나는 것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 기업이 어떤 재화를 생산하는 것은 그것의 유용성 때문이 아니다. 식료품이든 다른 어떤 상품의 생산이든 시장에 팔아 이윤을 낸다는 다른 목적을 위한 부수적 수단에 불과하다.

셋째, 기업들 간의 경쟁 때문에 호황기에는 모든 기업이 서둘러서 더 많이 생산해, 확대되는 시장을 최대한 점유하고 좀 더 싼 가격으로 경쟁자를 앞지르려 한다. 그렇지 못하면 어떤 기업이든 다음 번 기술혁신과 투자에 들일 이윤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특정 유형의 생산에 자본이 투자되는 시점과, 그 투자로 생산된 생산물이 팔리는 시점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자동차 생산을 예로 들어 보자. 조립라인과 공급망 구축, 그리고 이를 가동할 생산시설을 짓는 데에는 수년이 걸린다. 그런데 자동차 수요 증가의 득을 보려고 모든 자동차 기업이 서둘러 투자를 한다면, 자동차가 실제로 생산될 즈음에는 자동차가 과잉 공급될 수 있다. 자동차 대기업에 거액을 대출해 준다는 은행의 결정은 처음에는 기민하고 현명한 것인 듯하지만, 생산된 차가 과잉 공급된 탓에 시장에서 모두 수지 맞게 팔리는 것이 불가능한 시점이 되면 갑자기 어리석었던 결정처럼 보일 것이다. 바로 그래서 위에서 우리는 “은행이 호황기에는 지나치게 확장하고 불황기에는 지나치게 조심해서 경제 변동을 악화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시장의 영향 때문에 그저 자본주의 하의 국유화를 쟁취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 이는 노동자들이 사용자를 다른 사용자로 갈아치우는 것일 뿐이다 — 전면적으로 생산을 사회주의화해, 노동대중의 민주적 통제 하에 둬야 한다.(‘사회화’는 매우 모호한 용어이므로 피해야 한다.)

노동자 국가

생산수단을 모두 사회주의화한 사회는 맹목적인 시장력이 아니라 민주적 계획에 따라 운영될 것이다. 선출되지도 않고 책임 지지도 않으며 사적 이익을 위해 투자하는 계급의 사람들에게 사회의 축적된 부가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생산수단(과 금융 수단)의 국유화에 사회주의적 성격이 있는지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간단한 물음으로 요약할 수 있다. 국가가 경제를 통제한다면 국가는 누가 통제하는가?

자본주의 국가의 경제 개입은 은행과 기업 소유자들의 결정권을 지키도록 고안된 것이다. 무엇보다, 국가가 자신의 소유권을 행사하는 데에 원칙으로 삼는 것은 노동계급과 빈곤층의 필요가 아니라 “건전한 기업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국가와 사기업들 간의 유착 관계를 볼 때 이는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기업인들은 수시로 정부 요직에 진출하고 주요 정부 인사들도 수시로 기업 요직에 진출한다. 막강한 경제적 영향력 때문에 자본가계급은 정치인이나 정부 관료가 기업에 고용돼 있지 않더라도 국가에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다.

노동계급은 파업이라는 무기를 사용해 생산을 멈추는 능력을 발휘해 경제적 권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노동계급이 사용자 계급 전체에 맞서면서 사회 전체에 자신의 집단적 이익을 관철시키려면 정치적 권력을 쥐어야 한다. 노동계급은 정치 권력을 장악해야만 비로소 이윤을 위한 생산과 시장을 점진적으로 폐지하고, 전면적으로 사회주의화되고 체계적인 계획으로 시장 관계를 대체하며 생산과 분배를 재편하기 시작할 수 있다.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노동계급이 일으킨 혁명의 첫째 단계는 노동계급이 지배계급으로 등극해 민주주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의 정치적 우위를 이용해 부르주아지에게서 자본을 점차 빼앗고, 모든 생산수단을 국가, 즉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의 수중에 집중시킬 것이고, 전반적 생산력을 되도록 빠르게 증대시킬 것이다.

물론 이를 실현하려면 처음에 소유권과 부르주아적 생산조건을 독재적으로 침범해야 한다. 따라서 그러한 조처들은 경제적으로 미흡하고 옹호하기 힘든 듯하지만, 운동 과정에서 그 자체를 넘어 옛 사회질서를 더 잠식해 들어가며, 생산 방식을 전반적으로 대변혁하는 불가피한 수단이 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새로운 노동자 국가가 시급한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키고 시간이 지나면 소비·교육·예술 등의 분야에서 더 야심 찬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경제 활동을 운용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전망했다.

발전 과정에서 계급 구분이 사라지고 모든 생산이 연합한 개인들의 손에 집중되는 때가 되면 공권력은 정치적 성격을 잃게 될 것이다. 본래적인 의미의 정치 권력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는 조직된 권력일 뿐이다.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지와 대적하면서 어쩔 수 없이 스스로를 계급으로 조직하고, 혁명이라는 수단으로 지배계급으로 등극해 기존 생산조건을 일소하고, 그럼으로써 계급 적대와 계급 일반의 존재조건을 일소한다면, 그 자신의 계급 지배를 폐지하는 셈이 될 것이다.

계급과 계급 적대로 낡은 부르주아 사회가 있던 자리에,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가 자유롭게 발전하는 조건인 연합이 들어설 것이다.

사회주의적 전략

마르크스가 말한 노동계급의 정치 권력 장악이란 무슨 뜻일까? 이는 의회나 국회에서 다수석을 확보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런 기구들은 기껏해야 형식적 민주주의에 불과하다. 역사를 보면, 선거에서 좋은 성적을 내려고 애쓰다가 혁명적 전망을 슬그머니 접거나, 의석을 획득한 뒤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바꾸기는커녕 자본주의에 적응한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허다하다. 엥겔스가 지적했듯이 국가는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적 기구”이므로, 노동계급이 사회를 변혁하려면 새로운 종류의 국가가 필요하다. 옛 국가가 해체된 폐허 위에 노동자들이 자신의 민주적 국가를 세워 생산과 분배를 장악하고, 이러한 경제 생활 영역들을 사회주의적 원리에 따라 재편해야 생산과 분배의 전면적인 사회주의화가 가능하다.

요컨대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사회주의는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권력을 추구하는 정치로 정의된다.

그 수단은 대중이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구축하는 저항 기구에 있다. 그런 기구들은 처음에 집단적 투쟁을 위한 조직으로 출발하지만 국가 권력을 대체하는 권력 기구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노동자들이 민주적으로 사회를 운영할 수 있음을 보여 준 러시아 소비에트

그럴싸하지만 순전한 공상에 불과한 말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 투쟁과 유기적으로 얽힌 이런 저항 기구가 거듭 나타난 풍부한 역사가 있다. 1871년 파리 코뮌, 1917년 러시아 혁명, 1918년 독일 혁명, 1936년 스페인 혁명, 1956년 헝가리 혁명, 1973년 칠레 등, 지난 세기에 노동계급 반란이 절정에 이를 때마다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의 착취와 천대에 맞서 대단한 투쟁을 조직했고, 노동자 평의회(그 명칭은 투쟁마다 달랐지만 본질적으로 동일한 기능을 수행했다)를 세워 투쟁을 조율했다. 노동자들은 또한 노동자 평의회를 통해 생산을 통제했다. 그렇게 해서 노동자의 생산물이 구 질서 수호자들에게 제공되지 않도록 했다. 그들에게 제공되면 그들은 노동자 평의회를 분쇄하고 노동자 평의회가 제시하는 새 사회의 가능성을 짓밟는 데에 노동생산물을 사용할 것이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생산물을 오히려 구 질서에 대항하는 자신들의 투쟁을 지속시키고 자신들을 먹여 살리는 데에 쓰이게 했다.

학교, 병원, 물류창고, 공장 차원의 노동자 평의회는 노동자들에게 일상적인 직장 운영에 대한 결정권을 갖게 하는 데에 필수적이다. 모든 노동자 평의회는 선출된 대표를 산업이나 경제 전반에 대한 의사 결정을 조율하는 기구로 보낼 것이다. 그 대표들은 기층 노동자들에 의해 직접 선출되고, 그들에게 책임을 지고, 동료 노동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고, 그들과 같은 임금을 받으며, 자신을 뽑아 준 노동자들의 의사를 대변하지 않을 경우 소환될 수 있다. 그래서 노동자 평의회를 통해 노동자는 사회의 모든 측면에 대한 진정한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다.

두말할 나위 없이 기존 정치·경제 권력자들은 아무런 저항 없이 기꺼이 부와 권력, 특권을 내놓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생산에 대한 노동자들의 민주적 통제를 달성하려면 결국에는 불가피하게 기존 국가와 대결해야만 하고, 승리해야 한다. 민주적 계획에 토대를 둔 사회를 건설하려면 은행과 여타 주요 기관들을 국유화해야 한다. 물론 그 국유화가 다수의 민주적 통제를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국가자본주의의 한 형태에 불과할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국가가 개혁을 시행하고 경제를 조금씩 부분적으로 인수하는 점진적인 과정일 수 없다. 사회주의는 결국 기존 시스템과의 철저한 단절이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노동자들은 능동적으로 투쟁에 나서야 하고, 그러면서 자신의 계급적 이익에 따라, 기업의 이윤 추구보다 인간의 필요를 앞세우는 원칙에 따라 사회의 면면을 운영하려 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위기는 매번 체제의 파산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대안을 둘러싼 논쟁을 촉발한다. 이번 위기도 마찬가지다. 이미 오래전에 빈곤을 일소하는 데에 쓰였어야 할 부가 상상도 못할 만큼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빈곤으로 내몰리고 있다. 엥겔스는 자본가 계급과 자본주의 자체가 제명을 다했다고 다음과 같이 지적하는데, 1877년에 쓰여진 것이지만 마치 요새 쓴 것처럼 생생하다.

부르주아지의 정치적·지적 파산은 그들 자신에게도 더는 비밀이 아니다. 그들의 경제적 파산은 매 십 년마다 되풀이된다. 매 위기 때마다 사회는 사용 불가능한 자신의 생산력과 생산물의 무게에 짓눌려 헐떡이고, 소비자가 부족해 생산자가 아무것도 소비하지 못하는 터무니없는 모순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봐야 한다. 생산수단의 확장력은 자본주의 생산 방식이 생산수단에 씌운 속박을 산산조각 낸다. 그런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생산력이 끊임없이 급속하게 발전해서 생산 자체가 실제로 끝없이 증가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그뿐이 아니다. 생산수단의 사회주의적 사용은 생산에 대한 지금의 인위적 제약을 없앨 뿐 아니라, 오늘날 생산에 필연적으로 수반되고 경제 위기 시기에 극에 달하는 생산수단·생산물의 적극적 파괴도 멈출 것이다. 또, 오늘날 지배계급과 그 정치적 대표자들이 만드는 무분별한 낭비를 끝냄으로써 방대한 생산수단과 생산물을 사회 전체가 누릴 수 있게 할 것이다. 사회주의화된 생산으로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물질적으로 넉넉하고 날마다 풍족해지는 삶을 보장할 뿐 아니라, 모든 구성원들에게 육체적·정신적 능력의 자유로운 발전과 발휘를 보장할 가능성 — 이 가능성이 이제 처음으로 생겼다. 그렇다. 그런 가능성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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