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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회담 반대투쟁 - “배고파서 못 살겠다. 매판자본 잡아먹자”

1964년 〈뉴욕타임스〉는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한국 학생들의 시위를 “일본의 가혹한 통치를 경험한 한국 사람들이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으로 일본에 반응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한일회담에 대한 반대는 매우 광범했다. 대학생, 고등학생, 보수 야당, 심지어는 5·16 쿠데타에 참여한 우익 장교들까지도 반대 운동을 조직했다. 그래서 이들이 표방하는 민족주의의 내용과 목적도 뒤죽박죽 혼란돼 있었다.

그러나 ‘한일 국교정상화’에 반대하는 한국인들의 행동 모두가 ‘유치한 민족주의’에서 비롯한 것은 아니다. 1964년 6월 3일의 시위로 절정에 오른 한일협정 반대 투쟁은 박정희 정권에 대한 분노와 제국주의적 압박에 대한 반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사람들의 ‘의심에 찬 기대’와 ‘혼란’은 1963년 대통령 선거까지는 지속됐던 듯하다. 수감된 많은 혁신계 인사들조차 자신을 가둔 박정희에게 표를 던지라고 주장했다.

보수 야당의 색깔 공세가 박정희의 사이비 ‘진보성’을 부각해 줬다. 예컨대 윤보선은 박정희를 공산주의자라고 공격했다. 이 때문에 예전에 조봉암의 표가 많이 나온 ‘좌익 투표 지역’에서 박정희의 지지율이 상승하기도 했다.

리영희는 당시 정황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윤보선이 박정희 … 를 극렬하게 친공분자로 위험시하자 지배계층, 부유층, 극우 반공 성분의 유권자들은 윤보선을 지지했어요. 반대로 … 좌익 세력과 변화를 원하던 하층 민중은 박정희 쪽으로 기울었어요.”

그러나 변화를 원한 많은 사람들의 수동적 기대심리는 점차 불만과 분노로 변하고 있었다. 박정희가 내건 ‘민족적 민주주의’에 입각한 수입대체 경제개발 계획은 참담한 실패로 끝나가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1961년 7월 정착성 예금의 금리 인상, 8월의 중소기업은행 설립, 1962년 2월 국민저축조합법 제정, 6월의 통화개혁 등을 통해 국내 자금을 동원하려 했다.

그러나 경제는 그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국내자금 조달은 실패했고 실업은 증가했다. 1962년∼64년에 이르는 기간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5.6퍼센트 감소했다.

원조 감소와 수출 부진으로 인한 만성적인 외화 부족, 곡가파동으로 인한 식량부족과 물가 상승 때문에 경제는 전반적인 침체 국면에 빠져들었다.

정치적으로도 쿠데타 세력은 급속하게 부패해 갔다. 예를 들어 1964년 1월 ‘3분(粉)폭리 사건’으로 삼성의 이병철과 같은 ‘매판 자본’과 박정희 정권 사이의 부패 고리가 드러났다.

‘군정 4년 연장’ 발언으로 그가 말하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점점 더 분명해졌다. 옛 정치인들을 처단하겠다던 박정희는 1963년 11월 총선에서 공화당 공천자 1백62명 중 51명을 자유당 출신 등의 ‘구정치인’에게 배당했다.

결과적으로 박정희의 ‘혁명’은 “매주 토요일에는 죽을 먹자”는 내핍정책과 ‘병역기피자 국토건설 사업에 투입’ 등 포퓰리즘적 제스처밖에는 보여 준 것이 없었다. 이것으로 민중의 불만을 달랠 수는 없었다.

박정희의 선택은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적극적으로 편입되는 것이었다. 한일 국교정상화,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거의 동시에 추진된 베트남전 파병은 이런 맥락에서 일어났다.

한일 국교정상화는 미국의 이해관계와도 일치했다. 미국은 한국전쟁 때부터 끊임없이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라고 요구해 왔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미국의 요구를 번번이 좌절시켰다. 이승만은 자신의 정권을 강화하는 데 국민들의 반일감정을 종종 이용해 왔던 것이다.

박정희 정부 들어 미국은 한일회담의 조속한 타결을 더욱 강도 높게 요구했다. 1950년대 말부터 ‘냉전 관리 비용’이 미국에게 부담으로 작용했다. 1960년대 들어서 미국의 헤게모니는 점점 더 위축됐다. 국제수지와 재정적자가 악화했다. 게다가 중국의 핵실험 성공과 베트남 전쟁 등 식민지 민족해방 투쟁은 미국의 헤게모니를 위협했다.

이에 대한 미국의 대응이 이른바 집단안보체제-지역통합전략이었다. 동북아시아에서 이를 담당할 수 있는 주축은 일본이었다.

일본에서는 이를 위해 자위대의 증강을 가로막아 온 안보조약의 개정이 필요했다. 미·일 신안보조약은 1960년 1월 19일에 조인됐다. 일본 민중은 새 안보조약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이 투쟁은 1960년 6월 15일 5백80만 명이 참가한 2차 총파업으로 절정에 올랐다. 급기야 아이젠하워의 일본 방문이 좌절되기도 했다.

4년 뒤 벌어진 한국의 반일운동은 이런 넓은 국제적 맥락의 일부로 볼 수 있다.

학생들의 시위는 1964년 3월 24일에 시작됐다. 학생들은 그 동안의 학생운동을 “전진과 창조 없는 슬픈 방황”이라고 평가하면서 박정희 정권과 날카롭게 대립했다.

이들은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시위를 하면서 “일본의 경제 침략”과 이에 부응하는 “매판자본”을 비난했다. 시위는 계속됐다. 26일에는 전국적으로 6만여 명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경찰과 충돌했다. 청와대 주변은 전기철조망으로 바리케이드가 처졌다.

학생들이 내건 최초의 요구는 단순한 민족주의적 요구였다. 정부의 굴욕적이고 저자세로 일관한 외교 태도를 문제 삼았다. “민족적 자존심을 3억 달러에 팔아넘길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 역시 정당한 감정이었다.

일본은 과거 식민지배를 사과하는 그 어떠한 표현도 협정 내용에 포함되는 것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적반하장 격으로 식민지배를 합리화했다.

식민지배 배상청구권 문제, 어업수역 조정 문제, 재일 교포 지위 문제, 문화재 반환 문제 등에서 박정희 정권은 어느 하나 비굴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시위가 확대되면서 학생들은 급진화했다. 이들은 “매판자본을 국가가 몰수해 민족자본화”하는 것으로 경제를 재건하라고 주장했다. “5월 혁명의 자랑은 4월 혁명의 모독이다” “5·16은 4·19의 연장일 수 없다”는 구호가 등장했다.

정부는 학생 시위에 강경하게 대응했고 5월 11일에는 내각을 개편했다. 새 내각은 〈아사히신문〉에서 보도하듯이 “한·일 회담의 타결을 목표로 돌진하는 내각”이었다.

정부의 강경 대응에 맞서 학생들은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5월 20일 학생들은 ‘(박정희식)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에서 박정희 정권을 이렇게 규정했다.

“5월 군부쿠데타는 4월의 민족민주이념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으며, 노골적인 대중탄압의 시작이었다. 경제적 민족자립을 외치는 정부는 노동자·농민의 소비대중에 실업, 기아임금, 살인적 고물가를 선물하면서, 매판적 반민족 자본의 비만을 후원했다.”

학생들은 “박정희 정권 타도” “배고파서 못 살겠다. 매판 자본 잡아먹자” “Yankee Keep Silent” 같은 구호를 외치며 경찰과 격렬하게 충돌했다.

6월 3일에는 10만여 명의 학생과 시민 들이 박정희 정권 퇴진을 외치며 시위가 절정에 올랐다. 곳곳에서 파출소가 공격당했고, 경찰 저지선은 청와대 코 앞까지 밀리기도 했다.

위기에 몰린 박정희는 급기야 계엄령을 선포했다. 미국은 박정희 정권을 구출하기 위해 한국군 2개 사단을 계엄군으로 동원하는 것을 허용했다. 그리고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몰아쳤고 대학 캠퍼스는 군인들에 의해 봉쇄됐다. 그 이후 정부의 강력한 탄압으로 시위는 다소 위축됐지만, 운동은 1965년 12월 조약이 비준될 때까지 지속했다.

한일협정 반대 운동에 연인원 3백5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참가했다. 당시 이 운동이 제기한 ‘민족자립경제’ 요구가 자본주의 세계체제 속에서 얼마나 실현가능한 것이었는가와는 무관하게, 이 운동은 박정희 정부를 최초로 위기에 몰아넣은 대중 운동이었다.

한편, 이 운동이 베트남 전쟁에 대한 문제의식을 발전시키지 않은 점은 당시 민족주의 운동의 한계를 보여 주고 있다. 결국 제국주의가 강요하는 모순의 극복은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으로 급진화한 국제적 차원의 노동자, 학생 저항과 만나는 길에 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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