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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여성, 정치를 하다’ 기사 유감:
올브라이트는 “품격” 있는 여성 정치인이 아니라 제국주의 학살자

〈경향신문〉에 ‘여성, 정치를 하다’라는 기사가 연재되고 있다. 필자는 연세대 젠더연구소 장영은 연구원이다. 가장 최근에 다룬 인물은 미국 클린턴 정부 때 첫 여성 국무장관을 지낸 매들린 올브라이트이다.

이 글은 계급을 무시하고 ‘여성’을 부각하는 정체성 정치가 어떻게 지배계급 여성 정치인의 악행을 가릴 수 있는지 잘 보여 준다.

장 연구원은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원로의 품격을 갖추었다”고 극찬했지만, 올브라이트는 미국 제국주의의 핵심 지휘관으로 세계의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간 학살자다.

올브라이트가 얼마나 미국 지배계급의 이익에 철두철미하게 헌신한 자인지를 보여 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는 1996년에 TV에 출연했을 때 UN의 이라크 경제 제재(올브라이트는 유엔 주재 미국 대사를 지냈다)로 이라크 어린이 50만 명이 죽은 것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 희생이 치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국무장관 재임(1997~2001) 동안 올브라이트는 미국 제국주의의 이익을 위해 세계 곳곳에 군사력 투입을 주도했다.

1998년에 미국 군대는 수단의 의약품 공장을 폭격해 수단 전체 의약품의 50퍼센트를 생산하는 공장을 파괴했다. 그 결과, 어린이 수천 명이 말라리아와 결핵, 다른 치료 가능한 질병으로 죽어갔다.

또, 미국은 1998년 말부터 1999년 초까지 이라크를 끊임없이 폭격하고 대 세르비아 전쟁을 벌였다. 1999년에는 나토의 이름으로 세르비아를 폭격했다.

장 연구원은 2000년 10월 올브라이트의 평양 방문을 다루며 그가 “미국과 북한의 관계를 유연하게 이끌어 갔”다고 칭송한다.

그러나 빌 클린턴 정부 시절 미국의 대북 정책은 강경한 대북 압박과 협상을 오갔다. 1994년 제네바 합의 이후 북한은 합의 이행에 협조했지만, 미국은 1998년에 다시 북한을 몰아붙였다. 별 근거도 없이 북한 금창리에 지하 핵시설이 존재한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북한에 사찰 압력을 가했다.

클린턴 정부는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을 문제 삼아 미사일방어체제MD 구축을 추진하는 데 이용했다.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패권을 재천명하려는 이런 노력은 장차 중국과 러시아와의 새로운 갈등을 예고하며 동아시아를 불안정하게 만들 것이었다.(관련 기사: 김영익, “사반세기의 북핵 문제: 제국주의 체제의 압력이 빚어낸 괴물”, 《마르크스21》 19호. 2017년 3~4월호)

미국 지배자들은 민주당 정부든 공화당 정부든 북·미 관계를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는 더 큰 맥락 속에 다뤄왔다. 올브라이트의 대북 정책이 트럼프 정부 때와 크게 다른 양 서술하는 것은 현실을 너무 모르는 것이다.

정체성 정치

〈경향신문〉의 ‘여성, 정치를 하다’ 연재 기사는 올브라이트 외에도 언론인 오리아나 팔라치, 미국 퍼스트레이디였던 미셸 오바마, 독일 총리인 앙겔라 메르켈도 우호적으로 다뤘다.

팔라치를 제외하면, 모두 지배계급 여성이다. 장 연구원은 메르켈의 “권력 의지가 세상을 안심시킨다”고 칭찬했는데, 제국주의나 계급에 대한 이해는 전혀 없이 권력자 여성을 숭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메르켈을 훌륭한 여성 정치인으로 치켜세우는 것은 진실을 호도하는 것이다. 그는 독일 제국주의 수호에 앞장서 왔고, 보수적인 가족 가치관을 설파하고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노동계급과 평범한 여성들을 옥죄어 온 우파 정치인이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앙겔라 메르켈, 미셸 오바마가 권좌에 있었거나 있는 시기에 자국 노동계급과 서민층 여성들의 삶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또, 미국과 독일의 제국주의적 정책으로 인해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며 고통받았다.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 박근혜가 노동계급과 서민층 여성의 조건을 얼마나 악랄하게 공격했는지 우리도 경험한 바 있다.

〈경향신문〉의 이 연재는 여성의 사회 상층부 진출을 성평등의 핵심 수단으로 삼는 주류 페미니즘의 전략(정체성 정치에 바탕을 둔)과 상통한다.

그러나 여성은 하나가 아니고, 계급에 따라 차별의 정도가 현격하게 다를 뿐 아니라 계급적 이해관계 때문에 차별을 없애는 데서도 태도가 달라진다.

엘리트 여성은 상층부에 남성과 동등하게 진출하는 데 주로 관심있을 뿐, 노동계급 여성이 겪는 착취에는 무관심하다. 또, 평범한 여성들의 부담을 덜어줄 조처들(양육의 사회화, 차별 임금 폐지와 여성의 노동조건 개선, 복지 확충과 각종 차별 해소를 위한 지원 등)에도 별 관심이 없다. 상층부에 오른 여성들은 이윤 수호를 위해 여성 대중의 조건을 공격하기도 한다.

계급을 가로지르는 정체성 정치(“여성 정치”)로는 성평등을 이룰 수 없는 까닭이다.

엘리트 여성의 ‘권력 의지’가 세상을 좋게 바꾸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과 평범한 여성들이 지배계급의 남성과 여성이 자행하는 착취와 억압에 맞서 스스로 투쟁할 때 세상은 바뀌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