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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인 씨에 대한 반론 - 대중 의식의 불균등 발전을 이해할 필요성

《정세와 노동》 8월호에서 김해인 씨는 자신의 글을 반박한 〈다함께〉 58호의 내 글, ‘고대생은 친자본적인가?’에 대해 반론을 폈다.

그는 그 글에서 “이건희 시위를 두고 일어난 일련의 상황들은 양극화와 급진화를 가장 잘 보여 준 것이라는 식의 말들은 현실을 호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내가 시위를 지지한 30∼40퍼센트의 사람들만 보고 시위를 지지하지 않은 더 많은 다수의 존재는 애써 외면한 것처럼 암시했다.

나아가 파업 등 다른 여러 쟁점에서 다수는 이를 지지하지 않는다며, 이건희 시위 관련 통계만으로 “포섭된 대중”의 존재를 반박할 수는 없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지배 계급의 사상이 지배적 사상”이라는 마르크스의 통찰을 상술한다. 물론 나도 “지배 계급의 사상이 지배적인 사상”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또한 바로 그 때문에 노동계급이 ― 심지어 가장 혁명적인 시기에조차 ― 자동으로 사회 근본 변혁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레닌이 강조했듯이 혁명적 조직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이 점을 인정하는 것과 대중이 친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돼 있다고 단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의 행동을 통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만약 김해인 씨처럼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노동자도 심지어 비정규직 투쟁에 헌신하는 노동자도 모두 “포섭된 대중”일 뿐이라고 취급한다면, 과연 노동계급의 아래로부터의 자기 해방은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노동자들이 항상 지배자들의 사상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이고 그에 입각해서만 움직일 뿐이라면 아무리 훌륭한 혁명정당이 있어도 사회 변혁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것의 거울이미지로서, 혁명적 조직만 있으면 노동자들이 언제나 혁명적 대안에 귀 기울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들은 지배자들에게 끌려다니느냐 혁명가들에게 끌려다니느냐의 차이일 뿐, 노동계급을 근본에서 수동적 존재로 바라보기는 매한가지다.

김해인 씨는 바로 이런 관점, 즉 당 밖에서는 결코 진정한 계급의식이 획득될 수 없다는, 그렇기 때문에 당이 노동계급의 자생성보다 언제나 우위라는 개량주의와 스탈린주의의 오랜 공식에 기초해 있는 듯하다.

그러나 혁명가는 노동계급을 가르치기도 하지만 계급에게서 배우기도 한다. 마르크스는 파리 꼬뮌의 경험에서 배웠고, 레닌은 1905년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소비에트(평의회)로부터 배웠다.

“의식적”이고 “자각적”인 형태로 사회주의 사상을 온전히 수용하고 혁명을 지지하지 않으면 모두 “포섭된 대중”이라는 초좌파적 이해 방식은 현실에 존재하는 운동을 냉소하거나 기피하는 종파주의로 발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해악적이다.

민주노동당에 대한 김해인 씨의 태도는 이 점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노동계급을 “포섭된 대중”으로만 보기 때문에 마치 노동계급이 민주노동당을 지지하기 시작하면 그들이 그 한계에 완전히 갇혀 더 왼쪽으로 갈 수 없을 것이라고 걱정하는 듯하다.

그러나 개량주의에 대한 노동계급의 지지는 변화에 대한 염원과 그것이 체제 안에서 가능하다는 환상의 혼합물이다.

노동계급이 자신의 저항을 ‘부르주아 의회 공간’이나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성장’으로는 전혀 표현할 수 없(거나 그런 것이 큰 의미가 없)다는 김해인 씨의 주장과 달리, 오늘날 한국에서 가장 선진적인 노동자들의 다수가 부르주아 정당이 아니라, 노동계급에 기반을 두고 있고 서구의 사민당과 달리 신자유주의 반대를 분명히 표명하는 정당에 투표한다는 것은 그들의 의식 발전과 저항의 표현이다. 그런 점에서 이는 매우 환영할 만한 일이다.

따라서 ‘다함께’가 민주노동당의 개량주의적 한계를 비판하면서도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것은 전혀 모순된 것도 혼란된 것도 아니다.

김해인 씨가 말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 를 뒤엎어버릴, 새로운 사상으로의 의식적인 전환”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난한 투쟁의 축적과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노동계급의 자생성에서 배우고 그것을 고무하며, 또한 노동계급의 모순된 의식에서 비롯하는 개량주의와 협력하는 동시에 경합하며 실천에서 입증받는 급진 좌파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비관적 엘리트주의가 아니라 노동계급과 대중이 저항하는 측면에 주목하고 그 가능성을 더 왼쪽으로 견인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나는 이건희 시위에서, 그리고 다른 투쟁들에서 그 투쟁들에 대한 사람들의 반대보다는 지지에 더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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