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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강제병합 110주년:
한반도를 둘러싼 제국주의 경쟁의 결과물

한반도를 둘러싼 제국주의 간 경쟁(특히 미국과 중국)이 심화하면서 이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가 중요해지고 있다. 이런 때에 과거 한국이 제국주의 경쟁에 희생된 시기를 돌아보는 것은 의미 있을 것이다.

제국주의

1910년 8월 29일 아침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한일병합조약)이 정식으로 공포됐다. 병합조약의 공포를 앞두고 서울 거리에는 완전 무장한 헌병과 경찰이 쫙 깔렸고 기마대의 순찰이 강화됐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하게 일본의 조선 장악이 마무리된 것 같았다.

하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지배는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것은 아니다. 이것은 19세기 중반 이후 수십 년에 걸친 제국주의 경쟁의 결과물이었다.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전부터 왕정들 사이에 영토 경쟁은 있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이 경쟁은 질적으로 달라졌다. 철도와 증기선의 발명으로 기동성이 대폭 확대되고 현대적 무기들이 대량 생산되면서 19세기 중반 이후 ‘전쟁의 산업화’라고 불린 일이 벌어졌다. 국가의 군사력은 이제 산업화 수준과 직결됐다.

영국보다 후발자본주의인 독일과 러시아, 미국 등은 현대적 무장력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산업자본주의의 성장을 촉진했다. 산업자본주의의 성장은 열강 사이의 경쟁을 더욱 격화시켰다. 자본 축적 경쟁(경제적 경쟁)과 국가들 사이의 경쟁(지정학적 경쟁)이 결합되면서 해외 시장과 원료를 확보하기 위한 치열한 다툼과 전쟁이 계속됐다.

1876년 아프리카에서 유럽 열강이 지배하는 땅은 10퍼센트 이하였지만 1900년이 되자 90퍼센트 이상에 이르렀다. 아시아 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반(半)식민지 또는 식민지로 전락했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을 통해 봉건 질서를 타파하고 국가가 주도하는 자본주의 발전을 촉진하면서 제국주의 경쟁에 뛰어들었다. 일본이 1900년을 전후로 아시아에서 제국주의 열강으로 부상한 과정은 단지 조선과 일본 사이에 일어난 문제로 국한해서 조명할 수 없다. 이것은 세계적 차원에서 진행된 제국주의 경쟁의 일부로 볼 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조선·대만·베트남 등지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아시아에서 자신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청은 19세기 중반을 전후로 영국,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연이어 패하면서 세력이 급격히 약화됐다. 청은 주변 나라에 대한 영향력을 잃었을 뿐 아니라 영토를 유럽 열강에게 조각조각 내주면서 반(半)식민지로 전락했다.

약화하는 청의 빈 공간을 채운 것은 유럽 열강과 함께 아시아에서 새롭게 부상한 산업 자본주의 국가 일본이었다. 일본은 청의 영향력 하에 있던 류큐(현 오키나와 제도)와 대만을 점령하고 1894년 청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러시아가 만주를 통해 남쪽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을 때, 이를 견제하려는 영국과 동맹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했다. 이로써 일본은 조선과 만주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세력 균형

조선이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세력 균형을 잘 활용했다면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들이 있다. 그러나 이는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제국주의 경쟁의 현실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아니다.

1880년 전후부터 계속해서 조선의 지배자들은 열강 사이의 세력 균형을 이용해 제국주의로부터 독립을 얻고 자본주의적 발전도 이룩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이뤄질 수 없었다.

조선은 1876년 일본, 1882년 미국에 이어 영국·프랑스와도 통상조약을 체결하는 등 서구 열강과 일본을 끌어들여 청과의 사대 관계를 개편해 보려 했다. 당시 개화론자 가운데 하나였던 유길준은 이것을 양절兩截체제라고 표현했는데 초기 세력균형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조선의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청은 조선이 자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더 확실히 묶어 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은 군대를 투입해 제압하고 조선과 협정을 체결해 청이 조선의 종주국임을 명문화했다. 또, 군대를 서울에 상주시켜 조선 군대를 통제하고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깊이 관여했다.

1884년 청이 베트남을 놓고 프랑스와 전쟁에 돌입하면서 조선에 파견했던 군대의 절반을 철수시키자 조선에서는 일본의 힘을 빌려 청으로부터 독립을 얻으려는 개화파의 시도(갑신정변)가 있었다. 하지만 이는 일본의 미온적 태도와 함께 실패로 돌아갔다. 일본은 조선에서 청의 우위를 인정하는 한편,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청과의 협조 노선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885년 3월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경계하면서 거문도를 점령하기도 했다.

조선은 이제 러시아와 밀약을 추진하고 미국의 자금과 기술을 들여와 열강 간 세력 균형이 이뤄지기를 바랐다. 고종은 이를 통해 청에게서 독립하고자 했지만 1894년 농민들의 저항(갑오농민전쟁)에 직면하자 이내 청의 품에 안겨버렸다. 농민 봉기를 제압할 수 없었던 조선 지배자들은 청에게 농민군을 진압할 군대를 요청했다.

청의 군대와 함께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과 전쟁을 벌여 승리하면서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청에게서 빼앗았다. 여기에 더해 일본이 랴오둥 반도를 차지하자, 청에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던 열강(러시아, 독일, 프랑스)이 반발했다. 이들의 개입으로 인해 일본은 랴오둥 반도를 포기해야 했지만 조선에 대해서는 영향력을 유지했다.

러시아와 일본은 당장에는 서로를 완전히 제압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협정을 맺어 일본은 만주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인정해 주고 러시아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우위를 인정하기로 했다. 이로써 일시적인 세력 균형이 형성됐다.

그러나 이런 세력 균형은 오래지 않아 깨졌다. 1900년 청의 의화단운동을 진압하려 개입한 러시아가 사실상 만주를 점령했다. 일본은 이에 반발해 러시아에 대한 전쟁 준비로 나아갔다. 러시아와 프랑스를 견제하고자 했던 영국은 일본과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만주에 대한 이권을 양보할 의사가 전혀 없었고 조선에 대해서도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했다. 러시아는 1902년 4월 압록강 인근 용암포를 무력으로 점령했다. 이때 한반도를 38도선에서 양분하는 방안도 나왔지만 그것은 1904년 1월 하순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에 돌입하는 순간까지 펼쳐진 지루한 외교적 공방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대한제국은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일시적 세력 균형이 형성됐을 때 ‘자주독립국’임을 선언하면서 탄생할 수 있었다. 대한제국은 열강의 세력 균형을 이용해 독립을 지켜보려 했지만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표류했고 이에 따라 지배집단도 친러파·친일파 등으로 나뉘어 분열해 갈팡질팡하다가 러일전쟁을 맞게 된다.

이때 전시중립화나 중립국 선언 안도 나왔지만 러시아와 일본 제국주의 간 경쟁이 심화되고 전쟁으로 나아가는 상황에서는 공상적인 안에 지나지 않았다.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중립선언을 무시하고 조선을 전쟁을 위한 병참기지와 인적·물적 동원을 위한 기반으로 삼았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뤼순항과 남만주철도, 사할린 남부를 획득하면서 아시아 지역의 주요한 제국주의로 부상했다. 미국과 일본은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 각서를 만들어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서로 인정했다. 1905년 8월 영국은 2차 영일동맹을 통해 영국의 인도 지배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상호 승인하게 된다. 이로써 일본의 조선 지배에 대한 걸림돌은 모두 제거됐고 한일병합은 시간 문제가 됐다.

요컨대 한일병합으로 가는 과정은, 경쟁하는 제국주의 가운데 어느 한편에 서거나 그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것이 제국주의를 극복할 대안이 결코 될 수 없음을 보여 줬다.

제국주의에 대항한 진정한 대안

한편, 제국주의에 제대로 대응하기 위해 사회 또는 정치집단들이 분열하지 않고 힘을 합하는 것이 필요했다는 주장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았다.

조선의 지배자들은 한쪽 제국주의를 끌어들여 다른 쪽 제국주의를 견제하고자 했다. 그러면서 선진 기술과 자본을 받아들여 근대화(자본주의화)를 이루고자 했다. 하지만 기술과 자본은 군대와 함께 들어왔다. 제국주의는 새로운 억압자이자 착취자로 들어와 조선 민중을 쥐어짜기 시작했다.

조선의 지배자들은 제국주의와 타협해 경제적 이득을 얻고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를 원했고 대중의 저항을 분쇄하는 데 제국주의와 기꺼이 함께했다. 1894년 농민들의 혁명적 봉기(갑오농민전쟁)를 제국주의 군대와 함께 잔인하게 진압한 것은 대표 사례이다. 당시 봉기한 농민들은 낡은 신분 질서와 수탈에 항거했을 뿐만 아니라(노비와 천인 차별 철폐, 여성의 재혼 허용, 잡세 폐지, 빚 탕감, 횡포한 부호와 탐관오리 엄징, 토지경작권 균분 등 요구) 이미 시작되고 있던 제국주의의 해악에도 반대했다.(외세 배격 등)

여러 제국주의 열강의 한반도 진출과 함께 새롭게 부를 축적하거나 제국주의의 힘과 기술을 이용해 구 지배 질서를 개혁하고 근대화를 이뤄야 한다는 집단들이 등장했지만 이들도 제국주의에 의지해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 했고 아래로부터의 대중 반란에 대해서는 적대적이었다.

제국주의를 진정으로 극복할 수 있는 힘은 아래로부터 나왔다. 1894년 농민 봉기와 1919년 3·1운동은 제국주의에 맞설 힘이 소수의 개혁가들이나 무장 집단 또는 선한 얼굴을 한 제국주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대중 행동에 있다는 점을 보여 줬다. 1910년 강제병합 전부터 산발적이긴 했지만 자발적인 무장 저항이 벌어졌다. 그 중 일부는 훗날 만주 등의 독립군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대중 행동은 제국주의만이 아니라 제국주의와 경제·정치적으로 결합된 국내 지배체제에 대한 혁명적 변화와 결합될 필요가 있었다.

물론 당시 이것이 현실화되지는 못했지만 그 필요성은 지금도 여전하다. 과거와 양상은 변했을지라도 제국주의 간 경쟁은 계속되고 있다. 제국주의 열강 사이에서 어느 한편에 서거나 그들 사이의 세력 균형을 이용해 평화를 얻겠다는 발상은 오늘날에도 공상적이다. 미·중 사이의 경쟁적 쟁투가 점증하고, 한반도의 긴장이 해소되지 않고 있는 현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말이다. 미·중 제국주의 모두에 반대해야 하며, 이는 한·미 동맹에 중심을 두면서도 중국과도 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 대안을 추구하는 것과 결합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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