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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건강과 가난, 계급, 자본주의

심리적 스트레스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심리적 스트레스는 신체적 약화, 질병과 연동되기 쉽다. 즉 서로의 꼬리를 무는 원인과 결과가 될 수 있다. 게다가 “코로나 블루”라 부를 만큼, 경제 위기와 감염병 위기 그리고 기후 위기까지 트리플 위기 속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불안과 우울 등 정신적 고통이 가중되고 있다.

소득감소, 실업, 감당하기 어려운 빚, 주거문제, 고립감과 무력감, 국가의 부당한 대우와 그에 따른 사회적 박탈감까지 자살과 자살시도, 자살을 생각하는 비율의 증가로 이어지고 있다. 보통 1건의 자살에는 10건의 자살시도, 100건에서 1000건에 이르는 우울증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가난하거나 저임금 노동자일수록 신체적 건강과 정신적 건강까지 나쁠 가능성이 높고 그 가정의 아이들도 그렇다.

많은 통계들이 경제 위기와 실업이 자살과 자살시도, 자살을 생각하는 비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십여 년 넘게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의 자살률도 공황 발발 직후인 1998년과 2009년에 더욱 증가했다. 언론에서 흔히 “일가족동반자살”이라 부른 ‘자녀살해 후 부모자살’ 역시 그렇다. 경제 위기에 감염병 위기까지 겹친 올 여름에는 자살예방기관들에 상담과 상담시도가 폭주했다. 특히 수도권 2030 여성들의 자살 관련 데이터가 급속히 악화되고, 서울시의 20대 자살률은 무려 2배로 늘었다.

노동계급과 그 가족은 인구의 대다수다. 인구의 대다수에서 불안, 우울, 자살 등 정신 건강의 위기가 확산된다면, 자본가 계급에게도 어느 정도 문제가 된다. 현재와 미래의 피착취자들이 덜 생산적으로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려는 딱 거기까지다. 노동자의 행복과 기업의 이윤이 선택사항이 될 때, 자본가들은 주저 없이 이윤을 택한다.

대신, 우리에게 개인의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자신을 더 긍정하고 더 사랑하라는 것이다. 위로하는 서적과 강연이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실체 없는 자신감과 자존감은 진통효과조차 일시적이고 국소적이다. 때로 우리에게 사회를 언급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의 잘못”이고 “우리 사회의 반성이 필요”하다고. 그러나 개인들을 합쳐 그저 사회가 아니다. 개인들은 사회구조에 따라 배치돼 있다. 대다수 개인은 사회를 운영하는 위치에 있지 않다.

1950~1960년대 서구 선진국에서 장기호황기 노동계급의 사정이 더 낫긴 했다. 그러나 이윤율 저하 위기가 시작되면서 지배계급은 착취율 향상에 총력을 기울였고 이번 감염병 위기를 통해 그동안 선진국 노동계급의 사정도 얼마나 심하게 나빠졌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결국 자본주의에서는 인구 대다수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이 자본의 축적 과정에 연루돼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일반으로 건강을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가 잘 충족돼야 한다.

첫째, 인간으로서 필수적인 물질적 요소들이 충족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발달이 저해되거나 아프거나 죽는다. 음식, 물, 빛, 공기 등 기본적인 생명활동의 물질적인 전제조건을 말한다.

젊은 엥겔스가 1844년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으로 통렬히 고발했듯이 산업자본주의 노동계급과 가족은 이대로 절멸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물질적 전제조건 자체를 부정당했다. 노동계급은 음식, 물, 빛, 공기 등이 최악인 환경에서 심각한 건강상태로 추락했다. 다행히 자본주의 발달과 대중투쟁의 영향으로 영양상태, 공중위생, 식품위생 등이 향상된 덕분에 영아사망율이 떨어지고 기대수명이 회복될 수 있었다.

치매나 조현병처럼 더 특별한 상태도 이런 기본적 필요와 관련 있다. 예를 들어, 교통량이 많은 분주한 도로 가까이 사는 사람들은 치매 위험이 더 높고, 조현병의 발생도 산업사회와 농촌사회가 크게 다르며 회복력 또한 그렇다.

둘째, 인간에게는 다른 생물들과 공유하는 필요뿐 아니라 인간 특유의 사회적, 정서적, 심리적, 성적 욕구도 있다. 무엇보다 인간은 성취감을 느끼면서 만족하고 기뻐하는 존재다. 그런 의미에서 계급사회 내내 대다수 남성과 여성은 인간성의 정수를 온전히 누리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 진정한 자기결정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가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짧게 잡아도 인류 역사의 90퍼센트 이상은 계급과 차별이 없는 사회였다.

미국 노동운동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호 하나를 빌려 두 가지를 요약하면, 우리에게 “빵과 장미” 둘 다 필요하다.

개인의 정신 건강은 사회구조에 크게 영향 받는다. 이것이 부르주아 심리학이나 범죄학과 다른 유물론의 관점이다. 그러므로 대안도 사회적이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회, 즉 대다수의 민주적 통제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주의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는 불행도 고통도 없을 거란 말이 아니다. 그때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깊은 슬픔에 잠길 것이고, 목표를 성취할 수 없어 좌절하거나 낙담할 것이다. 이런 경험들은 계급사회 이전이나 이후나 삶의 일부일 것이다. 그러나 착취와 차별이 없는 사회라면, 심각한 정신적 고통으로 발전되는 특별히 고통스러운 경험들이 급격히 줄어들 것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 우리가 겪는 정신적 고통과 불행의 주된 형태는 초역사적이지 않다. 대다수의 필요가 아니라 자본의 축적 욕구로 돌아가는 자본주의 체제의 특별한 산물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주는 압박은 모든 사람과 모든 인간관계에 미친다. 그러나 다 똑같은 방식으로 영향 받거나 고통 받지 않는다. 개인의 세부적 경험이 다르고, 때로는 유전적 차이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 계급과 인종, 성차별과 같은 더 넓은 구조적 요인들이 있다.

즉 개인적인 경험과 집단적인 경험 사이의 상호작용이 전제되는 것이다. 그런데 개인과 집단의 상호작용은 진공 속에 있지 않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종, 젠더, 성적지향, 그리고 계급관계 안에서 살고 있다. 그러니 불안 장애는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많고, 백인공동체보다 흑인과 소수민족공동체에 정신적 고통이 더 많으며, 자살과 자살시도 비율은 성소수자들이 더 높다. 가난할수록 더 불안하거나 더 우울하거나 더 건강이 나쁘기 쉽다. 많은 역학조사들에 따르면 사회가 경제적으로 더 불평등할수록 다른 불행과 고통도 함께 증가했다. 더 평등할수록 그 반대임은 물론이다.

우울증도 가난과 강한 연관이 있다. 아동의 ADHD 등 “이상 행동”들도 그렇다. 예컨대, 단순한 소득증대 효과 하나만으로도 미국 원주민 아동들의 정신과적 진단이 달라졌다. 또 다른 예는 항우울제의 복약순응도가 저소득층에서 더 낮다는 점이다. 애초에 병인이 호르몬 조절의 실패가 아니라 가난한 현실이어서 그럴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소외의 상호작용들을 소득이라는 요인 하나로 환원할 수 없다. 그러니, 앞의 예시가 잘못됐을까? 그게 아니라, 불평등과 가난과 소외의 근원인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교체하면 변화가 훨씬 더 입체적이고 본질적일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함께 행동에 나설 때, 특히 노동자들이 함께 행동에 나설 때 사회의 진정한 본질은 인간 노동의 산물이라는 점이 분명해질 수 있다.”(크리스 하먼, 《그들의 윤리, 우리의 윤리》(책갈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