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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무슬림 여성은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됐는가

[편집자 주] 탈라트 아흐메드는 인도 출신 영국 거주 사회주의자로, 지난 여름 ‘다함께’가 주최한 반자본주의 포럼 ‘전쟁과 변혁의 시대’에서 이슬람과 문화·예술과 인종에 대해 연설했다. 그녀가 자신의 각성 과정에 대해 술회한다. 언제나 그렇듯 [ ] 안의 말은 편집자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덧붙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특정 사건을 계기로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것은 전쟁일 수도 있고, 파업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 개인적 억압의 경험일 수도 있다.

내 경우에 그것은 단 하나의 사건은 아니었고, 일련의 사건과 경험을 통해 나는 사회주의를 받아들였고 마침내 혁명가가 됐다.
나는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에 정치화했다. 내가 16살 때인 1979년 마거릿 대처가 영국 총리가 됐다.

대처는 선거 기간에 “이질적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영국을 휩쓸고 있다”는 악명높은 연설을 했다. 그들은 바로 아시아인과 흑인 들이었다. 이것은 대처가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사용한 보수당의 인종차별 카드였다.

언론은 인도와 동아프리카 출신 이민자들의 이야기로 뒤덮였고, 나찌인 국민전선(NF)이 행동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1979년 4월 반(反)나찌 행진 중이던 사회주의자 블레어 피치(Blair Peach)가 사우스홀에서 살해되는 끔찍한 광경을 TV에서 보았다.

선거에서 승리한 대처는 사회복지를 축소하고 노동조합을 공격했다.

그러나 전임 노동당 정부도 1978∼79년 ‘불만의 겨울’에 파업중인 노동자들을 공격했다는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좌파를 자처했던 나는 노동당의 행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베트남에서 보트 피플이 탈출하는 모습이 기억난다. 그들은 이른바 공산주의 사회에서 억압을 받았기 때문에 탈출하고 있었다.

베트남은 1979년 크리스마스 때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한 소련과 마찬가지로 이른바 공산주의 사회였다. 삶이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1979년은 이란 혁명이 일어난 해이기도 했다. 제3세계 국가가 미국과 소련 두 초강대국에게 한방 먹인 것이라고 여긴 나는 이란 혁명에 매료됐다.

이슬람과 무슬림 공동체를 악마화하는 것은 최근 내 삶의 슬픈 진실이 됐지만, 그런 악마화는 이미 이란 혁명에 대한 반응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은 이슬람을 믿었지만 결코 전통적이지는 않았다. 나는 어디서나 반(反)무슬림 언사를 들을 수 있는 매우 적대적인 환경에서 내 정체성의 상징으로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 나는 꾸란[이슬람 경전]을 읽고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는 수업을 들었다.

그러나 이런 생활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선생님과 나는 코란이나 여성에 대해, 그리고 내가 볼 수 없는 뭔가에 순종하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견해가 달랐기 때문이다. 결국 6개월 뒤 나는 수업을 그만두고 말았다.

이 모든 경험 때문에 나는 사회주의자가 됐지만, 노동당에 대해서는 도무지 신뢰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1981년과 1982년 대학 재학 시절 나는 이런저런 단일쟁점 운동단체에 가입했다.

나는 핵무기 감축 운동에 참가하는 평화운동가였다. 당시는 레이건이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고, 크루즈 미사일이 영국으로 이동 배치되던 때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는 여전히 아파르트헤이트(인종 격리 체제)가 남아 있었다. 나는 매주 목요일 바클레이은행 정문 앞 팻말시위를 하고 아파르트헤이트[정권이 지배하는 남아공]에 투자하는 로운트레스 제품 불매운동을 벌였던 기억이 난다.

나는 제3세계의 빈곤과 외채에 반대하는 ‘제3세계 우선’(Third World First)이라는 단체의 회원이었다. 그 단체를 통해 내 장학금의 10퍼센트를 자선단체인 ‘빈곤과의 전쟁’(War on Want)에 기부했다.

여성 운동 활동가들의 집회와 니카라과 연대 캠페인에도 참가했다.

2년 동안 나는 모든 시위, 모든 집회에 참가했다. 나는 평화주의자였고, 그래서 1982년 말 크루즈 미사일이 배치된 그린햄 커먼(Greenham Common)에서 개최된 여성평화캠프를 환영했다.

1983년 2월 나는 거기서 처음으로 항의 행동에 참가했고, 그 집회 이후 나는 우울해졌다. 모든 일에 내향적이고 수동적으로 됐다. 반남성적인 라이프스타일(삶 방식)을 한동안 추구했다.

그것은 내가 지지했던 전투적 행동주의가 아니었다.

1983년 6월 노동당은 또다시 보수당에 패배했고, 좌파의 분위기는 처참하리만큼 암담한 듯했다. 나는 다른 학생들과 함께 노동당 선거운동을 했었고, 선거 이후 우리는 완전히 좌절했다.

그 해 가을 인쇄업계에서 격렬한 노동쟁의가 시작됐다. 맨체스터 인근 워링턴에서 언론 거물 에디 샤가 인쇄 노동자들을 공격했다.

화요일 밤마다 대규모 피케팅[파업 농성장 출입 통제]이 벌어졌고, 우리 리즈대학교 학생들은 버스를 타고 가서 그 노동자들과 함께 피케팅을 했다.

그 곳에서는 수천 명이 피케팅을 하고 있었지만, 경찰도 수천 명이나 대기하고 있었다. 전에 나는 그런 광경을 본 적이 없었다.
경찰이 군사 작전을 감행했다. 경찰이 나를 피케팅 대열에서 끌어내 땅바닥에 내동댕이친 기억이 난다. 그나마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많은 학생들이 경찰의 곤봉에 두들겨맞았다. 한 맹인 학생은 경찰에 의해 안경과 지팡이가 부서졌고, 어떤 학생은 머리에서 피를 흘리기도 했다. 그렇게 무서운 광경은 처음이었다.

그 날 밤 나는 평화주의적 관점을 버리게 됐다.

나는 〈사회주의 노동자〉 학생모임에 참가하고 〈사회주의 노동자〉를 읽기 시작했다. 이제 사회주의로 가는 의회적 길은 없다고 믿게 됐다. 하지만 노동자 권력과 혁명[이라는 사상]은 여전히 미심쩍었다.

나는 러시아 혁명, 중국, 스탈린, 노동계급, 억압 등의 주제를 둘러싸고 여러 혁명가들과 몇 시간씩 토론하기를 수없이 했다.

나는 점점 더 확신을 갖게 됐는데, 그러던 중 1984년 초에 광부 파업[당시로선 역사상 최장기(1년 3개월 간) 지속된 격렬한 대파업]이 발생했다. 그 파업을 계기로 내 신념은 확고해졌고, 그 뒤 나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번역 조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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