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구 교수 파문 - 아무도 주장 때문에 박해받아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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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는 천정배의 강정구 교수 불구속 수사 지휘에 대해 “이성을 잃고 있다”는 표현을 썼다. 그러나 진정 이성을 잃은 자들은 박근혜 같은 우익들이다.
과거에 검찰을 쥐락펴락했고 지금도 돈과 권력으로 개입하는 것을 제쳐두더라도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법 원리조차 부정하고 있다.
헌법에는 국민이 신체의 자유를 누릴 권리와 형 확정 전의 피고인은 무죄라는 원칙이 명시돼 있다. 도주나 증거 인멸의 우려가 없는 한 구속을 제한하고 있다.
강 교수의 어디를 봐도 도주나 증거 인멸의 우려는 없다.
“공안사범은 ‘확신범’이어서 형사범에 비해 상대적으로 ‘도주 및 증거 인멸의 우려’가 없는데, 구속하지 말라고 한다면 앞으로 공안사범 수사를 하지 말란 것과 같다”(〈조선일보〉 10월 15일치)는 주장은 해괴하다못해 괴기스런 논리지만, 어쨌든 〈조선일보〉조차 그 사실은 인정하고 있다.
이에 반해 이건희는 죄상이 명백한데도 미국으로 도주해서 지금도 불철주야 증거를 인멸하고 있다. 그런데도 검찰은 “인권을 침해한다”며 출국금지조차 하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가 강 교수를 구속하지 않았지만, 노무현 정부는 강 교수 기소에는 동의하고 있고,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한다고 명확히 얘기하고 있지도 않다.
강 교수는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한 것도 아니고 자신의 역사적 해석을 얘기했을 뿐이다. 그런데 지배자들은 자기들의 견해와 다르다는 이유로 그를 박해하고 있다.
그들은 미군이 사흘 만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 피해가 크지 않았을 것이라고 강 교수가 가정한 것이 학자의 객관성을 잃었다고 비난한다. 이 사건으로 우익의 스타로 떠오른 중앙대 교수 제성호는 한 시사프로에서 객관성을 잃었으니 학문이 아니라 정치 선전이라며 유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군이 없었으면 “지금의 우리”가 없었을 것이라고 객관성 없이 말해 온 자들은 바로 우익 아니었던가?
정치적 견해를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만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다.
물론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한국전쟁이 북한 지도부의 통일전쟁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렇다고 우익들의 주장처럼 북한의 침략전쟁이라고 보지도 않는다. 한국전쟁은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 패권을 둘러싸고 한반도에 국한해서 벌인 제한적인 제국주의 간 전쟁이었다.
마르크스주의자는 또 “통일 이후 사회·경제 체제는 자본주의적인 시장경제가 지배적인 형태일 수밖에 없다”는 강 교수의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강 교수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민주주의를 바라는 사람들은 강 교수의 언론 자유를 무조건 옹호하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해야 한다.
지금도 한총련 수배자들은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나지 못하고 있고, 구속자들은 자유를 박탈당한 채 이건희 집 욕실보다 훨씬 좁은 감옥에 갇혀 있다. 국가보안법은 피고인은 물론 피고인 가족에게까지 피눈물을 흘리게 한다.
어느 날 지옥을 지배하는 도깨비가 지옥에 사는 사람들에게 “너희들에게 오늘부터 표현의 자유를 주겠어. 단, 지옥이 나쁘다는 말만은 금지야” 하고 말했다 치자. 여러분이 지옥에 사는 사람이면 이제 표현의 자유를 누리게 됐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얼마 전 네 살배기 어린아이가 먹을 것이 없어 장롱에서 굶어죽은 것을 봤다. 그리고 고속도로에서만 달릴 수 있다는 취미용 페라리가 25억 원에 팔렸다는 보도도 봤다.
자본주의 사회의 불평등과 불의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품고 해결 방법을 고민한다. 자본주의의 개혁을 생각할 수도 있고, 사회주의 혁명을 생각할 수도 있다. 북한이 대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다함께’처럼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건 우리는 토론을 통해 좀더 나은 방향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은 그런 대안을 추구하는 목소리들을 질식시키는 억압 장치이다.
지금도 죄 없이 고통받는 양심수들을 생각한다면, 수배 생활하는 자식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 먹이지 못해 밥 먹을 때마다 흐를 수배자 부모의 눈물을 생각한다면, 숨막혀 신음하는 우리의 꿈을 생각한다면, 강 교수 마녀사냥은 지금 당장 중단돼야 하고 국가보안법은 역사의 쓰레기통에 처박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