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과 탈성장 논쟁:
루이스 프로옉트의 반박에 대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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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성장과 탈성장: 생태사회주의자는 무엇을 주장해야 하는가?’에 대해 루이스 프로옉트가 쓴 비판에 존 몰리뉴가 답한 것이다.
루이스 프로옉트가 탈성장론에 관한 내 글을 비판해 줘서 매우 반갑다. 사회주의자들·생태사회주의자들이 이 주제로 토론하고 논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중요한 측면에서 미지의 영역을 헤쳐나가고 있고 어느 누구도 모든 답을 갖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는 점을 서로 이해하며 동지적으로 토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배워야 하며 이를 위해 서로에게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루이스는 “탈성장론의 오류를 폭로하려는 몰리뉴와 뢰비의 시도는 기껏해야 초라했다”고 평했다. 물론, 루이스는 얼마든지 자신의 평가를 내놓을 자격이 있지만, 나는 뢰비나 내가 탈성장의 ‘오류를 폭로’하려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현재 상황에서 생태사회주의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탈성장론을 어느 수준까지 받아들여야 할지 검토하려 했다. 실제로 나는 “예전처럼 똑같이 성장 일반(심지어 사회주의적 성장이라 할지라도)을 계속 요구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강조했다.
루이스는 내가 “칼리스와 제이슨 히켈이 계산한 수치”와 탈성장에 관한 학술 문헌 전반을 다루지 않았다고 꾸짖는다. 루이스의 지적은 일리가 있으며 인정하는 바다. 그러나 항변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나 미처 읽거나 인용하지 못한 문헌이 있을 수 있다는 점, 이 글은 탈성장 조류나 운동을 망라하는 학문적·학술적 연구가 아니며 그러려고 쓴 글도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내 글은 탈성장에 대한 몇 가지 고찰을 제시하려는 것일 뿐이다. 이집트에 대한 칼리스 주장을 인용한 것은 탈성장론의 ‘오류를 폭로’하거나 탈성장론 전반을 흠집내기 위한 ‘허수아비 때리기’용이 아니었다. 다만, ‘성장’에 대한 흔한 오해, 즉 성장을 주로 물질적인 ‘물건’의 양적 증가로 이해하는 경향을 보여 주는 예를 든 것일 뿐이다.
루이스는 내 글 대부분이 “자본주의 생산의 무정부성에 관해 지난 53년 동안 내[루이스]가 듣거나 주장해 온 바를 재탕한 것에 불과하다”고 불평하며, 뢰비와 나에게 “마르크스주의의 진리를 잠시 접어두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그는 사실 내가 겨냥한 청중이 아니었다. 나는 루이스의 학식에는 살짝 못미치는, 환경 운동 내 다른 동지들을 향해 글을 썼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의 진리가 여전히 진리라면, 루이스가 좀 지루해 하더라도 여러 번 반복해야 한다고 본다. 특히, 마르크스주의 사상이 사회 전반에서든 환경 운동 내에서든 결코 지배적이지 않다면 말이다. 사회주의에서는 생산력이 발전하면 더 많은 양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양을 더 적은 시간 동안 생산하게 될 수 있으며 마르크스는 이 점을 매우 중시했다는 내 말을 인용하며 루이스는 비꼬듯이 이렇게 묻는다. “누가 그 주장을 반박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고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나와 루이스 사이의 진정한 차이가 잘 드러난다. 루이스는 이 논쟁을 그저 베테랑 마르크스주의 전문가들끼리의 실랑이로 치부하는 반면, 나는 내 글과 생각이 더 광범한 청중에게 영향을 미치길 바란다.
내가 답해야 할 다른 논점이 몇 가지 더 있다. 탈성장은 “몰리뉴 같은 자들이 꺼려하는 인구 문제를 다루는 것”이며 나의 글은 “인구 문제에 관심을 거의 보이지 않는다”고 루이스는 주장한다. “몰리뉴 같은 자들”이 과연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내가 인구 문제를 다루기를 거부한다기보다는 ‘과잉인구 문제’가 있다는 주장을 거부한다는 점이다. 사실 나는 최근에 이 문제를 《아일랜드 마르크시스트 리뷰》 26호에 실린 “기후변화와 과잉잉구론”에서 꽤 자세히 다룬 바 있다. 또, 나 같은 이들에 해당하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같은 생태사회주의자인 이언 앵거스는 이 주제에 관한 아주 훌륭한 책, 《과잉인구가 문제일까?》(2011, 국내 미번역)를 사이먼 버틀러와 공저했다. 루이스가 내 글을 읽었으라 기대하지는 않지만 이언의 책은 알고 있을 것이다.
루이스는 나와 뢰비에게 몇 가지 물음을 제기했다.
세계 생태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어떻게 평균적인 가구에 필요한 땔감을 계속 제공하면서도 산림 파괴로 인한 새로운 팬데믹 위험을 초래하지 않을 수 있는가?
또, 생태사회주의 체제는 지속 가능한 농업의 핵심 요소인 지하수를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 오갈랄라 대수층[미국에 있는 세계 최대 대수층으로 세계 곡물 생산의 6분의 1이 여기에 의존하고 있지만, 현재 고갈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을 인민의 재산으로 만든다고 해서, 장구한 세월에 걸쳐 형성되는 이런 자원의 생태학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까?
나는 이 모든 물음에 대한 답을 알고 있지도 않고 알 수도 없다. 그러나 “세계 생태사회주의 체제”에서 사람들이 어떤 주택에 거주하고 어떤 식단을 섭취할지는 열려 있는 문제다. 게다가 이런 사회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나무를 심는 것이 사람들의 역량을 넘어서는 일일 성싶지 않다. 지속 가능한 농업을 위한 지하수 생성에 대해서 말하자면, 나의 요지는 “오갈랄라 대수층을 인민의 재산으로” 만들면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된다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내가 이해한 형태의 세계 생태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창의적이고 협력적 에너지를 이끌어내서, 지금은 해결 불가능해 보이는 온갖 문제에 대한 온갖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진정한 문제는 그런 사회에 어떻게 도달하느냐이다.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더 쉬운 방안을 뢰비나 내가 알았다면 세계 생태사회주의를 제안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 생태사회주의라는 해결책은 주체의 문제를 제기한다. 어떤 사회 세력이 이를 실현할 능력과 의지를 갖고 있는가? 여기서 나는 내가 마르크스주의의 진리를 되풀이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즉, 그들은 바로 국제 노동계급이다. 그리고 오늘날 이들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규모와 잠재적이 크다. 바로 이 대목에서 나는 루이스가 내놓은 논박의 가장 실망스러운 특징 하나를 짚고자 한다. 탈성장 구호와 담론은 수년 혹은 수십 년 동안 긴축과 삭감에 시달리고 대량 실업에 직면한 노동계급 대중 다수에게 공감을 사지 못할 가능성이 아주 커 보인다. 물론 사회주의자들은 반동적 사상에 휩쓸린 다수 노동자들에게 배척당하는 것을 무릅쓰고서라도 원칙을 지켜야 할 때도 있다.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고 인종차별에 맞서 싸우는 것이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사례다. 그렇다고 우리가 스스로를 불필요하게 고립시켜서는 안 된다. 최소한 내 글은 이런 문제를 다룬다. 루이스가 쓴 반박 글의 약점은 단 한 순간도 이 문제를 고려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덧불이는 말. 사소한 사실관계 오류 하나를 바로잡고자 한다. 루이스는 나를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전 당원으로 묘사했다. 실제로 2010년에 나는 아일랜드로 이주해서 영국 SWP 활동에 적극 참여하지는 않고 있다(그러나 공식 당원 신분은 유지하고 있다). 나는 이곳 아일랜드에서 아일랜드 사회주의노동자당, 지금은 ‘사회주의노동자네트워크’(SWN)로 불리는 조직에 합류했다. SWN은 ‘이윤보다 인간을’의 가맹 단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