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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과 탈성장:
생태사회주의자는 무엇을 주장해야 하는가?

기후 위기가 가속하면서 이를 멈추기 위한 운동도 성장하고 있다. 운동 내에서는 기후 위기를 멈추기 위한 효과적인 대안이 무엇인지에 대한 토론도 계속되고 있다. 특히 최근 좌파들 사이에서 생태주의의 ‘탈성장’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존 몰리뉴가 이런 주장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진정한 대안이 무엇인지 제시한다. 존 몰리뉴는 아일랜드 사회주의노동자네트워크의 지도적 회원이다. 한국에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레닌과 21세기》 등의 저서가 번역돼 있다. 이 글은 2020년 12월 26일 GLOBAL ECOSOCIALIST NETWORK에 실렸다.

노동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이 시작된 이래 대부분의 시기 동안 이 운동에서 지배적인 입장은 경제 성장을 선호하는 것이었다.

노동조합과 노동당,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경제 성장 정책을 채택하라고 정부에 촉구하는 결의안을 수도 없이 통과시켰다. ‘성장을 이루자!’는 슬로건은 되풀이해서 등장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논리는 언제나 간단했다. 경제 성장은 (‘우리 조합원들’이나 ‘우리 대중’이 필요로 하고 원하는) 일자리를 유지하고 창출하는 데 필수적이며, 일반 대중의 생활 수준을 개선(이 또한 대중이 원하는 것이다)하기 가장 좋은 조건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어떠한 도전도 고려하지 않는 주류 즉, 압도 다수의 개혁주의적인 사회민주주의 정치인들과 노동조합 관료들에게 일자리와 생활 수준 개선은 그들이 바랄 수 있는 최대치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노동 운동 ‘주류’는 케인스주의에 이끌린다. 경제 위기, 불황, 재정 삭감, 긴축에 직면하여 이들은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경제학—‘적자 재정’을 기반으로 공공 지출을 확대해 경제를 부양하기—에 기대어 이 모든 명백한 병폐를 자본주의 탓으로 돌리지 않을 수 있다. 이들은 통화주의, 신자유주의, 자유 시장을 신봉하는 ‘이데올로기적’ 신념이나 어리석음에서 비롯한 정부의 잘못된 정책에서 문제가 비롯했다고 여긴다. 이들에게는 경제 성장을 회복시킬 대안적 (사회민주주의적) 정부를 선출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다.

이런 접근법에 대한 좌파적 비판은 [영국 노동당 내 좌파인] 토니 벤, 제러미 코빈이나 [서구의] 여러 공산당 등 좌파 개혁주의 진영에서 주로 나왔다. 이들은 주류의 해법이 충분히 급진적이지 못하다고 비판하면서 흔히 ‘대안 경제 전략’으로 불리는 대안을 제시한다. 이 대안 또한 자본주의라는 틀 내에서의 경제 성장을 주장하며, 다만 훨씬 더 높은 수준의 공공 소유(국유화)와 국가 계획으로 이를 성취하려 한다.

더 왼쪽에는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이 있다. 이들은 자본주의라는 토대 위에서 좌파 정부를 운영한다는 접근 방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대체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은 과잉생산 경향, 이윤율 저하 경향 등 자본주의에 내재한 모순으로 경제 위기가 필연적으로 반복돼 지속적인 경제 성장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하려면 노동자 혁명으로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민주적으로 계획되는 사회주의 경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 성장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는 것이다. 다만, 경제 성장이 사적 이윤과는 완전히 다른 목적 즉, 사회적 필요를 위해, 전쟁이 아니라 복지를 위해, 자본 축적과 사치품 소비가 아니라 더 많은 학교, 병원, 주택, 문화를 위해 이뤄져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여러 좌파들의 사상에서 경제 성장에 대한 옹호는, 한때 ‘제3세계’라고 불린 곳(지금은 ‘개발도상국’으로 불리는 곳)에서 극심한 가난의 고통과 소위 ‘종속’을 끝내기 위해 경제를 ‘발전’시켜야 할 필요성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로 여기면서 개발도상국에서 활동하거나 이런 나라들에 연대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경제 발전을 단지 사회주의의 전제 조건으로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주의 자체와 동일시 하기도 했다. 이런 시각은 1930~1950년대에 소련이 성취한 급격한 산업 성장이 소련의 사회주의 성격, 또는 최소한 비非자본주의적 성격을 입증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스탈린주의자들과 많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이런 시각을 공유한다. 트로츠키 자신도 “소련의 경제적 성공”을 “사회주의적 방법의 실행 가능성을 보여 주는 … 실험적 증거”로 묘사하며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사회주의는 자본론의 책장이 아니라 지구 표면 6분의 1을 차지하는 산업 무대에서, 변증법의 언어가 아니라 철강·시멘트·전기의 언어로 승리자가 될 자격을 입증했다.”(레온 트로츠키, 《배반당한 혁명》)

마지막으로, 경제 성장을 선호하는 사회주의 운동의 태도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증법을 제시한 마르크스주의 역사유물론의 핵심 주장에 깊숙이 내재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 이론에 따르면 인류 역사를 추동하는 근본적인 힘은 생산력 발전이며 사회적인 생산 관계는 생산력 발전에 의해 형성되거나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일정한 발전 단계에 이르면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은 그것이 작동하는 틀로 기능해 온 기존 생산관계, 또는 그것을 법률 용어로 표현한 것에 불과한 소유 관계와 충돌한다. 생산력이 발전하는 형태였던 이 관계들은 이제 생산력의 족쇄가 된다. 그러면 사회혁명의 시대가 열린다. 경제적 토대의 변화들은 조만간 거대한 상부구조 전체를 뒤바꾸는 변화로 이어진다.(칼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 1859)

그러므로 사회주의는 생산력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라는 족쇄에서 풀려나 더한층 발전하는 것과 동일시된다.

이런 동일시는 그에 대한 비판과 대조해 보면 더 분명하다. 현재까지 이런 ‘성장’ 모델에 대한 비판은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환경 운동 내 온건파 쪽에서 나오는 듯하다. 이들의 비판은 사회주의자들이 (옳게도) 한사코 반대하는 두 가지 주장과 연결돼 있는 듯하다. 그 두 가지 주장은 1) 인구과잉이 환경 위기의 원인이라는 반동적이고 잠재적으로는 인종차별적이기까지 한 주장과 2) 이와 관련된 주장으로서 지구를 구하려면 인구 다수의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인류세가 몰고 올 파장에 직면한 지금, 다음과 같은 물음이 제기된다. 재앙적인 기후변화와 생물권에 대한 온갖 위협이 임박한 상황에서 사회주의자들은 이제 다른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사회주의자들, 특히 스스로를 생태사회주의자로 여기는 사회주의자들은 이제 ‘무한한’ 경제 성장은 고사하고 지속적인 경제 성장조차도 인류 존속에 대한 위협이자 폐기해야 할 목표로 규정하고, ‘탈성장’을 새로운 목표나 심지어 슬로건으로 내세워야 하는가?

이런 거대 화석연료 산업을 중단시키려면 어떤 전략이 필요할까? 루이지애나에 있는 액손모빌의 정유 공장 ⓒ출처 WClarke

마르크스주의 세계관을 근본부터 재검토하지 않아도 두 가지 명백한 답변을 할 수 있다. 첫째, 다양한 사회주의자들의 과거 입장이나 실천이 어땠든지 간에 끝없는 경제성장에 집착하는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다. 게다가 이런 집착은 순전히 이데올로기적인 요인 때문이 아니다.(그것은 주된 요인조차 못 된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설명했듯 그것은 어떤 편견이나 마음가짐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가차 없는 경쟁 논리에 의해 모든 자본주의 생산단위(작은 구멍가게이든, 다국적 기업이든, 자본주의 국가이든)에 강요되는, 자본주의 생산관계에 내재된 물질적 동인에서 비롯한다. 자본주의와 자본주의 정부가 성장을 포기하는 것은 악어가 채식 동물이 되는 것보다 어려울 것이다. 주기적 경제불황이나 (코로나19 팬데믹 같은) 어떤 경제 외적 재난은 자본주의에 ‘탈성장’기를 가져다 주는데, 성장이 멈추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입장에서 엄청난 재앙이다. 이 체제는 인류나 자연에 미칠 장기적 결과에 개의치 않고 이 재앙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쓴다. 둘째, 몇몇 경제 부문과 생산력은 사회주의자들도 기꺼이 ‘탈성장’시키거나 아예 없애고 싶어 한다. 화석연료, 자동차, 무기 산업, 그리고 아마도 광고 산업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반면 적극 확대하길 원하는 부문도 존재한다. 재생 에너지나 교육, 보건, 대중교통 등이 그럴 것이다.

이 답변들은 내가 보기에 그 자체로 타당하지만,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서는 전반적이고 국제적인 수준에서 탈성장이 필요하지 않느냐는 물음을 완전히 해소해 주지는 못한다.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그리고 답하기 위해, 우리는 잠시 한발 물러나 경제 성장, 생산력 발전이 무엇을 뜻하는지, 사회주의 사회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성장’이란 무엇인가?

언뜻 보기에 경제 성장의 의미는 명백해 보인다. 더 많은 ‘재화’나 ‘물건’을 더 많이 생산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탈성장’의 대표 주자인 요르고스 칼리스는 《뉴 인터내셔널리스트》에 쓴 글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좌파는 성장이라는 허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무한한 성장은 얼토당토않은 발상이다. (이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발상인지 살펴보자. 만약 고대 이집트인들이 1세제곱미터의 재화에서 시작해 그것을 매년 4.5퍼센트씩 성장시켰다고 가정하면 3000년 동안 이어진 고대 이집트 문명이 저물 때 이들은 25억 개의 태양계를 점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심지어 자본주의적 성장을 그보다 선량하고 천사 같은 사회주의 성장으로 대체할 수 있다 해도, 도대체 왜 우리가 25억 개의 태양계를 점유하고 싶어 하겠는가?(요르고스 칼리스, ‘좌파는 탈성장을 채택해야 한다’ 《뉴 인터내셔널리스트》, 2015년 11월 5일)

칼리스의 주장이 타당하다면 칼리스는 다음과 같이 자문해 봐야 한다. 어째서 (3000년이 아니라) 5000년 동안 이어진 고대 이집트 문명은 1세제곱미터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시작했으면서도 수십억 개의 태양계는 고사하고 이집트 땅조차 다 채우지 못하고 그 땅을 대부분 텅 빈 사막으로 남겨 두었을까? 사실 경제 성장은 결코 더 많거나 더 큰 ‘물건’을 생산한다는 뜻이 아니다. 자본주의를 성장하도록 추동하고 채찍질하는 것은 끝없이 더 많은 물건을 생산하려는 욕구가 아니라 끝없이 이윤을 생산하려는 욕구다. 차세대 컴퓨터 생산으로 마이크로소프트 사와 미국 경제는 크게 성장했지만 생산물의 물리적 크기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사치스러운 롤렉스 시계 생산과 판매 호황은 상당한 경제 성장을 낳을 수 있지만 ‘물건’의 양이라는 측면에서 그것이 더하는 것은 거의 없다.

성장을 측정하는 가장 잘 알려진 지표는 국내총생산(GDP)이다. 그 이름에도 불구하고 GDP는 생산물의 물리적 크기나 일정 기간에 생산된 물리적 생산물이 아니라 그 기간 중에 생산된 모든 최종 재화와 서비스의 시장 가치를 화폐 가치로 측정하는 지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GDP를 “생산 활동의 총량적 지표로서, 생산과 서비스에 종사하는 국내 모든 단위 가구와 단위 조직의 총 부가가치 합계(최종 산출물 가격에 포함되지 않은 세금은 더하고 보조금은 뺀다)와 같다”고 정의한다. 국제통화기금(IMF)은 GDP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GDP는 한 나라에서 일정 기간(연도, 분기 등) 동안 생산된 최종 재화(최종 소비자가 구매하는 재화)와 서비스의 화폐 가치로 측정된다.” GDP가 얼마나 정확한 지표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1인당 (명목) GDP든 구매력평가(PPP) GDP든 국민총생산(GNP)이든 국민총소득(GNI)이든 이 모든 지표들은 물리적 생산량이 아니라 화폐적 가치를 측정한다.

물론 이런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런 지적이 기술적으로는 옳다고 해도 현실에서 경제 성장과 물리적 생산 사이에는 일반적으로 연관성이 있지 않냐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화폐적 가치가 아니라 물리적 생산이 환경을 파괴한다는 점이다. 사실 둘 사이의 일관된 연관성이나 상관관계를 찾기는 어렵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1인당 GDP가 가장 높은 열 곳은 다음과 같다.

마카오, 룩셈부르크, 싱가포르, 카타르, 아일랜드, 케이맨제도, 스위스,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노르웨이, 미국.

이 중 미국만이 유일하게 ‘물건’을 만들어 내는 주요 국가다. 마카오나 케이맨제도 같은 곳은 사실상 생산하는 것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아일랜드도 비슷한 사례다. 2015년 아일랜드는 GDP가 26.3퍼센트 성장했다고 발표했는데, 이 수치는 2016년 7월 아일랜드중앙통계청에 의해 34.4퍼센트라는 더 놀라운 수치로 수정됐다. 이는 생산의 증대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으며, 조세 회피를 노린 회계 흐름으로 아일랜드 경제 통계가 왜곡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이를 가리켜 “레프러콘[아일랜드 민담에 나오는 작은 요정] 경제학”이라는 유명한 말을 만들어 냈다. 그는 이것이 모든 조세 회피처의 공통된 특징이라고 덧붙였다. “내가 만들어낸 경제 용어 중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몇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조세 회피처를 찾아 나선 다국적 기업들이 초래하는 통계 왜곡을 뜻하는 ‘레프러콘 경제학’이다.” (폴 크루그먼, 〈뉴욕 타임스〉, 2020년 1월 28일자)

이렇게 물질적 생산과 ‘성장’을 개념적으로 분리한다고 해서 자본주의적 성장에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적 성장에서 핵심적인 사항은 바로, 모든 자본주의 기업(엑손모빌, BP, 셸, 도요타, 폭스바겐, 보잉 등 환경에 가장 큰 피해를 주는 기업들도 물론 포함된다)과 모든 자본주의 국가(미국, 중국, 브라질, 인도, 사우디아라비아 등 지구에 가장 큰 해를 끼치는 나라들도 물론 포함된다)들의 경쟁에 의해 강요된다는 점이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화석연료 자본과 자동차 자본이 수행하는 중심적인 구실을 볼 때, 자본주의적 경제 성장은 필연적으로 기후변화와 그 밖의 환경 파괴를 앞으로도 계속 낳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추상적으로 ‘성장’ 일반이 그런 파괴적 결과를 낳는다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곧 뒤에서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성장을 다룰 테지만, 먼저 생산력이라는 문제를 짚고 넘어가자.

어떤 사람들(예컨대 요르고스 칼리스?)이 경제 성장을 더 많은 재화 생산으로 이해한다면, 어떤 사람들은 생산력을 단순히 기계와 기술로 환원한다. 그러나 이것은 마르크스의 견해가 아니었다. 《철학의 빈곤》에서 마르크스는 “모든 생산 도구 중에서 가장 위대한 생산력은 혁명적 계급 그 자체다”라고 썼다. 기계는 사람이 만들어야 하고 그것을 작동시키려면 인간 노동, 즉 노동자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마르크스는 분명 옳았다. 게다가 생산자들, 즉 그들이 속한 사회가 보유한 과학 지식과 기술의 수준은 어떤 기계를 만들어 낼 수 있고 그 기계가 얼마나 생산적일지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다. 그러므로 생산력은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할 수 있는 사회의 일반적 능력으로 이해해야 하고, 따라서 천연자원도 여기에 포함돼야 한다. 《고타 강령 비판》에서 마르크스는 노동뿐 아니라 자연도 부의 원천이라고 역설했다. 《자본론》에서 마르크스는 노동자와 토양을 부의 두 가지 궁극적 원천으로 꼽았으며 이렇게 서술하기도 했다. “지구는 그[인간—몰리뉴]의 태초의 식량 창고이며 도구 창고이기도 하다 … 지구 자체가 노동의 도구다.”

생산력이 사회의 일반적 생산 능력을 뜻한다면, 생산력의 발전이나 진보가 반드시 더 많은 물건의 생산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같은 양의 물건을 더 적은 시간에 생산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마르크스 자신은 노동시간의 효율화에 많은 강조점을 뒀다. 인간을 필수적 노동에서 해방시키고 노동시간을 단축시키고 인간의 자유를 신장할 잠재력이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진정한 효율화, 절약은 노동시간 절약에 있다 … 그러나 절약은 생산성 발전과 동일한 것이다 … 노동시간의 효율화는 자유 시간, 즉 개인의 온전한 발전을 위한 시간이 늘어남을 뜻한다. 이것은 다시 노동의 생산력에 대한 가장 큰 생산력으로 작용한다.(칼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여기서 이끌어낼 수 있는 결론은, 비록 자본주의적 경제·사회·정치 관계 안에서 이뤄지는 생산력 발전 거의 대부분이 환경을 위협하기는 하지만, 생산력 발전이 그 자체로 환경을 위협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성장과 사회주의

사회주의 하의 성장에 대한 논의는 애초에 사회주의를 어떻게 정의하냐에 달려 있다. 가장 지배적인 시각, 즉 주류 언론과 학계 그리고 어느 정도는 좌파 내에서도 지배적인 시각에 따르면 사회주의 나라나 국가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사회주의를 자처하는 정권이 존재한다.

2. 주요 생산수단이 국유화돼 있다.

3. 국가가 중앙 집중적으로 경제를 계획한다.

이런 시각이 학계에서 지배적이라는 점은 학술 담론에서 특히 소련, 동유럽 같은 옛 ‘공산’ 국가들을 지칭할 때 ‘현실 사회주의’라는 용어가 자주 쓰인다는 점에서 잘 확인할 수 있다. 사회주의를 자처하는 정권의 존재라는 기준은 진지한 고려 사항이 되기 어렵다. 그런 기준에 따르면 콩고인민공화국, 1974~1987년 에티오피아 군사독재(그 사이에는 대기근이 창궐하기도 했다), 폴 포트의 캄보디아, 1962~1988년 버마 같은 사례들도 사회주의로 쳐야 할 테니 말이다. 남는 것은 국유화와 국가의 계획이다.

요르고스 칼리스(다시 한번 탈성장의 대표 주자로서 인용하겠다)는 여기에 냉소적이다.

탈성장은 자본주의와 양립할 수 없지만, ‘사회주의적 성장’이라는 환상도 거부한다. 이것은 합리적이고 중앙 집중적으로 경제를 계획하면 생태계를 해치지 않고도 합리적 성장을 할 수 있는 기술 발전이 마치 마술처럼 가능해진다는 환상이다.

칼리스의 냉소에 대해 뻔한 ‘논리적’ 반박을 할 수도 있다. 합리적으로 계획된 경제는 마술 같은 것을 끌어오지 않아도, 합리적으로 계획됐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생태계를 파괴하지 않는 합리적인 성장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칼리스도 마찬가지로 뻔한 반박을 내놓을 수 있다. 논리적으로는 어떻든지 간에 소련, 중국, 동유럽, 북한 등 국가가 경제를 계획한 나라에서 실제로 일어난 성장은 생태적으로 만족스럽거나 지속가능하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는 ‘왜?’라는 물음을 제기한다. 왜 중앙 계획 경제는 생태를 파괴하는 성장을 피할 수 없었을까? 정권의 사고방식이 문제였을까? (여기서 우리는 서구 자본주의 정부와 경제가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이 그들의 사고방식 때문이라는 ‘온건한’ 환경 운동가들의 진단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이러한 국가 계획 경제에 공통된 두 가지 근본적인 구조적 결함이 있다고 본다. 첫째, 계획을 세우는 국가기구는 어떠한 민주적 통제도 받지 않았으며, 이것을 운영하는 자들은 민주적 책임을 지지 않고 물질적 특권을 누리고 많은 경우 순전히 독재적인 관료 집단이었다. 둘째, 이런 계획들은 국가적 수준에 한정돼 있었으며 다른 국민국가와의 경쟁 속에서 수립됐다. 이 국민국가들은 자유 시장 경제든 국가 계획 경제든 세계 자본주의와 세계 시장이라는 틀 내에서 경쟁을 벌였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사례로 소련은 장기적으로 미국과 경제적·군사적 경쟁을 벌이고(결국 패배했다) 중국과도 경쟁했다.(중국도 마찬가지였다.) 이 상황에서 국가 관료들은 미국 정부와 엑손 모빌이 했던 것처럼 자신들의 권력 유지와 생존에 필수적이라고 판단한 경제 성장을 위해 자연을 희생시켰다.

내가 보기에 이런 나라들은 ‘현실 사회주의’가 전혀 아니다. 나라면 ‘국가자본주의’라고 일컬었을 것이다. 성장이나 탈성장 문제를 논의할 때 내가 생각하는 사회주의 개념이나 이상은 이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제시한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으로서의 사회주의이며, 바로 그들이 《공산당 선언》에 제시한 대로의 사회주의다. 즉, 프롤레타리아가 스스로 지배계급이 돼 “부르주아지에게서 서서히 모든 자본을 빼앗고, 모든 생산수단을 국가, 즉 지배계급으로 조직화한 프롤레타리아의 수중에 집중시키는 것이다.”

사회주의, 즉 노동자 권력의 이 최초 단계는 계급이 완전히 사라진 완전한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사회로 점진적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시작할 것이다. 동시에 이 과정은 한 나라에서 먼저 일어난 혁명을 세계 다른 곳으로 전파하는 과정이기도 하며, 그런 혁명의 국제적 확산과 나란히 진행될 것이다.

(물론 사회주의 운동 내에는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가능하냐를 둘러싸고 오랜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기후변화로 인해 논쟁의 조건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러시아든, 중국이든, 쿠바든 단일 국가의 틀 내에서 세계 자본주의의 압력을 버텨낼 수 있느냐와 상관없이, 기후 위기는 일국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만약 사회주의적 전환이 브라질이나 남아프리카, 이집트, 중국 같은 곳에서 시작된다 해도, 미국, 러시아, 인도, 유럽연합 등의 국가들이 지금처럼 운영되는 한, 기후 재앙으로 급격히 치닫는 현 상황은 사실상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혁명은 기세를 몰아 전진하거나 그러지 못하면 후퇴할 텐데, 혁명이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확산된다면 이윤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에 따라 계획되는 생산이 세계적으로 우세해지는 시점이 올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 생산에 관한 결정은 적대적 세계에서 살아남아야 할 필요성에 여전히 크게 좌우될 것이다. 예를 들어, 초기 소비에트 국가는 순순히 항복하고 완전히 분쇄되지 않으려면 막대한 군비 지출을 감행해야 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자본주의에서 성장에 대한 강박은 재화 생산에 대한 강박이 아니라 이윤과 자본 축적에 대한 강박이며, ‘경제 성장’은 GDP든 GNI든 다른 어떤 지표로 표현된 것이든 물리적 생산의 증가가 아니라 화폐적 가치의 증가를 뜻한다. 따라서 생산이 점점 더 사회적 필요에 따라 이뤄지고 그에 따라 무상으로 제공되는 사회 복지, 예를 들어 교육, 의료, 교통, 주택 등의 무상 제공이 늘어난다면 화폐적 가치 측정은 점점 더 무의미해질 것이다. 전 자본주의 사회, 소위 ‘저발전’ 사회에서는 인구 대다수가 농민이고, 많은 생산이 그저 생존을 위해 수행되고, 오직 극소량의 잉여 생산만이 교환 대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전체 사회적 생산의 대부분이 화폐적 척도로 측정할 수 있는 것보다 낮은 수준에서 이뤄졌다. 계급 사회와 화폐가 출현하기 전, 수십만 년 이어진 원시 공산주의 수렵·채집 사회에서는 현대적 의미의 경제 성장이 완전히 무의미했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런 시기에도 생산력은 (대략 3만 년 전쯤의) 석기와 토기가 발전한 것처럼 아주 느리지만 실질적으로, 그러면서도 자연과의 신진대사에 균열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발전했다. 70억 명이 지구에 사는 오늘날, 수렵·채집 사회의 생산양식으로 회귀하는 것은 당연히 가능하지 않다. 전화나 인터넷은 물론 증기 기관이나 변변한 의약품도 없는 중세 시대 수준의 생산력으로 돌아가는 것 역시 가능하지 않다. 우리의 목표는 원시 공산주의 사회처럼 평등하고, 계급이 존재하지 않고, 소외가 없고, 자연과 조화롭고 지속 가능한 관계를 맺으면서도, 훨씬 더 높은 생산력 수준을 바탕으로 그렇게 하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어야 한다.

사회주의 정부가 처음부터 해야 하고 할 것으로 기대되는 일은 현재 생태사회주의자들의 요구와 꽤 유사하다.

● 국가적 수준과 국제적 수준에서 탄소배출을 (2050년이 아니라) 2030년까지 0으로 줄이기.

● 석유, 가스, 석탄 등 화석연료에 대한 모든 의존과 화석연료 사용을 최대한 빨리 청산하고 화석연료 탐사를 즉각 중단시키기. 화석연료를 땅속에 내버려 둘 것! 재생 에너지원으로 신속히 전환하기.

● 균등하고 확대된 대중교통 무상 제공

● 광범한 주택 개량

● 소고기와 축산업에 대한 의존을 크게 줄이기

● 대규모 조림 사업

이렇게 아주 제한적인 강령조차 생산력을 이루는 각기 다른 부문의 탈성장 성장 모두를 포함한다는 점을 명심하라. 화석연료 산업을 없애는 과정은 풍력, 태양광 발전 등의 확장으로 보완돼야 한다. 자동차 산업을 줄이고 궁극적으로는 제거하는 과정은 버스와 기차를 더 생산하고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주택을 더 짓는 것으로 보완돼야 한다. 소고기를 더 적게 생산하는 대신 더 많은 야채를 기르고 더 많은 나무를 심어야 한다.

진정한 사회주의 정부라면 이러한 이중적인 접근법을 강령의 다른 분야에도 적용할 것이다. 군사와 무기 생산을 대폭 감축하고 완전히 제거하는 동시에, 더 많은 병원, 학교, 고등교육 기관을 제공할 것이다. 값비싼 호텔과 호화로운 아파트 단지 건설을 줄이고 공공 주택을 늘릴 것이다. 광고를 줄이고 극장과 예술 센터를 늘릴 것이다. 일회용 플라스틱 제품과 불필요한 상품을 줄이고(결국에는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 청소년 지원 활동과 노인 돌봄에 더 많은 자원을 투여할 것이다. 이런 것들을 끝없이 나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탈성장을 요구하는 것으로는 이런 복합적인 문제에 대처할 수 없다.

특히 우리는 많은 ‘탈성장’론자들, 특히 인구 통제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내재된 시각, 즉 모든 인간 활동, 인간의 존재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자연에 해롭다는 시각에 도전해야 한다. 완전히 발전한 미래의 국제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의 생산 활동의 엄청난 부분이 자연과의 신진대사 균열을 회복하고, 인류 생존에 필요한 자연환경을 지속시키는 활동에 투여될 것이다. 예를 들어 친환경적이면서 신속한 탄소 배출 없는 새로운 수상 교통수단을 개발해 항공 교통을 크게 줄이거나 완전히 없애는 것이 완전히 가능할지도 모른다. 역으로 생태계를 해치지 않는 비행 방법을 개발할 수도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추측에 불과하며 기후변화, 생태계 파괴, 착취, 억압, 전쟁 등 갈수록 가까운 시일 내에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당면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달려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점들은 무턱대고 탈성장만을 요구하거나 생산력을 축소하라고 요구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복합적인 문제가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보여 준다.

생태사회주의자들은 무엇을 주장해야 하는가?

성장이라는 문제에 관해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주장이 무엇이냐는 문제는 우리의 주요 청중이 누구인가와 연관된 문제며, 이는 다시 변화를 위한 전략 문제와 관련돼 있다. 의심의 여지 없이 환경 운동 내 일부는 정부와 기업 CEO, 그 밖의 지배계급 사람들에게 직접 호소해 그들로 하여금 운영 방식을 바꾸게 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지배계급 사람들에게 자국 경제나 회사를 탈성장 시키라고 요구하는 것은 완전히 공상적이다. 이는 돼지에게 날아다녀 보라고 하거나 거대 석유기업 BP더러 “석유를 넘어”[BP의 슬로건 – 역자]서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리고 내 생각에 이는 단지 탈성장을 주장하는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전반적으로도 무기력한 전략이다. 물론, 지배자들이 그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알더라도, 기층에서 대중을 행동에 나서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우리는 그런 요구를 할 수도 있다.

한편, 탈성장이라는 관념과 요구에 매력을 느끼는 층이 있을 수도 있다.(“수도 있다”에 강조점을 두겠다.) 그레타 툰베리의 영향력 덕분에 행동에 나선 청소년들, 멸종반란이 주도하는 직접 행동에 가담한 대학생과 일부 젊은 전문직 종사자들이 그런 층일 수 있다. 이들은 즉각적인 경제적 고려를 크게 하는 집단은 아니다. 물론 이들을 배제하자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들은 이들 나름대로, 그리고 환경 운동 전체에도 중요한 집단이며 우리는 반드시 이들과 관계 맺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생태사회주의 정치의 주요 청중이나 시금석이 아니라는 것이 내 견해다. 생태사회주의 정치의 주요 청중과 시금석은 전 세계와 특히 개발도상국에 사는 노동계급과 피차별 대중이어야 한다. 왜일까? 이들이, 오직 이들만이 자본주의에 도전하고 진정한 체제 변화를 이끌어 낼 잠재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을 행동에 나서게 하는 문제에서 탈성장이라는 관념과 슬로건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든, 영국 리버풀에서든, 브라질 상파울루에서든, 남아프리카공화국 소웨토에서든 출발점이 될 수 없다. 자본주의에서 탈성장을 요구하는 것은 더 많은 실업과 빈곤, 더 극심한 대중의 고통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요구로는 대중 운동을 건설할 수 없다. 오히려 노동계급을 운동에서 더 멀어지게 만들 것이다. 그뿐 아니라 환경 운동 내의 온건하고 반反사회주의적인 경향을 강화시킬 것이다. 탄소세 같은 방법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소비를 줄이는 것이 기후변화의 해결책이라고 믿는 이런 경향의 사람들은 아일랜드 녹색당이 하는 것처럼 신자유주의적인 보수 정당과 손잡고 그런 정책을 추진하려 할 때가 많다. 탈성장 주장은 ‘정의로운 전환’ 요구를 완전히 허물어뜨릴 것이다. 이런 문제들을 낳으면서 탈성장 자체도 달성하지 못할 것이다. 자본주의와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주장했듯 사회주의 하에서의 탈성장을 주장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틀렸으며, 관련 문제에 대해 대중을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다. 탈성장 주장은 기후변화를 막을 실질적 조처를 위한 운동을 이끌어내기 보다는 대중으로 하여금 사회주의에 관심을 잃게 만들 공산이 크다.

그러나 탈성장 슬로건을 거부한다고 해서 예전처럼 똑같이 성장 일반(심지어 사회주의적 성장이라 할지라도)을 계속 요구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생태사회주의자들이 지금 해야 할 일은 정확히 어떤 산업 부문·형태—화석연료, 자동차, 무기, 공장식 축산업, 일회용 플라스틱, 대부분의 광고 등—를 탈성장시키고 없애야 하는지 분명히 밝히면서도, 그 과정이 양질의 녹색 일자리, 더 나은 의료, 교육, 복지 서비스와 인구 대다수의 삶의 질 향상과 결합돼야 한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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