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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만 명이 부시와 아펙에 반대해 행진하다

‘아펙반대 부시반대 국민행동 정책기획팀’에서 반아펙 운동 건설에 함께 한 ‘다함께’ 운영위원 김광일이 반부시·반아펙 투쟁을 평가한다.

미주정상회담에서 별다른 소득을 못 본 부시는 이번 아시아 순방에서도 ‘빈손’으로 귀가한 듯하다. 〈워싱턴 포스트〉는 부시의 ‘빈손외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시는 일본이 2년 동안 계속된 미국산 쇠고기 수입 금지 조치를 풀기 바랐지만, 일본은 공식 선언하지 않았다. 부시는 한국에서 열린 [아펙]경제정상회의에서 자유무역을 추진하고 싶어했으나 태평양 연안의 지도자들이 승인한 성명서에는 관세 폐지가 빠졌고, 오직 지속적으로 논의한다는 내용만 포함됐다. 또 다른 차질이 생겼는데 한국 정부가 월요일에 이라크에 파병된 3천2백 명 군대의 3분의 1을 감군한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워싱턴 포스트〉 11월 21일치)

‘WTO 협상 특별선언문’을 채택했지만 지엠대우 사장 닉 라일리는 “홍콩 각료회의의 성공에 돈을 베팅하라면 한 푼도 걸지 않겠다”고 냉소했다(〈한겨레〉 11월 21일치).

중국 방문 결과도 마찬가지다. “위안화 절상과 무역적자 개선도 말만 있을 뿐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고, 부시 행정부가 중국측에 넘겨 준 DVD 불법복제 공장 25개의 명단에 대해서도 중국측은 아무런 결과를 알려 주지 않았다.”(〈경향신문〉 11월 21일치)

게다가 부시는 아르헨티나의 마르 델 플라타에서처럼 부산에서도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영국 BBC(11월 18일)는 인터넷 판에서 부산 시위에 대해 “항의가 태평양 연안 정상회의를 강타했다”고 보도했다.

노무현 정부의 온갖 공격과 책략에도 불구하고 11월 18일 부산에 3만 명이 결집했다. 11월 18일 시위를 둘러싼 상황은 결코 유리하지 않았다. 노무현은 시위 전부터 “대테러 조치 강화”를 통해 항의 운동의 분위기를 억누르고자 노력했다. 시위 당일에도 노무현 정부는 전남지역 농민들이 타고 있던 버스 70대가 집회에 참가하는 것을 막았다.

민주노총 간부 비리와 민주노동당 울산 재선거 패배 등에 뒤따른 잇단 위기 상황은 운동 전체의 사기 저하를 자아낼 수 있었다.

주류 언론은 의도적으로 반아펙 주장에 냉대로 일관했다. 포퓰리즘적인 〈한겨레〉도 아펙 홍보에 열을 올렸고 반대 주장을 싣는 데 다소 인색했다. 우파 개량주의 세력인 NGO 지도부들은 시위 참가를 거부했다.

이런 상황에서 3만 명은 매우 큰 규모였다. 다른 시위 규모에 견줘 봐도 마찬가지다. 이 규모는 올해 있은 정치 집회 중 단연 가장 컸다.

2002년 2월 부시가 방한했을 때 반대 시위 규모는 4천여 명이었다. 2000년 10월 아셈 반대 시위는 2만 명, 지난해 6월 세계경제포럼 동아시아 정상회의 반대 시위는 1만 명이었다.

11월 18일 부산은 급진화의 단면을 멋지게 표현했고, 성장하고 있는 한국 반전·반자본주의 운동의 현 주소를 확인해 줬다.

부산 시위는 “다양성 속의 단결”이라는 반전·반자본주의 운동의 장점을 보여 줬다. 부산시위는 자본주의가 가하는 억압에 맞서 싸우는 피억압자들의 축제였다. 그리고 전쟁과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이 결합할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정확히 보여 줬다.

비정규직 개악에 맞서 싸우는 민주노총 조합원들과 WTO의 시장주의에 저항하는 농민들, 강제철거에 맞서 싸우는 노점상, 지구온난화 대책을 요구하는 환경운동가들, 민주노동당원들, 의료시장 개방에 반대하는 의사와 보건의료 운동가들, 대학생들과 청년들, 전쟁과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여성 활동가들, 부시의 동성애자 공격에 항의하는 동성애자 활동가들, 이주노동자 등이 형형색색의 팻말과 펼침막을 들고 부시와 아펙에 맞선 저항을 위해 단결했다.

노동자 대열과 농민 대열, 청년 대열이 사전 집회를 마치고 합류한 수영로터리는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였다. 11월 18일 파업이 취소됐지만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예상보다 많이(5∼6천여 명) 참가한 것도 중요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지적했듯이 노동자들의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은 서로 상승효과를 낼 수 있다.

부산 시위 성공의 이면에는 운동의 국제주의 성격도 반영돼 있다. 9월 24일 워싱턴 30만 명 시위는 활동가들에게 자신감을 고무했고, 아르헨티나 반부시 시위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연사들과 사회자들이 “워싱턴 시위”와 “아르헨티나 시위”를 언급했다. 부산 시위는 워싱턴과 라틴아메리카의 “저항의 성화를 훌륭히 봉송”한 셈이다. 저항의 세계화는 우리 운동의 중요한 강점이다. 이 점은 앞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부산지역 청년단체와 부경총련 등 좌파 민족주의 계열 활동가들의 헌신적인 노력은 이번 시위의 중요한 성공 요인이었다. 이 동지들은 아펙 찬양 일색인 부산에서 거의 매일 거리 홍보전과 리플릿팅, 차량 홍보전, 시위 준비 등의 활동을 벌였다. 부산대 총학생회 활동가들은 시위를 위해 총학생회 선거를 당겨서 11월 16일에 마치는 모범을 보였다.

주요 조직자들은 사생활에 거의 신경 쓸 틈이 없었다. 한 조직자는 결혼식이 11월 20일인데도 시위 조직에 ‘올인’했다. 실무를 총괄한 여성 조직자는 둘째 아이가 돌인데도 아이를 시댁에 맡기고 시위 조직에 전념했다.(이는 포럼에 더 큰 강조점을 두고 운동 건설에는 좀 덜 열의를 보였던 민주노동당 부산시당 PD계열 활동가들의 선전주의와 대비됐다.)

이 동지들은 규율 있고 헌신적이면서도 매우 개방적이었다. 운동을 건설하면서 젊은이들의 정서를 한껏 빨아들일 줄 알았다. 새롭게 급진화하는 세대를 투쟁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경향에 대해서도 존중할 줄 알았다. 이 동지들은 ‘다함께’의 부산 조직이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음에도 중요한 세력으로 인정하고 부산지역 시위에서 연설 기회를 자주 줬다. 또, 실무 조직 면에서도 매우 노련하고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대규모 시위를 차질 없이 치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동지들의 열정과 헌신, 능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다함께’ 회원들은 이런 장점들을 배울 필요가 있다. 부산지역 ‘다함께’ 활동가들은 이 동지들과 함께 협력적으로 운동을 건설하고 그 운동 안에서 토론할 줄 알아야 한다.

부산 저항의 한복판에서 ‘다함께’는 매우 능동적인 구실을 했다. ‘다함께’는 가장 먼저 11월 투쟁의 중요성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선동뿐 아니라 공동전선 안에서 활동하기, 지역과 대학, 거리에서 시위 건설을 위해 수개월을 집중했다. 그 결과 ‘다함께’는 부산에서 매우 인상적인 대열을 이룰 수 있었다. 주요 집회에서 연설할 수도 있었고, 활동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줄 수 있었다.

부산 시위에서 ‘다함께’ 대열을 본 활동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한 동지는 “도대체 ‘다함께’는 회원이 몇 명이나 되냐?”고 묻기도 했고, “화려한 대열이 시위 전체 분위기를 띄웠다”, “‘다함께’가 입장할 때 대열의 규모를 보고 놀랐다”는 칭찬을 듣기도 했다.

부산에서 시위대의 숙식을 총 책임진 부산지역 청년회 한 활동가는 “‘다함께’가 가장 조직적인 것 같았다.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은 조직을 성장시킬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제공한다. 부산에서는 이미 운동 건설 과정에서 5명이 가입했다. 우리는 부산 저항의 성공을 변혁적 좌파 조직 성장을 위한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 단단한 조직이 없었다면 이처럼 성공적인 운동을 조직할 수 있었겠는가. 저항의 바다에서 원칙과 전술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등대는 필수적이다. 변혁적 정치조직은 등대와 같은 구실을 할 수 있다.

아울러 부산 투쟁의 성공을 또 다른 투쟁으로 연결시켜야 한다. 파병 재연장 반대 투쟁, 민주노총 비정규직 개악 반대 투쟁은 부산 저항의 성공 안에서 그 싹을 틔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