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 ― 많이 풀린 돈이나 임금 상승이 원인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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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4일 러시아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는 뉴스가 나오자 미국 주식시장은 큰 폭으로 상승했다. 아마도 “거리에 피가 흐를 때” 투자하라는 주식시장의 격언이 이 현상을 잘 설명해 주는 것 같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주식시장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보다는 3월에 있을 금리 인상을 더 우려한다는 점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같은 외부적 요인으로 원유와 천연가스 가격이 상승하기 때문에 미국 연준이 3월에 금리를 대폭(0.5퍼센트포인트) 올리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주가가 올랐다.
최근 몇 달 동안 자본시장에서 가장 뜨거운 쟁점은 인플레이션이 어떻게 될 것인지와 함께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이하 연준)가 금리 인상 시기와 속도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3월 중순에 열릴 미국의 연방공개시장위원회(Federal Open Market Committee, 일명 FOMC, 한국으로 치면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에서 미국의 기준금리가 정해지기 때문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지금 시장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은 인플레이션이 수요 측면에서 유발된 것인가(억눌린 수요 또는 보복 소비) 아니면 공급 측면에서 생긴 문제(공급 부족)인가 하는 점과 이 인플레이션이 단기적 현상인가 아니면 장기적 현상인가 하는 점이다.
물가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미국의 올해 1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 대비 7.5퍼센트 상승해 1982년 2월 이래 4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래서 워런 버핏이 회장으로 있는 버크셔헤서웨이의 부회장인 찰리 멍거는 인플레이션에 대해 “핵전쟁을 제외하면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큰 장기적 위험”이라고 지적했다. 더 나아가 그는 인플레이션으로 민주주의가 죽게 될 수도 있다고 경고까지 했다. 도대체 인플레이션이 뭐길래 자본가들이 이토록 두려워하는 것일까?
수요 문제인가, 공급 문제인가?
앞에서 제시한 질문에 답변을 해 보자. 인플레이션이 수요 측면에서 유발된 것인가 아니면 공급 측면에서 생긴 문제인가? 정답은 공급 측면에서 생긴 문제다. 이것을 마르크스주의의 노동가치론에 기초해 설명하면 이렇다.
인플레와 노동가치론
생산물 가치는 불변자본의 가치(C)와 가변자본의 가치(V) 그리고 잉여가치(S)의 합이다. 예를 들어 불변자본이 80원, 가변자본이 20원 그리고 잉여가치가 20원이라면(편의상 원이라는 화폐로 표현했다) 이 생산물의 가치는 120원이 된다. 이것이 시장에 나와 수요와 공급 요인 등에 의해 130원에 팔릴 수도 있고, 110원에 팔릴 수도 있다. 이때 생산물의 가치(120원)는 이 생산물을 생산하는 데 들어간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여기서는 시간을 화폐로 표현한 것이다)에 의해 결정된다. 그래서 노동가치론에 기초한다면 가치는 수요 측면에서 결정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가치가 120원인 생산물이 시장에 적게 출하돼 240원에 팔리더라도 그 생산물을 생산하는 데 들어간 노동시간이 두 배로 증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치는 공급 측면에서 결정되고, 가격은 수요와 공급 등의 요인에 의해 그 가치를 중심으로 오르내린다.
노동가치론에 기초해 최근의 인플레이션을 설명하면, 보복 소비나 억눌린 소비처럼 수요의 급작스런 상승 때문이 아니라 공급 차질에서 생겨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공급 차질은 코로나19 팬데믹이 해결되면 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이 해소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원자재 공급 비용이 이전보다 많이 들고, 물류 비용도 증가하며, 노동력 공급에도 이전보다 비용이 많이 든다.
또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각종 원자재나 노동력의 생산에 드는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의 증대(이것은 가치의 증가를 나타낸다) 외에도 수요 증가를 감당하지 못하는 공급 부족 때문에 생긴 가격의 급등(가치의 증가를 나타내지 않는다)도 존재한다. 많은 기업들이 공급 부족 상황에서 가격을 가치보다 높게 인상해 이윤을 극대화하고 있으며, 그 부담은 최종적으로 신규 투자를 하려는 자본가와 최종 소비자에게로 전가된다.(신규로 투자하려는 자본가는 노동력과 원자재 가격이 상승하면 그렇지 않을 때보다 기대 이윤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물론 원자재 가격 상승의 부담을 최종 생산물 가격 상승으로 전가할 수 있는 기업들은 예상 이윤이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설명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거의 모든 부문에서 생산 차질을 빚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과 부합한다.
기업의 팬데믹 대응이 낳은 공급 차질
글로벌 해운사 머스크의 최고경영자 쇠렌 스코우는 “현재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공급망 문제가 완화됐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선적 컨테이너를 확보하는 것이 어렵고 그래서 운송비는 상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로 인한 부품 부족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업종은 자동차다. 자동차 뉴스매체인 AFS에 따르면, 2022년에 차량용 반도체 부족으로 생산 차질을 빚는 자동차가 전 세계적으로 108만 대에 이를 것이고 이는 올해 1월의 예측치에 비해 2월에 더 늘어났다고 지적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초기에 많은 기업들이 수요 감소를 예상하여 생산을 줄였다. 그리고 수익을 극대화하는 적시생산(Just-in-time) 체계 때문에 코로나19 팬데믹이 2년을 지속하면서 공급망의 차질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따라서 공급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코로나19 팬데믹을 완전히 극복하고 이전과 같은 생산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경제 전문가들이 올해 하반기에는 코로나19 팬데믹을 통제 가능한 수준이 될 것이므로(사실이 아니라 기대다) 하반기에는 인플레도 잠잠해질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그런데 연준이 3월에 금리를 인상하려는 것은 잘못된 진단에 기초한 최악의 처방이 될 수 있다. 인플레의 원인은 공급 부족 때문인데, 미 연준은 금리를 인상함으로써 수요를 억제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이 종종 제기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기준금리 인상은 경기를 더욱 침체하게 만들 것이다. 실물 경제의 이윤율이 낮은 상황에서 금리 인상은 부실 기업들의 위기를 부를 수 있다. 또한 부채가 많은 가계들도 고통에 빠질 것이다. 한국은행이 지난해 11월과 올해 1월에 기준금리를 0.25퍼센트포인트씩 올리면서 은행들은 사상 최대의 수익을 올리고 있지만 가계부채가 많은 이들의 고통스런 아우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화폐적 현상?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자신들의 정신적 지주로 여기는 통화주의자 밀턴 프리드먼은 1963년에 이렇게 말했다. “인플레이션은 어디에서나 항상 화폐적 현상이다.” 프리드먼처럼 통화 공급과 인플레이션 사이에 연관이 있다는 아이디어는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다른 조건이 변하지 않을 때) 어떤 재화가 많아지면 그 재화의 가격이 하락하듯이, 화폐도 많이 공급되면 그 화폐의 가치도 하락한다는 것이다. 이런 아이디어를 화폐수량설이라고 한다.(화폐수량설에 대한 쉬운 설명은 본지의 ‘인플레이션 우려, 어떻게 봐야 할까?’(2021년 6월 9일치) 기사를 참고하시오.)
통화량과 물가의 관계에 관해서는 어빙 피셔가 제시한 화폐방정식 PT = MV이 유명하다. 여기서 P는 물가수준, T는 상품 거래량, M은 통화량, V는 화폐의 유통속도를 의미한다. 어떤 재화가 팔린다면 그 재화의 가격만큼 화폐가 움직이기 때문에 화폐방정식은 항상 항등식이다. 하지만 이 항등식에서 논쟁이 되는 것은 M이 증가하면 P가 상승하는가 하는 문제와 이 방정식에서 독립변수(주도적인 요소)가 어느 쪽인가 하는 점이다.
통화주의자들은 경제는 항상 완전고용이 이뤄지고 국내총생산이 잠재적 역량의 최대치를 보여 주기 때문에 경기 부양 같은 통화량 증가 조처들은 국내총생산을 늘리지는 못하고 다만 물가 상승만 초래한다고 본다. 그래서 통화량(M)을 늘리면 상품 거래량(T)은 늘지 않고 물가수준(P)만 증가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오판하고 있는 것은 화폐의 유통속도(V)가 일정하다는 가정이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마이클 로버츠의 조사를 보면, 2020년 6월경 화폐의 유통속도가 급격하게 하락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2020년 초반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에 많은 돈들이 시장에 풀렸지만 산업생산을 촉진하는 데 사용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시중에 풀린 그 많은 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바로 은행이나 금융기관들의 잔고로 들어갔고, 이 돈들이 시중에서 유통되지 않아 화폐의 유통속도가 급격하게 하락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화폐가 산업 생산에서 빠져나와 유통되지 않는 현상을 ‘화폐의 축장’이라고 불렀다.
우익 이데올로그들은 시중에 풀린 자금 중 일부가 노동자들에게로 갔고 그래서 재난지원금 등으로 노동자들의 저축이 많아졌으며 그 결과 노동자들은 일을 하기보다는 휴가를 즐기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자신들의 저축을 늘렸을 법한 쪽은 노동자들이 아니라 고소득자와 은퇴한 부자들이다.
이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저소득 노동자와 실업자 그리고 일시 해고 노동자들은 코로나19 동안에 이전의 저축을 까먹으며 생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억제된 수요가 원인?
통화주의자들이 통화량 증대를 인플레이션의 원인으로 지목한 반면, 주류 케인스주의자들은 ‘과도한 수요’를 인플레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파이낸셜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마틴 울프는 “중앙은행이 해야 할 일은 인플레 기대치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임금과 물가의 나선형 구조를 막는 것이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통화 정책을 타이트하게 유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임금 상승이 인플레를 유발시켰다는 증거는 없다(노동자의 임금 인상이 물가를 상승시킨다는 주장은 늘 존재해 왔다. 마르크스는 《임금, 가격, 이윤》에서 이런 주장을 낱낱이 반박했다. 최근의 논의로는 본지 ‘최저임금 인상이 물가 상승과 일자리 감소를 낳나?’(2018년 2월 7일치) 기사를 참고할 수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오히려 하락했다. 코로나19 이전 20년 동안 미국의 국내총생산은 연평균 2퍼센트 증가하는 동안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0.4퍼센트 증가하는 데 그쳤다. 이는 자본가들의 이윤 증가가 국내총생산 증가보다 더 높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현재 ‘억눌린 수요’ 또는 ‘보복 소비’를 할 수 있는 주체는 자본가들이다. 그리고 이들의 소비는 대체로 개인적 소비가 아니라 생산적 소비, 즉 투자다. 시장경제의 관점에서 보면 투자의 과열이 진행되고 있다면 금리를 인상해 이를 억제하는 게 물가를 떨어트리는 데 효과적일 수 있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이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기업의 예상 수익률, 즉 이윤율은 결코 높지 않다. 이처럼 실물경제의 활력이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금리 인상은 불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 1970년대 후반 미국의 연준 의장 폴 볼커는 인플레를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20퍼센트까지 인상했고, 그 결과 1980~1982년의 심각한 경기 후퇴를 초래했다.
미국 연준이 올해 기준금리를 얼마만큼 올릴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현재 인플레에 대한 논의는 그릇된 진단과 실패한 처방이 될 공산이 크다. 미국 연준의 금리 인상이 신호탄이 돼 각국 중앙은행들도 기준금리를 인상하게 될 것이다.
전 세계적 차원에서 기준금리 인상이 신흥국 시장에 투자된 달러의 선진국 환류 등으로 취약한 신흥국 경제를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다. 또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실업자로 전락하거나 소득이 줄어든 노동자들, 그리고 치솟는 집값 때문에 주택담보대출이 크게 늘어난 서민들에게는 기준금리 인상은 고통스런 정책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