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의 ‘혁명적 패배’ 전술이란 무엇인가?
〈노동자 연대〉 구독
오늘날 우리는 제국주의 강대국들 간 갈등이 첨예해지는 시기를 살고 있다. 세계 최대 군사 동맹인 나토는 이번 정상회의에서 “국가 간 위협과 열강 간 경쟁의 귀환을 특징으로 하는 세계”에 대응해 러시아·중국을 겨냥하는 새 ‘전략 개념’을 채택했다.
강대국들 간 갈등이라는 면모는 우크라이나를 둘러싸고 서방과 러시아가 충돌하는 동유럽에서뿐 아니라, 미·중 갈등이 날로 첨예해지는 동아시아에서도 두드러진다.
이런 상황에서, 한쪽 제국주의 세력(러시아와 중국)에 맞서는 다른 쪽 제국주의 세력(미국과 서유럽 동맹국들)을 “권위주의에 맞선 민주주의 동맹”이라 보고 이들은 지지해야 한다는 입장이 국내외 좌파 일각에 있다. 이런 주장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미국과 그 동맹국들(한국 포함)의 지원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약 100년 전 제1차세계대전 중에도 좌파들 사이에서 비슷한 태도가 있었다. 당시 독일 사회민주당(SPD)은 전쟁 전까지만 해도 반전(反戰) 입장을 내세웠지만, 막상 전쟁이 발발하자 독일의 군국주의에 대한 반대를 철회하고 전쟁 공채 발행에 찬성했다. 청년들이 참호에서 속절없이 희생되는 데 일조한 심각한 배신이었다.
전쟁과 그 원인
영국·프랑스·러시아 등과 독일·오스트리아 등이 맞붙은 제1차세계대전은 그때까지 세계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유혈낭자한 전쟁이었다. 전쟁 사망자만 약 1000만 명에 이르렀다.
러시아 혁명의 리더 레닌은 이 전쟁이 “제국주의 전쟁이고, 자본주의가 최고의 발전 단계에 이른 시대 상황의 결과”라고 봤다.
자본주의하에서 자본가들은 이윤을 위해 끊임없이 서로 경쟁한다. 그런 경쟁이 진행될수록 자본들은 한 나라 수준을 넘어 국제적 규모로 성장하고, 경제적 경쟁뿐 아니라 자국 국가기구(의 무력)에 의존해서도 경쟁하게 된다. 그러는 동안 국가기구도 자국 자본주의의 발전을 고취해 타국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애쓴다.
바로 이렇게, 자본 축적의 동력인 경쟁이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세계 지배를 두고 벌이는 각축전과 교차된다. 레닌은 이렇게 경제적·지정학적 경쟁이 교차하는 체제를 제국주의라고 했다. 그리고 제국주의가 제1차세계대전의 진정한 원인이라고 강조했다.
여기에는 중요한 함의가 있다. 전쟁을 끝내려면 자본주의에 도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토대가 그대로 지속되는 한 제국주의 전쟁은 제국주의의 ‘평화’, 즉 금융자본이 약소국과 소수민족을 억압하는 체제의 확대·강화로 귀결될 뿐이다.”
전쟁의 근본 원인에 도전하지 않는 한, 강대국들이 세계를 두고 벌이는 쟁탈전은 얼마든지 반복될 터였다.
모든 교전국의 노동계급은 그런 쟁탈전에서 볼 이득이 없다. 따라서 계급투쟁이라는 무기를 사용해 전쟁과 그 원인인 자본주의, 이 모두에 도전해야 한다고 레닌은 강조했다.
“100명의 노예를 소유한 노예주[독일]가 200명의 노예를 소유한 노예주[영국·프랑스·러시아 등]를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고 상상해 보라. 여기에 ‘방어적 전쟁’, ‘조국 방위 전쟁’ 같은 표현을 적용하는 것은 역사적 잘못일 것이며, 현실에서는 영악한 노예주가 평범한 사람들을 상대로 치는 사기일 뿐이다.”
따라서 레닌은 이렇게 주장했다. “교전국의 부르주아지들을 모두 악당으로 규정해야 하고, 모든 나라의 제국주의 부르주아지가 패배하기를 바라야 한다.”
동시에, “모든 교전국의 사회주의자들은 ‘자국’ 정부의 패배를 바란다고 분명히 주장해야 한다.”
자신들의 “강도질”을 위해 자국민에게 전쟁에 나서라고 대놓고 말하는 지배자들은 없다. 모든 지배자들은 적국의 호전성과 공격성, 야만성을 비난하며 그에 맞서 ‘민주주의’나 ‘정의’를 위해 싸우라고 하거나, ‘우리’ 나라를 지키자고 주장한다.
예컨대 독일은 러시아 차르의 전제정에 맞서는 것이라고 했고, 영국·프랑스는 독일의 확장주의·군국주의에 맞서 정당방위 전쟁을 벌인다고 주장했다.
실제로는 세계의 나머지 부분을 두고 벌이는 악당들의 지배권 쟁탈전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당시 독일 사민당은 자국 지배자들이 차르 제국을 상대로 군사적 승리를 거두는 것이 “차악”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방침은 독일 “부르주아지의 정의”에 따르는 입장이라고 레닌은 비판했다.
반면 교전국 노동계급 대중에게 “자국 정부의 패배는 정부를 약화시키고, 자국의 억압을 받는 소수민족의 해방을 촉진하고, 지배계급에 대항하는 투쟁을 고무할 것”이라는 게 레닌의 관점이었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이 “모든 나라에서 우선해야 할 것은 바로 그 국가의 국수주의에 맞서 싸우는 것, 자국 정부에 대한 증오를 일깨우는 것”이지, “더 젊고 더 강력한 강도(독일)가 과식한 늙은 강도를 털도록 돕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주장은 제국주의 강대국들 중 어느 한쪽이 승리하는 게 낫다는 차악론이 아니었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차르 전제정에 대항하고, 독일 노동자들은 카이저(독일 황제)에 대항하자는 것이었다.
그로써 “교전 당사국 모두의 노동자들의 연대를 고취해 부르주아지에 맞선 내전을 공동으로 벌이는” 것이다.
레닌은 “‘합병 없는 평화’가 아니라 오두막을 위한 평화, 왕궁에 대항하는 전쟁! 프롤레타리아와 근로 민중을 위한 평화,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전쟁!”이 구호가 돼야 한다고 했다.
그런 투쟁을 통해서만 제국주의 전쟁을 낳는 진정한 원인인 자본주의 체제를 철폐하고 그 체제의 지배자들을 무장 해제시킬 수 있다.
반면, “교전국 각국의 사회주의자들이 모두 자국 정부의 패배를 바라야 한다는 생각을 ‘어처구니없고 이상한’ 것으로 여기는” 독일사민당의 견해는 “정부들이 시작한 전쟁은 정부들 사이의 전쟁으로 끝나야만” 하지, 계급투쟁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게 될 터였다.
현실
제국주의 전쟁을 자국 지배자들을 패퇴시키는 계급투쟁으로 전환시킨다는 레닌의 혁명적 패배 전술은 진정으로 혁명적인 반제국주의자들과, ‘사회애국주의자들’, 그리고 말로는 전쟁에 반대한다면서도 실천에서는 자국의 전쟁을 묵인한 평화주의자들 사이에 뚜렷한 선을 그었다.
레닌이 이런 입장을 발표했을 때 이를 지지한 것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레닌은 이 노선을 제1차세계대전 내내 고수했고, 이것은 러시아 혁명과 독일 혁명으로 현실에서 올바름이 입증됐다.
전쟁 초기에는 자국의 전쟁을 지지하는 애국주의 광풍이 대세인 듯이 보였다(러시아보다는 특히 독일에서). 하지만 전쟁이 지속되면서 그런 분위기는 점점 달라졌다. 전쟁의 참상에 대한 환멸과 분노와 함께, 궁핍·혼란 등 노동계급 생활수준 하락이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1916년 가을이 되면 여러 나라에서 노동계급이 주로 여성들을 중심으로 생계비 위기에 대한 항의를 벌이기 시작했다.
바로 이렇게 노동계급이 러시아와 독일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자국 정부에 맞서 혁명을 (각각 1917년 말과 1918년 말에) 일으킨 덕분에 제1차세계대전은 종결됐다. 자국 정부의 승리가 ‘차악’이라고 한 사회민주주의자들 때문이 아니라 말이다(그들은 현실의 사태 전개에 무력했다).
물론 지금 벌어지는 제국주의 간 충돌이 제1차세계대전 당시와 똑같은 것은 아니다. 예컨대 지금 강대국들이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고 있지는 않다(비록 일부 좌파가 우크라이나를 ‘식민지’라고 부정확하게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하지만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 갈등은 핵심적 측면에서 제1차세계대전 당시와 뚜렷한 공통점이 있다. 바로 제국주의 강대국들 간 충돌이라는 점 말이다. 미·중 갈등은 물론이거니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에서도 제국주의 간 충돌이라는 면이 점점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또, 전쟁이 경제 위기와 겹치며 대중의 생활고를 악화시키고 있다는 점에서도 뚜렷한 공통점이 있다.
따라서 전쟁과 그 원인인 자본주의 체제 반대 투쟁을 연결시킨다는 레닌의 입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래서, 레닌이 당시 사회주의자들에게 촉구했던 것처럼, “대중이 이런 [혁명적] 정서를 의식하고 그 의식을 심화하고 분명히 표현하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레닌은 말했다. “그런 강력한 혁명 운동이 불타오를 때가 강대국들이 벌이는 제국주의 전쟁의 첫 번째 전쟁 때일지 두 번째 전쟁 때일지, 그 전쟁들의 와중일지 후일지 예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어떤 경우이든지 우리가 짊어진 임무는 이 방향으로 체계적이고 일관되게 활동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