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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자본주의 운동의 오늘

1999년 11월, 시애틀에서 벌어진 대규모 반자본주의 시위 이래로 6년이 지났다. 그리고 2003년 2월 15일 국제적 반전 시위가 있은 지 거의 3년이 다 돼 간다.

시애틀에서 뚜렷이 드러난 급진화의 궤적을 전체적으로 평가해 보기에 충분한 시간이 지났다. 이 시기와 1990년대를 비교해 보면 그 차이는 명백하다.

1990년대에 우리가 목격한 것은 냉전의 종식과 스탈린주의 체제의 붕괴였다. 그것은 이미 진행중이던 신자유주의 공세를 강화했고, 좌파들 사이에 심각한 사기저하를 불러왔다.

그러나 소련의 붕괴는 결코 반혁명도, 자본주의의 부흥도 아니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의 이행이었을 뿐이다. 또한 자본주의 체제를 뒷받침하는 토대는 취약하기 짝이 없었다. 체제의 위기와 저항의 촉발을 불러올 심각한 균열이 존재했다.

우리는 이것을 1994년 멕시코 치아파스 봉기와 1995년 프랑스 공공부문 노동자 파업에서 처음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런 움직임들은 신자유주의와 오늘날 계속되고 있는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대중적 저항의 물결이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저항의 세 주요 거점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는 라틴아메리카이다. 이 곳에서 우리는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가장 앞선 형태들을 목격할 수 있다. 이 저항은 선거에서 일련의 중도좌파 정부들이 당선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최근의 사례로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의 승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저항의 거점은 이라크이다. 이라크에서 벌어지는 점령 반대 투쟁은 정치적으로 라틴아메리카만큼 발전해 있지는 못하다. 그러나 이 저항은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전선을 형성하고 있다. 이라크인들의 저항은 미국을 결코 승리할 수 없는 전쟁에 묶어둠으로써 전 세계의 여러 운동들이 전진할 수 있도록 절묘하게 공간을 만들어 주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는 미국과 신자유주의에 맞선 라틴아메리카 저항의 상징을 자처하고 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는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베네수엘라인들의 대중적 지지가 존재한다는 점, 둘째, 고유가 덕택에 그가 대중에게 실질적인 개량을 제공할 물자를 얻을 수 있다는 점, 마지막으로 [베네수엘라 우익에 대한] 미국의 지원이 중단된 점.

셋째 지역은 유럽이다. 지난해 우리는 신자유주의 의제의 심각한 패배들을 연이어 목격할 수 있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 국민투표에서 신자유주의적인 유럽헌법이 부결된 것은 명백히 좌파적인 이유에서였다.

독일 총선의 결과는 양대 정당 ― 사회민주주의 정당(사회민주당 SPD)과 보수 정당(기독교민주연합 CDU) ― 의 패배를 보여 준다. 그들은 총선 후 ‘대연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이 총선에서는 좌파당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이 운동들은 모두 낙관이 팽배하던 초기 국면을 넘어서고 있다. 그런 초기 국면에서 유력한 사상은 몇몇 형태의 자율주의였다. 자율주의는 사회운동이 정치에서 독립적이어야 하며, 정당과 거리를 둬야 한다는 사상이다.

운동의 요구들을 표현할 수 있는 정치적 대안이 어떤 것으로 나타날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정치적 대안으로 여겨지던 세력들 가운데 일부는 운동을 사회적 자유주의와 주류 정치 쪽으로 되돌리려 한다 ― 예컨대 브라질의 룰라 정부와 아르헨티나의 키르히너 정부가 그렇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사회적 자유주의와 단절하고 대안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는 새로운 급진좌파 정치조직들도 여럿 있다. 포르투갈의 좌파블록, 독일의 좌파당, 브라질의 사회주의와자유당, 영국의 리스펙트 등은 그 중요한 사례들이다.

이 새로운 좌파 조직들의 장점 가운데 하나는 조직이 매우 느슨하다는 점이다. 이 조직들의 미래는 전통적으로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지지하던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에 달려 있다. 이것이 바로 이러한 사람들과 함께할 개방적인 체계와 조직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다.

이러한 개방성은 개량주의 쪽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강력할 수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가 이러한 조직들 안에서 혁명적 조직을 청산하려 해서는 안 된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역동적인 급진좌파가 발전하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한다. 그러나 개량인가 혁명인가 하는 논쟁들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번역 조명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