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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지경으로까지 나아간 슬라보예 지젝

8월 29일자 〈한겨레〉 신문에 실린 지젝의 글

8월 28일 〈한겨레〉에 지젝의 글 “두 개의 식민화 사이에서”가 실렸다. 그 글에서 지젝은 우크라이나가 서방의 지원에 기대어 승리를 거둔다면 “우크라이나를 자신의 경제적 식민지로” 만들려는 서방의 거대한 압력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인들이 단지 그런 결과를 위해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서방이 주도한 신자유주의가 평범한 우크라이나인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는 지젝의 지적은 옳다.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를 거기에 대항하는 자로 그린 것은 틀렸지만 말이다. 젤렌스키는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분노와 변화 염원을 업고 대통령에 당선했지만 금세 그 염원을 배반했고, 이미 지난해 그의 지지율은 바닥을 기고 있었다.

그러나 지젝은 이렇게 서방을 비판하면서도, 우크라이나가 서방의 경제적 식민지가 되는 편이 러시아의 식민지가 되는 것보다는 그래도 낫다고 주장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러시아를 패배케 하는 것을 더 시급한 과제로 제기한다.

물론 러시아는 철군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침공에 저항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서방은 이 상황을 이용해 대리전을 벌이며 그 자신의 제국주의를 강화하고 상황을 위험하게 만들고 있다.

그럼에도 지젝은 전쟁의 이러한 측면에 관해서는 침묵한 채 푸틴을 현 시기의 최대 악으로 묘사하고 서방의 개입을 좌파적으로 포장하는 글을 그동안 꾸준히 써 왔다.

예컨대 6월 21일 〈가디언〉지에 기고한 글(“평화주의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잘못된 대응이다”)에서 지젝은 푸틴을 기후 변화같은 전 지구적 재앙에 대한 대응을 가로막는 주된 적으로 지목하며, 우크라이나의 승리를 위해 “더 강력한 나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비록 미국의 패권 추구 수단으로서의 나토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서둘러 단서를 달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나토를 미국의 패권 추구와 분리하려는 시도는 가소롭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영향력은 나토의 본질 그 자체다. 나토 군비 지출의 절반 이상을 미국이 차지하는 현실만 봐도 그렇다(나토의 추산에 따르면 올해 그 비중은 68퍼센트일 것이다). 나토의 확장은 미국이 냉전 이후에도 유럽의 동맹국들을 자신의 영향력하에 묶어 놓고 옛 소련 주변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해 추진된 것이다.

지젝이 나토 강화를 말하는 맥락은 유럽이 미국으로부터 “자율적인 행위자”가 돼야 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나토 강화는 유럽 자체의 군비 증강과 군국주의 강화를 뜻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유럽이 나름의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은 프랑스 대통령 마크롱을 비롯한 일부 유럽 지배자들 사이에서도 꾸준히 나왔다. 그들이 미국 지배계급과 항상 이해관계가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젝의 주장은 미국 제국주의와 러시아 제국주의 사이에서 유럽 제국주의를 옹호하자는 것이다.

이는 유럽연합이 미국이나 러시아·중국의 지정학적 블록에 맞서는 진보적인 세력이 될 수 있다는 많은 좌파의 환상을 공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동안 지젝은 유럽연합을 옹호하는 신자유주의적 중도의 위선을 꼬집으면서도 그것을 모종의 유일한 대안처럼 제시해 왔다. 지젝은 유럽연합이 국제 자본주의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초국가적 기구라며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에 반대했고, 유럽연합의 단결을 해친다는 이유로 카탈루냐 독립에도 반대한다.

2년 전에 한 강연에서 지젝은 “유럽은 권위주의적 자본주의로 향하는 오늘날의 보편적 경향에 부합하지 않는 골칫거리가 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유럽 각국 또한 경제 위기와 정치 위기 속에서 지난 몇 년간 경찰력과 국가 기구를 강화해 왔다(가령 프랑스의 보안법).

비록 미국의 군사력에는 훨씬 못 미치지만 유럽연합은 지젝이 제시한 이미지와 달리 어떤 순진하고 수동적인 세력이 결코 아니다. 유럽연합을 주도하는 프랑스·독일 등도 나름의 제국주의적 이해관계가 있는 세력이다.

가장 일관된 자율주의자로 유명한 네그리도 진보적 대안으로서의 유럽이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미국에 점점 매이는 처지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최근 주장했다. 그런 취지에서 그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을 (이전의 민스크 협정*과 같은) 평화협정을 이끌어 내는 지렛대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네그리에게 미안하게도, 우크라이나가 강대국 간 패권 경쟁 무대가 되고 우크라이나 지배자들도 그런 상황을 이용하려 들면서 민스크 협정은 전쟁을 전혀 막지 못했다.

그러나 지젝은 그런 무력한 평화협정마저 반대하며 나토 강화를 주장한 것이다.

급진 철학자답게 지젝은 여전히 서방을 비판하고 그 지배자들의 위선을 날카롭게 꼬집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현재 미국과 동맹국들이 벌이는 제국주의 게임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젝의 비판은 결국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유럽의 제국주의적 개입을 좌파적으로 포장하는 효과를 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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