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절라 데이비스의 《여성, 인종, 계급》 한국어판 출판을 환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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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관점에서 쓴 미국 흑인 여성 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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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흑인과 여성 해방 운동의 투사이며 혁명가이자, 살아 있는 저항의 아이콘으로 여겨지는 앤절라 데이비스의 대표작 《여성, 인종, 계급》이 한국어로 번역·출간됐다. 이 책은 1981년 미국에서 처음 출간되고 수없이 재인쇄된 고전이다.
데이비스의 이 책은 최근에 급진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이 커져 온 상황에 맞춰 적절하게 나왔다. 출판된 지 열흘밖에 안 됐지만 벌써 많이 팔렸다.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낯설 수 있는 만큼, 앤절라 데이비스의 삶을 먼저 살펴보는 게 의미 있을 것이다.
앤절라 데이비스의 삶
데이비스는 1944년 앨라배마주 버밍엄에서 태어나 자랐다. 버밍엄은 인종차별 테러가 횡행해 ‘다이너마이트 언덕’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였다. 그의 어린 시절은 인종차별, 폭력, 저항으로 점철돼 있었다.
데이비스는 고등학교 역사 수업 때 사회주의 사상을 처음 접하고 완전히 매료됐다고 한다.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으면서 “괴롭혀 왔던 대답할 수 없는 많은 딜레마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 무렵 그는 공산주의 청년단체에 가입해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1960년대 말에는 미국을 한껏 달군 흑인 인권 운동에 적극 뛰어들었다. 더구나 혁명적 흑인 해방 운동 단체 흑표범당과 (혁명적 단체는 아니었지만) 공산당에도 가담했다.
1969년 공산당원이라는 이유로 그가 UCLA 교수직에서 해임됐을 때(당시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유명한 로널드 레이건이었다) 1500명 이상의 학생이 파면당한 데이비스의 강의에 수강신청을 하며 연대를 표했다.
1970년 그는 총격 사건에 연루돼 ‘FBI 긴급수배 명단’에 오르고 수감됐다. 당시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그의 석방을 위한 운동이 조직됐다. 존 레논과 오노 요코 등이 그를 위한 곡을 헌정하기도 했다. 그는 18개월 만에 무죄 평결을 받았다.
당시 데이비스의 수감은 흑표범당 탄압이 고조되는 가운데 일어난 일이었다. 데이비스의 자유는 모두를 위한 승리로 여겨졌다.
오늘날에도 그는 여전히 저항의 상징이다. 그는 2003년 이라크 전쟁 반대 운동,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에도 적극 참가했다.
2017년 도널드 트럼프의 취임에 반대해 100만 명이 참가한 시위를 이끈 ‘여성 행진’의 공동 의장이었고, 트랜스젠더 권리를 한결같이 옹호해 왔다(그는 커밍아웃한 레즈비언이다).
2020년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M) 투쟁에도 노구를 이끌고 동참했다.
미국의 흑인 여성 운동사
《여성, 인종, 계급》에도 저자의 이런 급진적인 면모가 반영돼 있다.
이 책은 노예제 시기부터 1970년대까지 흑인 여성들의 경험과 투쟁의 역사를 다룬다. ‘미국의 흑인 여성(운동)사’라고 할 만하다.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흑인 여성들의 숨겨진 투쟁 역사를 드러내고, 그 안의 여러 쟁점을 다룬다.
이 책은 관찰자가 아닌 투사로서 역사를 서술한다. 그래서 굉장히 감동적이고, 재치도 있다. 또 논쟁적이고, 때로 칼로 베는 듯 날카롭다.
책 곳곳에서 데이비스는 역사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단호한 소수의 활동을 조명하고 그 의의를 감동적으로 짚는다. 1830년대에 노예제와 여성 차별을 단단하게 연결시킨 그림케 자매, 린치 위험을 각오하고 노예제 반대 연설에 나선 여성들, 수감을 감수하면서 흑인 여성들을 교육한 프로던스 크랜들이나 마거릿 더글러스, 1851년 오하이오 애크런에서 열린 여성대회에서 백인 여성 지도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라는 유명한 연설을 한 소저너 트루스와 동료들 등.
미국 노동운동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며 흑인 여성을 조직하고 성차별과 인종차별에 맞선 공산주의 여성들(루시 파슨스, ‘마더’ 메리 존스, 엘리자베스 걸리 플린 등)을 조명하는 10장도 귀중하다.
또, 데이비스는 19세기의 마지막 20~30년과 20세기 초에 미국에서 첨예한 계급 분화가 일어난 뒤 백인 중간계급 여성운동이 어떻게 인종차별, 이주민 혐오와 때로 제국주의와도 타협해 갔는지의 과정도 날카로운 비판과 함께 상세히 다룬다(4장, 7장).
그리고 이런 경향이 현대(집필 당시는 1970년대) 여성운동에도 이어지고 있다고 꼬집는다. 예컨대 흑인에 대한 잔혹한 린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등장한 이데올로기인 ‘흑인 강간범 신화’를 재생산하는 급진 페미니스트 수전 브라운밀러를 비판한다(11장). “인종주의에 맞서는 치열한 도전과 성차별주의에 맞서는 필수적인 투쟁을 시급하게 통합할 필요를 백인 여성들에게 알리지 못한 브라운밀러의 패착은 오늘날의 인종주의 세력에게 중대한 호재이다.”
현대 여성운동의 다른 쟁점도 다루고 있다. 1970년대 미국 낙태권 운동을 이끈 중간계급 백인 지도자들이 인종차별 문제를 무시했다고 지적하고, ‘가사노동에 임금을[지급하라]’ 운동의 이론적·정치적 오류도 짚는다(12장과 13장).
교차 페미니즘의 고전?
오늘날 이 책은 종종 여성, 인종, 계급 간의 교차성을 설파한 책의 하나로 여겨지곤 한다. 한국판의 해제를 쓴 정희진 씨도 이 책을 “교차 페미니즘의 고전”으로서 중요하게 자리매김한다.
교차성 개념은 개인들이 겪는 차별의 경험에서 젠더, 섹슈얼리티, 인종, 계급, 장애 등 여러 차별이 교차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개념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착취(계급)를 여러 차별 중 하나로 보지, 이 사회의 근본적 관계이자 힘의 원천으로 여기지 않는다.
물론 이 책은 젠더, 인종, 계급이라는 여러 차별이 동시에 작용하고 때로 그 사이에 긴장이 있음을 보여 준다.
하지만 데이비스는 분명하게 여기서 더 나아간다. 그는 인종차별과 성차별주의를 (독점)자본주의와 관련 짓고, 무엇보다 계급을 중시한다. “노동하는 여성들은 사회주의 투쟁에 특수하고 필수적인 이해관계가 있다.”(358쪽) (다만, 이 대목에서 그는 당시 미국 공산당이 그랬듯이 소련을 ‘사회주의 국가’로 오해하는 듯하다.)
정희진 씨가 해제의 말미에 “이 책의 전반적 ‘정서’가 흑인 페미니스트 입장이라기보다 1980년대 마르크스주의 여성주의자의 입장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마뜩잖은 투로) 말한 것은 참말이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야말로 다양한 차별의 근원과 작용 방식, 나아가 해방의 전망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다.
물론 이 책에 인종차별과 여성 차별이 자본주의에서 어떻게 유지되는지에 대한 이론적 분석이 충분히 전개되고 있진 않다. 그럼에도 계급적 관점의 역사 서술, 노동계급과 공산주의 여성들의 활동 중시, 마르크스·엥겔스·레닌의 견해의 우호적 인용, 무엇보다 저자 자신의 생애를 보자면, 이 책은 분명 한국의 여느 “교차 페미니즘”보다 훨씬 급진적인 함의를 갖고 있다.
〈노동자 연대〉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토니 클리프의 《여성해방과 혁명》의 4장 ‘남북전쟁 이후의 미국 여성운동’을 함께 읽으면 미국 여성운동의 역사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