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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정부에 맞선 학생 저항

1996년 3월 29일 등록금 인상 철회와 김영삼의 대선자금 공개를 촉구하며 동맹휴업에 돌입한 서울지역 14개 대학 1만여 명의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1990년대 들어 등록금은 해마다 두자리 수 인상률로 가파르게 올랐다. 그 해에도 대학들은 평균 14퍼센트 안팎으로 등록금을 올렸다. 잇속 챙기기에 바쁜 사립대학들은 상당한 순이익을 보면서도 재단전입금을 해마다 줄이고 학생과 학부모 들의 고혈을 쥐어짜는 데 여념이 없었다.

한편, 노태우에게 수천억 원의 대선자금을 받아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GNP의 5퍼센트까지 교육예산을 확충하겠다던 대선 공약을 지키지 않았고 대학종합평가제를 도입해 대학의 서열을 매기는 데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학생들의 좌절과 불만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1995년 말에 경원대생 장현구 군이 파행적 학원 운영과 등록금 인상에 반대해 분신했고 서울시립대생 원광식 군이 등록금을 낼 수 없는 처지를 비관해 자살했다.

등록금 인상에 항의하는 집회와 점거농성 등 각 대학에서 투쟁을 시작한 학생들 사이에 연대해 싸워야 한다는 생각이 확산됐다. 한총련은 등록금 인상 철회와 교육재정 확보를 위한 대규모 항의 시위와 동맹휴업을 예고하고 있었다.

3월 29일 서총련 동맹휴업 집회에 경찰은 광포한 폭력으로 대응했다. 시위 당일 경찰의 시위 진압 방식은 공격적이다 못해 살기를 느끼게 하는 토끼몰이식 진압이었다.

학생들이 시위 장소로 가기 위해 종로5가 지하철역을 나오자마자 경찰은 진압봉을 휘둘렀다. 경찰은 학생들의 퇴로까지 모두 막았다.

심지어 뛰다 지쳐 골목으로 피한 학생들까지 쫓아와 최루탄을 터뜨리고 방패로 찍고 진압봉을 휘둘렀다. 이 날 시위현장에서 3백52명의 학생들이 연행됐다.

이런 끔찍한 살인 진압이 노수석 열사를 죽였다. 노수석 열사는 이 날 시위에서 동료 학생들의 투쟁 대오를 방어하기 위해 선봉대에 자원했다.

경찰의 무지막지한 토끼몰이를 피해 달리던 노수석 열사는 함께 시위에 참가한 동료 학생들에게 “나 맞았어. 머리가 아프고 어지럽다”고 여러 차례 호소했다.

계속 백골단과 전경에게 쫓기다 을지로의 한 인쇄소로 몸을 피한 노수석 열사는 경련을 일으키며 통증을 호소했다. 그러나 인쇄소 안까지 쫓아온 백골단은 폭력을 휘두르며 학생들을 모두 연행했다. 학생들과 인쇄소 주인은 경찰에게 “한 학생이 위독하니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고 호소했지만 경찰은 묵살했다. 결국 노수석 열사는 거기서 사망했다.

노수석 열사가 사망하자 분노한 학생들은 다음 날에도 동맹휴업을 이어갔고 거의 매일 거리로 나와 규탄 집회를 열었다.

열사의 시신에 9군데나 피멍이 있었는데도 국과수는 사인을 심장마비에 의한 돌연사라고 밝혔다.

노수석 추모 대책위는 즉각 기자회견을 열어 국과수의 부검 결과를 규탄했고 한총련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있을 때까지 투쟁을 계속 하겠다고 밝혔다.

김영삼 정부는 곧 있을 4·11 총선에 영향을 줄까 봐 투쟁의 구심을 흩어뜨리기 위해 속히 장례식을 치르라고 유가족들을 회유했다. 더구나 방송민주화를 외치며 MBC 노동조합이 전면파업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행여라도 노동자들의 투쟁과 학생들의 투쟁이 만나게 된다면 김영삼으로서는 아찔한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선거에서 신한국당을 참패시키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 추모 대책위는 결국 4월 4일에 장례식을 치르기로 했다.

4월 4일 연세대에 5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열린 장례식에서 1천여 명의 학생들은 정문에 연좌해 운구행렬을 막았다. 학생들은 “이대로는 수석이를 보낼 수 없습니다” 하고 무릎 꿇고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다른 학생들도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며 함께 연좌농성을 벌였다. 결국 대책위는 장례식을 무기한 연기했다.

장례식이 연기되자 5천여 명의 학생들은 거리 시위를 벌이며 정부를 규탄하고 시민들에게 투쟁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김영삼 정부 들어 언론은 ‘신세대론’을 들먹이며 “신세대들은 투쟁에 관심없고 개인주의적”이라고 입버릇처럼 묘사했다. 바로 그 ‘신세대’들이 투쟁 속에서 진정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보여 준 것이다.

날마다 거리에서는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4월 6일에는 정부를 규탄하며 경원대 진철원 열사가 분신했고 4월 7일에는 등록금 인상 반대와 교육재정 확보를 위해 총장실을 점거하며 단식 투쟁을 벌이던 성신여대 권희정 열사가 사망했다.

4월 10일 한총련의 동맹휴업에 맞춰 열린 장례식에 2만5천여 명이 모여 연세대부터 신촌로터리를 거쳐 종로4가까지 행진했을 때 이 투쟁은 절정에 달했다.

노수석 열사 타살 항의 투쟁은 김영삼의 ‘교육개혁’에 맞선 대중적 저항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줬고 수천 명의 학생들을 각성시켰다. 이 투쟁은 그 해 벌어진 김영삼에 맞선 여러 투쟁들에 커다란 영감을 줬고 결국 그 해 말 벌어진 노동법 개악에 맞선 민주노총의 대중파업으로 김영삼의 정치 생명은 끝이 난다.

노수석 열사가 산화한 지 10년, 노무현의 신자유주의 ‘개혁’은 등록금 1천만 원 시대를 불러왔다. 10년 전 김영삼 정부 하의 학생들이 그랬듯 오늘의 학생들도 노무현의 신자유주의가 우리의 교육받을 권리를 박탈하고 교육 환경을 망치고 있음을 투쟁으로 고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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