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신냉전에 반대한다 — 워싱턴이 벌이는 신냉전과 절멸주의에 관한 노트》:
진영 논리로 제국주의에 맞서기를 주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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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화되는 미·중 갈등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강대국 간 충돌 가능성이 급격하게 높아졌다.
최근 번역·출간된 《신냉전에 반대한다 — 워싱턴이 벌이는 신냉전과 절멸주의에 관한 노트》는 이러한 지정학적 위기에 대한 좌파적 관점을 제시하려는 시도다.
주류 언론과 정치인들은 이 위기가 푸틴의 야심과 민주주의에 대한 중국 지배자들의 공포에서 오는 것처럼 묘사한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들은 미국이야말로 패권을 지키려고 위험천만한 모험을 벌여 온 가장 위험한 제국이며, 그런 모험과 나토 확장을 빼놓고서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옳게 지적한다.
그리고 미국이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어떻게 동맹국들을 결집시키고 중국과의 더 큰 대결을 준비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 준다. 책의 마지막에 실린 《먼슬리 리뷰》 편집자 벨라미 포스터의 글은 핵 재앙까지 기꺼이 감수하려 하는 미국 지배자들의 전략을 파헤친다.
한국을 포함한 친서방 나라의 좌파들에게 서방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책은 철저하게 진영론적인 관점을 드러내고 있다. 저자들은 미국에 대항하는 국가들의 동맹, 그중에서도 특히 중국에 기대를 건다.
저자의 한 명인 존 로스는 “모든 부문에서 중국이 전반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미국에 맞서는 데서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다른 저자들도 대체로 이런 견해를 공유한다.
로스는 중국의 핵무기를 “미국의 핵공격에 대한 확고한 억지력”이며 “방어적” 목적이라고 두둔하기까지 한다.(같은 책에서 벨라미 포스터가 영감의 원천으로 삼는 E. P. 톰슨이 ‘방어적 핵’은 없다며 모든 핵무기의 일방적 폐기를 강조했다는 점은 아이러니이다.)
저자들의 이런 진영 논리에는 우선 분석상의 문제가 있다. 바로 제국주의를 미국의 지배로 환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적 제국주의론을 체계적으로 제시한 레닌과 부하린은 제국주의가 여러 강대국의 경쟁 체제임을 강조했다.
레닌과 부하린에게 제국주의란 자본주의 발전의 결과로, 규모가 커지고 국제적 경쟁을 벌이는 기업들이 국가와 융합하면서 벌어지는 국가 간 경쟁이었다. 레닌 이후 제국주의의 구체적 양상은 변화했지만 이러한 핵심은 여전히 유효하다.
저자들은 오늘날 미국이 과거만 못한 경제적 우위를 군사력으로 만회하려 해 왔다고 옳게 지적한다. 이는 오늘날 경제적 경쟁과 지정학적 경쟁이 결합되는 주된 양상의 하나다.
그런데 저자들은 마치 두 경쟁을 분리할 수 있는 것처럼 취급하기도 한다. 그런 가정은 군사적 경쟁과 경제적 경쟁을, (미국이 추구하는) 호전적 경쟁과 (중국이 이기고 있다는) 평화적 경쟁으로 종종 대비시키는 데서 드러난다. 제국주의는 마치 중국의 경제 성장과 교역 확대에 따른 평화적인 “유라시아 통합”이라는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려는 미국 지배자들의 호전적인 정책처럼 묘사된다.
이런 분석은 자본주의의 경쟁적 축적 동학과 전쟁을 분리시키려 한다는 면에서는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론과도 통한다. 레닌의 제국주의론은 정확히 이런 주장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미·중 갈등은 중국이 자신의 경제적 지위에 걸맞는 군사력과 지정학적 영향력을 갖추려고 하면서 벌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중국 지배자들 또한 미국과 같은 제국주의 경쟁의 플레이어인 것이다. 그들은 이 경쟁적 축적 체제 자체에 도전할 생각이 없다.
중국이 미국과는 뭔가 다른 진보적 질서를 대표한다는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중국은 자국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을 억제하고 서방 다국적기업들과도 손잡고 경제를 성장시켜 왔다.
미국이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독재 정권도 얼마든지 용인하고 지원했던 것처럼, 중국도 자신이 진출한 지역에서 이익을 얻으려고 그 지역의 독재자와 얼마든지 협력했다. 중국 광산 회사인 안진과 짐바브웨의 무가베 정권의 관계가 대표적인 사례다. 최근 중국은 사우디 독재자 빈 살만과도 손잡았고, 심지어 무기 제조 기술도 사우디에 제공했다.
반전 운동
저자들은 미국의 반전운동이 극도로 취약하기 때문에 “막강한 외부의 제약”(중국)만이 미국의 전횡을 저지할 수 있다는 현실론을 펴기도 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둘러싼 혼란 때문에 현재 각국의 반제국주의적 반전 운동의 영향력이 미미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반전 운동을 기각하는 게 아니라 그 투쟁을 전진시킬 정치를 제시하는 것이다. “막강한 외부의 제약”에 의지하는 것으로는 그런 정치를 제시할 수 없다.
제1차세계대전은 러시아 병사와 노동자들이 전쟁의 부담을 짊어지기를 거부하고(1917년 러시아 혁명) 독일 병사와 노동자들이 그 뒤를 따름으로써(1918년 독일 혁명) 막을 내렸다. 당시에도 그렇게 되기까지 반전 운동은 한동안 고립되고 주변화돼 있었고 사태 전개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반전 운동이 사태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은 전쟁 반대 정서와 물질적 조건을 둘러싼 노동자들의 투쟁이 만나면서부터였다. 이 만남은 자동적이지 않았고, 제국주의에 일관되게 반대하는 동시에 노동계급에 뿌리를 내리고 둘을 연결 짓기 위해 분투한 혁명적 좌파의 노력 덕분에 가능했다.
중요한 것은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과 계급투쟁을 연결하고 노동계급이 자신의 경제적 힘을 제국주의에 맞서는 데에도 동원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현재 우크라이나 전쟁 또한 노동계급의 생활 수준에 대한 공격과 함께 벌어지고 있다.
이런 연결을 수행하지 못하면 기회만 놓치고 마는 게 아니다. 전쟁에 따른 에너지 위기 등이 첨예한 독일 등지에서는 좌파가 그런 과제를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틈을 타 극우가 반전 세력을 자처하며 득을 보고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 세계 체제가 위기에 빠진 현재, 자본주의 지배자들에 맞선 저항은 소위 ‘진영’을 가리지 않고 벌어지고 있다. 얼마 전 중국 전역에서 일어난 시위도 그런 사례의 하나다.
이 책의 저자들처럼 제국주의를 오로지 국가 간 관계로 환원해 이해한다면, 이른바 ‘반미’ 세력에 속한 나라들에서 벌어지는 노동계급 투쟁을 지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제국주의 양 세력 모두에서 노동계급 투쟁을 발전시키지 못한다면 제국주의에 진정으로 맞설 잠재력을 키울 수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