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감을 부추길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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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캘리니코스는 무하마드 풍자만화 사태가 이슬람 혐오의 증대를 보여 준다고 말한다(지면 제약상 요약 : 전문은 ‘다함께’ 웹사이트 자료실에 실려있다)
갑자기 언론의 자유가 핵심 정치 의제로 떠올랐다. 이것은 무엇보다 덴마크 일간지 〈율란트-포스텐〉이 처음 실은, 예언자 무하마드를 모욕적으로 묘사한 만평을 유럽의 많은 우익 언론들이 다시 게재하면서 촉발된 (무슬림들의) 항의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론의 자유 문제는 영국 나찌 정당 BNP(영국 국민당)의 지도자인 닉 그리핀과 마크 콜렛의 재판에서 핵심 쟁점이기도 하다.
이들은 이슬람을 “사악한 신앙”이라고 말하고 난민들을 바퀴벌레에 비유해 선동죄 혐의로 구속됐다가 지난주에 풀려났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서방 세계에서 이슬람 혐오는 인종차별의 가장 뚜렷하고 또 “유력한” 형태가 됐다.
압도 다수가 아프리카·아시아·중동계인 무슬림들은 역사적으로 영국에서 아일랜드인들이, 미국에서 흑인들이 당한 수치와 굴욕에 시달린다.
무하마드 풍자만화 사태는 이것을 매우 분명히 보여 준다. 덴마크 정부는 십중팔구 유럽에서 가장 우익적인 정부일 것이다.
덴마크 총리 아네르스 포그 라스무센은 이민자들을 끔찍하게 적대하는 덴마크 국민당의 지지 덕분에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또, 덴마크는 이라크 파병국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 〈율란트-포스텐〉이 무슬림을 이중으로 모욕하는 ― 무하마드를 묘사하고 그를 테러리즘과 결부시킨 ― 만평을 실어 “논쟁을 촉발하기로” 결심했다. 포그는 이 만평에 항의하는 아랍계 대사들의 면담 요구를 거부했다.
지난주 이 만평을 다시 게재한 독일의 〈디 벨트〉, 프랑스의 〈프랑스 수아르〉 같은 신문들은 언론의 자유가 “절대적” 가치라는 이유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했다. 이것은 그야말로 쓰레기 같은 주장들이다.
만일 표현의 자유에 제한이 없다면, 신문이 1면에 아동 포르노를 실어도 괜찮다는 것인가? 이런 일을 하면 신문이 기소될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하지 않는 유일한 이유인가? 물론 이 두 질문의 정답은 모두 “아니오”다.
언론의 자유는 민주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다. 그러나 거기에 제한이 있다는 것쯤은 모두 알고 있다.
미국의 연방 대법원이 발전시킨 ‘전투적 발언’ 이론을 보면, “남에게 상처를 주거나 치안 방해를 부추기는” 발언은 미국 수정헌법 제1조가 보장하는 언론의 자유 권리에 포함되지 않는다.
진정한 사회주의자라면 그리핀 같은 파시스트들에게 발언할 기회를 보장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들의 인종차별적 선전은 단지 견해를 표명하는 데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18세기 계몽주의 운동이 유럽을 기독교 신앙에서 해방시킨 역사를 자랑스러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조운 스미스는 〈인디펜던트 온 선데이〉에 기고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 충돌은 문명들 사이의 충돌이 아니다. 그것은 종교의 위상에 관한 계몽주의 이전 사상과 이후 사상 사이의 충돌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궁극적으로 이슬람에 대한 오랜 편견을 재연케 한다. 이런 편견은 이슬람의 복합성과 이슬람이 지배적 종교였던 많은 사회에서 나타나는 문화적 풍부함을 완전히 무시한다.
이런 이미지들은 유럽이 스스로 “기독교권”을 자처하며 선진 이슬람 국가들을 위험한 경쟁자로 인식했던 시기에서 비롯한 것이다.
또, 이들은 프랑스 계몽주의의 지도적 인물이었던 볼테르의 말년과 그가 가톨릭 교회에 맞서 펼친 운동을 많이 인용한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여기에는 비슷한 점이 전혀 없다.
18세기에 서로 다른 기독교 교회들, 즉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는 다양한 유럽 왕조들의 공식 종교였다.
그 교회들은 이데올로기를 독점했고, 국가의 지원을 등에 업고 다른 기독교 종파 구성원들을 끔찍하게 탄압했다. 볼테르가 그랬듯이, 교회에 도전하려면 진정한 용기가 필요했다.
오늘날 유럽에서 이슬람은 구조적 차별과 편견으로 고통받는 가난한 소수의 종교다.
예컨대, 영국의 무슬림들은 모든 사회경제 지표에서 최하층을 차지한다. 네덜란드 의원 아얀 히르시 알리 같은 반무슬림 활동가들은 결코 용감한 영웅이 아니다. 그들은 사회적 약자들을 괴롭히는 국가의 옹호자일 뿐이다.
특히 2001년 9·11 테러 이후 유럽 정부들은 무슬림들에 대해 억압과 통합을 동시에 추진하는 양면 전략을 사용해 왔다. 북유럽의 많은 지역에서는 억압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위협이 우세한 경향이다.
덴마크와 네덜란드는 이런 정책의 전형을 보여 준다. 무슬림 여학생들의 히잡 착용을 금지한 프랑스의 법률도 그런 사례 가운데 하나다.
2월 5일치 〈옵서버〉를 보면, 독일에서 “바덴-뷔르템베르크 주(州) 정부를 운영하는 기독교민주당은 ‘무슬림’ 테스트를 채택했다. 이 테스트는 독일 시민권을 신청한 무슬림들에게 9·11 테러와 동성애에 대한 견해, 그리고 그들의 자녀가 수영 강좌를 들을 수 있게 허용할 것인지 등을 묻는다.” 자유주의의 가치관 얘기는 이제 그만해라.
반면에, 영국 정부는 조금 다른 전략을 추구한다. 이들은 무하마드 풍자만화를 다시 게재한 것을 즉각 비난했다.
지난 7·7 런던 테러 이후 신노동당 정부는 무슬림 지도자들을 달래기도 하고 위협하기도 했다. 정부의 위협은 시민적 자유를 더 억압할 뿐 아니라 무슬림 지역사회가 “테러리즘을 비난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형태를 취한다. 여기서 “테러리즘”은 팔레스타인과 이라크에서 벌어지는 저항 형태 일체를 포함하는 데까지 확대된다.
그러나 정부는 무슬림 지도자들과 협상도 한다. 만일 이들이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낮추면 그 대가로 더 많은 공식적 자문과 인정을 주겠다는 것이다.
논쟁적인 무슬림 신학자인 타리크 라마단은 유럽 대륙에서는 이슬람 극단주의의 이데올로그라고 널리 비난받는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정부 자문으로서 그는 무슬림들이 더 넓은 사회와 “어울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런던 시장 켄 리빙스턴도 영국 무슬림 지도자들을 굴복시키려는 정부의 노력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리빙스턴이 2년 전 노동당에 다시 입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무슬림 지역사회의 큰 신뢰를 받고 있는 이유는 인종차별 반대 경력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지지하고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태도 때문이다.
소규모 급진 이슬람 단체들이 런던의 덴마크 대사관 밖에서 벌인 시위를 비난하는 언론의 압력 때문에, 무슬림 지도자들은 자살폭탄 공격자들과 관계를 끊어야 하고 정부에 결코 반대해서는 안 된다고 느낄 것이다.
이것은 영국과 유럽의 좌파들에게 무거운 짐이 될 것이다. 권력 집단들이 무슬림들에게 제시하는 주요 선택들 ― 침묵, 억압, 또는 이슬람 테러리즘의 종말 ― 외에도 대안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은 우리의 과제다.
특히 이것은 우리가 이슬람 혐오를 거부해야 하고, 최근 벌어지는 언론의 자유에 관한 엉터리 주장에 속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사회주의자라면 마땅히 억압과 착취의 진정한 피해자들을 지지하고 더 나은 세계를 위해 그들과 함께 어깨 걸고 싸워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