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L007 격추 사건 40년:
쿠바 위기에 이어 또 핵전쟁 근처까지 갔던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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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에 비해 훨씬 덜 알려져 있지만, 1983년은 핵전쟁 일보직전까지 갔던 해였다. 대한항공 소속 007편
1983년 9월 1일 KAL기가 사할린 상공에서 소련군에 의해 격추됐다. 한국인 81명, 미국인 55명, 일본인 28명, 중국인 36명 등 16개국 269명의 탑승객 전원이 사망했다. 탑승객 시신은 끝내 유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미국과 소련이 군사적으로 첨예하게 대치하며 사할린 상공에서 치열한 첩보전을 펴고 있었기 때문에 KAL기 격추 사건을 두고 음모설이 난무한다. KAL기가 미국을 위해 첩보 비행을 하고 있었다, 탑승객들이 죽지 않고 사할린 어딘가에 살아 있다 등등.
그러나 KAL기 격추 사건은 북서태평양 지역에서 증대해 온 미·소 간의 군사적 긴장이 낳은 참극이었다.
KAL기는 미국 뉴욕의 존 F. 케네디 공항을 출발해 알래스카의 앵커리지를 경유한 뒤 김포국제공항으로 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KAL기가 정상 항로를 이탈해 소련 영공을 두 차례
불운하게도 KAL기가 진입한 소련 영공 인근 지역은 미·소 간에 살벌한 군사적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었다.
소련은 베링해를 사이에 두고 미국과 마주보는 캄차카반도에 해군력과 방공망을 대대적으로 증강시키고 있었다. 4개의 함대, 2400대의 전투기, 50만 명의 병력이 배치돼 있었다. 소련의 핵잠수함 발진 기지 페트로파블롭스크도 이 지역에 소재했다.
미국은 제7함대가 이 지역을 담당했고, 알류산열도·일본·한국에 해군 및 공군 기지가 있었다. 미국은 1983년 초 이 지역에서 대규모 해상 훈련을 실시했다.
군사적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고 미국과 소련은 치열한 첩보전을 벌였다. 특히 레이더망
KAL기와 비슷한 형태의 보잉기인 RC-135가 그런 첩보 임무를 수행했다. 사건 당일에도 RC-135는 KAL기와 비슷한 시간대에 교대로 캄차카반도를 비행했다.
미국의 첩보 활동에 예민해 있던 소련군이 예정 항로를 이탈한 KAL기를 미군 정찰기로 오인하고 격추했다.
애초 소련 정부는 KAL기 격추 사실 자체를 부인했다. 그러다 미국이 소련군 교신 감청 녹음을 공개하자
그러나 1993년 1월 러시아 정부는 KAL기 블랙박스와 전투기 조종사의 교신 내용을 공개하며 오인 격추가 사건의 진상이라고 밝혔다. KAL기가 단순한 운항 실수로 예정 항로를 이탈해 소련 영공으로 들어갔는데, 소련의 대공부대 사령관은 KAL기가 첩보 비행을 하고 있다고 판단하고는 격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신냉전
KAL기 격추 사건은 신냉전의 절정에서 벌어졌다.
냉전
1970년대에 일시적 해빙기
1981년에 집권한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정부는 소련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확고히 하려고 했다.
당시 미국 국방부 장관 캐스퍼 와인버거는 이렇게 말했다. “핵 억제가 실패하면 미국은 전면적인 핵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최종적으로 생존해야 한다.”
1983년 3월 8일 레이건은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규정했고, 그 2주 뒤 ‘스타워즈 계획’을 발표했다. 소련의 핵 미사일을 우주 공간에서 요격하겠다는 것이다.
소련은 “소련과 그 우방에 대해 총력전을 벌이겠다는 발상”이라고 반발했다. 소련은 필사적으로 미국의 핵 공격 신호를 감지하려고 했다. 소련과 동유럽의 첩보원들이 서방의 군대 이동, 무전 통신, 고위급 정치인과 장교들의 하루 스케줄, 병원의 긴급 대처, 헌혈 정보 등의 자료를 수집했다
이런 상황에서 KAL기 격추는 레이건의 대소 강경 입장을 결정적으로 강화시켜 줬다. 레이건은 반소 프로파간다 캠페인을 벌이며 군비 증강에 나섰다.
미국 국가안보국
KAL기 격추 몇 시간 만에 국무부 장관 조지 슐츠를 비롯한 레이건의 각료와 보좌관들은 이 사건을 신형 핵 미사일 퍼싱2의 유럽 배치를 위한 명분으로 삼는 논의를 했다. 얼마 뒤 퍼싱2가 유럽에 배치됐다.
또, 레이건은 KAL기 격추 사건을 이용해 1875억 달러의 국방 예산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한편, 소련 관료들은 KAL기 격추 뒤 미국이 선제 핵 공격을 할까 봐 패닉 상태에 빠졌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 유리 안드로포프는 양국 관계 개선의 “환상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했다.
소련 관료들을 특히 공포에 몰아넣은 것은 격추 두 달 뒤인 1983년 11월 2~11일 실시된 나토의 대규모 군사 훈련 ‘에이블 아처 83’이었다. 이것은 핵전쟁 대비 훈련이었다.
소련 관료들은 이 훈련이 자국에 대한 핵 선제공격이 될까 봐 두려워했다. KGB
소련 관료들은 아예 자신들이 핵 공격 선수를 칠까도 고려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다.
그리하여 미·소 간의 핵 긴장은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 이래 최고조에 달했다.
2021년에 공개된 미국 국무부의 기밀 문서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요약했다. “핵전쟁의 나락으로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고 있다.”
핵전쟁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지자 영국을 비롯해 유럽에서 반핵 군축 운동
천만다행으로 핵전쟁은 간신히 피했다. 미국과 소련 지배자들은 핵전쟁으로 공멸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전쟁광 헨리 키신저는 레이건을 만나 “양국 관계를 더 악화시키고 싶지 않으면 극도의 절제력을 보이”라고 권고했다. 안보 담당 보좌관 로버트 맥팔레인도 소련을 자극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래서 레이건은 미·소 간 외교 관계 단절이나 군사 행동 고려 등의 강경책이 아니라 소련의 사과와 희생자 보상 등을 요구했다.
소련 외무부 장관 안드레이 그로미코도 “현재 세계의 제일 큰 문제는 핵전쟁을 피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1983년은 핵 공포의 균형에 의한 평화 유지라는 것이 너무나 취약하고, 미·소 양국의 우발적인 확전 위험성이 상존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