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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 서평 《혁명의 지성사》(엔초 트라베르소 지음):
혁명가라면 누구나 도움을 얻을 책

이탈리아 태생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엔초 트라베르소가 쓴 《혁명의 지성사》(원제 Revolution: An Intellectual History, 2001)가 최근 국내에 번역 출판됐다. 이 글은 영국의 혁명적 사회주의 신문 〈소셜리스트 워커〉 편집자 찰리 킴버가 지난해에 쓴 서평을 번역한 것이다. 킴버는, 혁명을 왜곡해 변화를 향한 열망을 깨뜨리는 세력에 트라베르소의 이 책이 맞선다고 평가한다.

사회주의자들이 이루려는 바는 무엇일까? 이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가 어떤 모습일지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목표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라는 밀접히 연관된 근본 쟁점 또한 존재한다.

《혁명의 지성사》 엔초 트라베르소 지음, 뿌리와이파리, 604쪽, 28000원

현 체제의 세세한 부분을 고치는 것이 목표인 이들에게는 의회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고 일부 개혁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의회주의만을 원칙으로 고수하는 이들은 사회 기반 전체를 무너뜨릴 의사가 없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반면 자본주의를 무너뜨리길 원하는 사람이라면, 모종의 혁명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재앙적 기후 혼돈을 해결하기 위해서든, 차별의 뿌리를 뽑아버리기 위해서든, 오늘날 혁명이 필요하다는 얘기는 과거보다 더 대중적이다. 그러나 정치적 실천에 이르면, 급진적 개혁주의의 여러 버전 중 하나가 제시되는 경우가 흔하다. 프랑스에서 장-뤼크 멜랑숑이 이끄는 선거 연합 뉘프와 같은 의회주의적 좌파가 최근 벌이는 실험에 기대를 걸거나, 영국의 제러미 코빈이 새로운 의회주의 프로젝트를 시작하길 바라는 것이 그런 경우에 속한다.

종류는 살짝 다르지만 전직 노동당 소속 리버풀 지방의회 의원들이 지역에 깊게 뿌리내린 ‘공동체 활동’을 중심으로 조직을 꾸리려 하는 것에 기대를 걸기도 한다.

하지만 엔초 트라베르소는 무척 신선하게도 진짜 혁명에 대해 얘기하고, 혁명이라는 단어를 비방과 물타기에서 구하려 한다. 그는 혁명이 현실적이고 또 필요한 목표로 다시 인정받게 되길 원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 시대가 처한 커다란 딜레마 … 즉 체념할 것인가 희망을 꿈꿀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 다시 도전에 나설 것인가, 커다란 패배 앞에 처절한 무력감에 빠질 것인가 아니면 저항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할 것인가를 두고 벌어지는 갈등”에 답을 제시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은 도입부에서부터 자신의 포부를 드러낸다. 트라베르소는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를 인용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혁명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대중이 자신의 운명을 지배하는 영역으로 강제로 들어서는 것에 관한 역사다.”

이어 트라베르소는 이렇게 말한다. “수십 년에 걸쳐 누적된 변화가 집단적 의식의 재각성과 어느 순간 갑자기 맞아떨어지면 대변동이 일어나 역사의 경로가 바뀌게 된다.”

오늘날 역사학계의 다수에게 혁명이란, 폭정 연구의 하위 주제로 분류해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 그런 것이다. 러시아 혁명에서 해방을 향한 열망이 드러난 생생한 순간을 긍정적으로 인정할지는 몰라도, 이들이 러시아 혁명에서 연구하는 실제 대상은 스탈린주의의 득세와 이후 수십 년간 이어진 테러, 억압, 독재에 관한 것이다. 이들에게 혁명은 인간 해방을 위한 본보기라기보다는 인종 학살에 훨씬 더 가까운 주제로 여겨진다.

트라베르소는 변화를 향한 우리의 열망을 깨뜨리는 이런 왜곡을 바로잡는다. 그는 혁명이 “마치 지진처럼 인간들이 집단적으로 경험하고 체화하는 무엇”으로서 이 세계에 등장한다고 말한다. 혁명은 “매우 강렬한 경험”이며 “그 과정에서 표출되는 에너지, 열정, 정서, 감정의 수준은 평범한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정신적 기준을 훨씬 넘어선다.”

혁명 과정에서 삶은 놀랍도록 강렬해진다고 그는 주장한다. 대중은 자신을 무기력하게 만들던 평범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자신의 힘과 능력을 깨닫는다.

그래서 트라베르소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혁명을 경험한 많은 이들은 그것을 마치 중력을 거스르며 마을과 언덕을 신나게 날아다니는 샤갈의 그림 속 주인공이 된 듯 가벼워진 느낌으로 표현했다.”

이 책에는 풍부한 사례가 가득하다. 트라베르소가 사용한 방법 하나는, 당시 혁명에 반대했지만 그럼에도 사건의 핵심을 이해했고 그래서 두려워한 이들을 인용하는 것이다.

1871년 파리 코뮌에서 나폴레옹 동상을 쓰러뜨리는 파리 민중 ⓒ출처 Wikimedia Commons

귀족 출신 역사가 알렉시 드 토크빌이 1848년 프랑스 혁명에 대해 1850년에 쓴 회고록을 보면 2월 봉기 동안 노동하는 계급들이 점령한 프랑스 수도를 생생히 묘사한다.

“그날 오후 내내 파리를 걸어다녔다. 두 가지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첫째는 이제 막 성공한 혁명이 오직 민중에게만 기댔고 그 점에서 독보적이라는 점이다. 혁명은 다른 모든 계급을 제치고 소위 민중이라 부르는, 즉 자신의 손으로 노동하는 계급에게 무제한 권력을 쥐여 줬다.

토크빌이 발견한 둘째 특징은 평온함과 진지함이었고 이를 보며 그는 “하층민이 한 순간에 파리의 주인이 됐다”고 받아들였다.

후대의 러시아 혁명이나 스페인 혁명을 기록한 저자들을 연상시키며 토크빌은 이렇게 말한다. “오직 민중만이 무기를 쥐었고, 공공 건물을 지켰고, 질서를 감시했고, 명령과 형벌을 내렸다. 부자들이 가득한 이 위대한 도시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자들에 의해서 운영되는 광경을 보는 것은 놀랍고 끔찍했다.”

이 광경이 불쾌했던 토크빌은 이렇게 덧붙였다. “로마 제국의 문명화된 도시들이 난데없이 고트족과 반달족의 지배를 받게 됐을 때 경험했을 것 외에는 달리 이와 비견할 게 없다.” 그러나 그는, 노동자를 포함한 대중이 역사의 무대로 강제로 들어섰던 가장 오래된 사례에 속하는 당대 현실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트라베르소는 이런 역사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최근 등장한 새로운 반자본주의 운동들은 과거의 좌파 전통들과 아무런 연계가 없다. 이 운동들은 계보가 없다”며 이 점을 강점인 동시에 약점이라 본다. 이로 인해 새로운 운동들이 승리의 전략을 새롭게 고민할 수도 있지만, 과거로부터 계승해야 할 긍정적 유산과 피해야 할 실수를 모두 폐기해 버린다는 것이다.

트라베르소는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 시대 혁명이 자신만의 독자적 모델을 세워야 하지만, 그 과정을 완전한 백지에서부터 시작할 수는 없다.” 혁명은 “승리이든, 더 경우가 많았던 패배이든 과거 투쟁의 기억”을 체화해야 한다. “이는 의심의 여지없이 애도의 과정일 테지만 동시에 미래의 전투에 대비하는 훈련 과정이기도 하다.”

이 책은 여러 혁명의 연대기도, 핵심 주제들에 대한 분석을 담은 책도 아니다. 대신 이 책은 혁명적 상징과 기억, 혁명과 신체, 자유와 해방 등 다양한 이슈를 아우른다.

철도에 관한 매우 흥미로운 장에서는 “혁명은 역사를 이끄는 기관차다”라는 카를 마르크스의 주장과 “혁명이란 이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인류가 비상 브레이크를 잡아당기는 것일지 모른다”라는 발터 벤야민의 주장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과 유사성을 고찰한다.

책의 거의 모든 페이지마다 신선하고 유용한 사실이나 사례를 적어도 하나 이상 담고 있다. 예를 들어 나는 1920년에 러시아 적군이 장갑열차 120대를 보유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백군을 물리치는 데서 이 장갑열차들이 그토록 핵심적 구실을 수행했다는 것도 몰랐다.

또 이 책에서 진보적 운동이 자신이 밀어내고 있는 구체제의 상징물과 동상을 무너뜨리는 과정들을 다룬 부분도 뛰어나다.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M) 운동과 노예 소유주 동상 철거에 관한 논쟁을 겪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부분이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1792년 8월, 프랑스 혁명 과정의 일부로서 국민의회는 “편견”, “폭압”, “봉건주의”를 상징하는 모든 기념물을 체계적으로 파괴하도록 한 법령을 제정했다.

프랑스 혁명의 또 다른 막이었던 1848년 2월에는 퇴위당한 국왕 루이-필리프의 많은 초상화가 파괴되거나 훼손됐으며, 국왕 흉상의 목에 밧줄을 묶은 것을 대열 맨 앞에 든 행진 대열들이 여러 프랑스 도시를 휩쓸었다. 1871년 5월 파리 코뮌은 방돔 광장의 [나폴레옹] 동상을 무너뜨렸다. 군사주의, 제국주의, “가짜 영광”이자 “패자에 대한 승자의 모욕”의 상징물로 여겼다.

다른 혁명들 또한 “비슷하게 우상 파괴로 분노를 표출했다.” 1936년 12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조지 오웰은 이렇게 기록했다. “모든 교회가 파괴되고 교회의 모든 그림이 불태워졌”으며 “해외 반(反)파시즘 신문 중 일부는 교회가 공격당한 것은 파시스트들의 요새로 사용됐을 때뿐이라고 거짓말을 늘어놓는 저열함까지 보였다.”

그러나 오웰이 지적하듯 “실제로 교회는 모든 곳에서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약탈당했는데, 스페인 교회가 자본주의적 협잡에 공모했다는 점을 사람들이 완벽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BLM 활동가들의 [노예 소유주] 동상 파괴가 비이성적 기물 파손이기는커녕, 영국에서 혁명이 벌어질 경우 일어날 변화의 아주 작은 일부만 보여 준 것임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준다.

트라베르소는 변화의 상징이 갖는 중요성과 대담해야 할 필요성을 설명하는 데서 매우 뛰어난 통찰을 보여 준다. 1789년 바스티유 감옥 습격은 원래 실용적 필요성 때문에, 즉 무기의 탄약을 구하기 위해 벌어진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내 변화를 상징하는 파괴 행위로 전환됐다. 당시 감옥에 갇힌 사람은 7명에 불과했지만 바스티유는 중세 시대 이래로 왕과 귀족들의 지배를 상징했다.

프랑스 혁명이 벌어지고 50년 후에 집필된 《프랑스 혁명의 역사》에서 쥘 미슐레는 당시의 바스티유 공격이 파리 민중에게 얼마나 까다로운 과제였는지를 설명한다.

“바스티유 감옥은 낡았지만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민중은 통상적인 봉쇄 작전을 감행할 시간도, 수단도 없었다. 만약 그런 작전을 폈더라도, 수비 측은 인근 지원병을 기다릴 때까지 버틸 만큼의 물자를 비축하고 있었고, 탄약을 어마어마하게 쌓아두고 있었다.”

“바스티유 성벽은, 타워 꼭대기 부분이 10피트[3미터 남짓] 두께였고 아랫부분은 30~40피트 두께였다. 포탄 따위는 가볍게 웃어넘길 수준이었다. 타워에는 두 겹 세 겹 창살로 보호되는 창문과 총안(銃眼)이 가득해 그 요새를 공격하는 이들을 참혹히 말살시킬 수 있었다.

당시 타협을 바라거나 쉽게 흔들리던 이들이 공격을 미루고 협상하자고 주장했을 모습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미슐레가 결론 내리듯, 바스티유 함락은 봉기한 민중의 억누를 수 없는 힘으로 추동돼 이뤄진 것이었지, 세력 균형을 찬찬히 평가하고 행동한 결과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이 행동이 이성이 아니라 “신념에 기반한 행위”였다고 강조한다.

이런 공격이 성공을 거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미슐레는 바스티유 감옥이 지닌 상징적 측면에서 답을 찾는다. “바스티유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혐오의 대상이었다. 모든 언어에서 바스티유와 절대 왕정은 동의어였다.” 결국 “바스티유는 함락된 것이 아니라 [버티지 못하고] 항복한 것이었다”.

트라베르소가 사용한 예시는 아니지만 러시아 혁명도 비슷한 논쟁을 겪었다. 트로츠키는 10월 혁명 전날 “볼셰비키 정당 안에서 봉기에 반대한 이들이 [자신들의] 비관적 결론을 뒷받침할 충분한 근거를 찾아낸” 과정을 묘사한다.

이들은 임시정부가 확고하게 지휘하는 병사가 수천 명이라고 주장했고, 임시정부에는 “페트로그라드를 부채꼴 모양으로 에워싸고 있는 막대한 무기가 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이렇게 주장했다. “사회가 공공연히 분열할 때, 양쪽 군대는 [사회에서] 적대하는 두 진영의 복사본이다. 가진 자들의 군대는 고립과 부패로 좀먹은 상태였다”.

트로츠키가 성공 가능성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공세적 전술을 펴라고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적이 자신보다 강력하다고 습관적으로 간주하는 것이 승리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순간이 온다. 말하자면, 어제의 부르주아지가 강력했던 것의 그림자에 가려, 오늘의 부르주아지가 허약하다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트라베르소는 많은 이론가들과 달리 폭력 문제를 회피하지 않는다. 그는 “[식민 점령의] 본성은 폭력에 있”으므로 “이를 무릎 꿇릴 방법은 오직 더 큰 폭력뿐이다”라고 한 프란츠 파농의 주장에 동의하며 이를 인용한다.

당연히 혁명가라면 모름지기 식민주의·제국주의 지배자에 맞서 억압받는 자들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항할 권리를 진심으로 지지해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국가와 이를 후원하는 미국이 오직 ‘더 큰 폭력’에 의해서만 패퇴할 것이란 말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진정한 강령을 제시할 수 있을까?

트라베르소는 혁명이 폭력을 사용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고 옳게 주장한다. 지배계급은 가차 없고, 가장 유혈낭자한 수단을 사용해 적을 파괴할 준비가 얼마든지 돼 있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이윤과 지배력을 위해 전 세계 여러 지역을 살육의 현장으로 만들어 버린 것을 보라. 체제 전체를 실질적으로 위협하는 세력이 없는데도 저들은 그랬다. 평화주의는 이런 체제를 건드리지 않는다.

이는 현재의 문제다. 수단에서 혁명가들은 비폭력주의를 원칙으로 결의하고 있다.(그런 원칙에 집착하고 있다고 표현해도 그리 불공정한 건 아닐 테다.) 그들이 비폭력주의를 적극 받아들이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도덕적인 이유로, 또 부분적으로는 혁명에 참가한 대중을 단결시키기 위한 한 요소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국제 사회’ 즉, 제국주의에 호소하기 위해서다.

의심의 여지없이, 시리아에서 혁명이 내전으로 발전해 나라 절반이 파괴된 것은 모든 이들이 깊게 고려해 봐야 할 문제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폭력을 완전히 거부하면 쿠데타 정권의 무장 세력에 맞서 대중이 총을 들고 저항을 벌일 가능성에 대해 면밀히 토론할 기회조차 사라지게 된다. 수단에서 이 문제를 제기하는 세력은 옳은 주장을 하는 것이다.

대중 운동과,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파업을 벌이고 대안적 민주주의 구조를 조직하는 것은 핵심적으로 중요하다. 하지만 지배자들, 혹은 옛 지배자들의 잔혹함에 맞서 방어적 폭력으로 대응해야 할 필요가 있는 순간 또한 존재한다. [혁명가들이] 무기를 사용할 태세가 돼 있지 않았더라면, 코르닐로프 쿠데타는 1917년 8월에 러시아 혁명을 무너뜨리고 파시즘 체제로 가는 길을 열었을 것이다.

트라베르소는 아나키스트 출신의 볼셰비키 당원 빅토르 세르주를 인용한다. 세르주는 1919년 당시 페트로그라드에서 “인도주의적 위선 같은 것은 없는, 목숨을 건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썼다. 심지어 이 부분에서도 러시아 혁명이 폭력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 혁명은 동부 전선에서 제1차세계대전을 종식시키고 독일 혁명을 고무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살상 반대 운동이었다.

이 책에서 바리케이드와 바리케이드의 상징적 구실에 대한 대목도 오늘날 수단의 상황에 유효하다. 수단 수도 하르툼 거리에 엎어져 있는 구조물들을 찍은 사진을 보면 활동가들이 굳이 왜 애를 썼을까 의문이 들 수 있다. 구조물들이 너무 허술해 제대로 된 군사 공격을 전혀 막을 턱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바리케이드는 일차적으로 저항의 상징이자 경찰과 군대가 건너지 말아야 할 선이다. 그것은 쿠데타 정권으로부터 해방된 ‘우리’ 영역을 표시한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와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분석이 없는 것은 트라베르소의 책이 지닌 약점이다. 그는 [동유럽이 붕괴한] 1989년에 우리 모두 “정신적 뿌리를 잃어 버렸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1989년이 해방을 위한 프로젝트와 단절하는 사건일 때에만 맞는 말이다. 스탈린주의가 1917년 러시아 혁명의 희망과 정반대임을 이해한 이들은 이미 수십 년 전에 그런 단절이 이뤄졌다고 본다. 그러므로 1989년은 전혀 슬퍼할 일이 아니었다.

트라베르소는 혁명의 미래에 대해서는 별다른 의견을 내놓지 않는다. 역사가의 전문 분야가 아닐지 모르지만 위기와 재앙, 저항이 중첩되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이는 시급한 필요성이 있는 주제다.

‘현대’ 혁명은 기존의 정치 방식들과 단호하게 단절할 것을 요구한다. 제1차세계대전 당시 레닌은 사회주의 조직의 이전 방식들은 죽었다고 선언했다. 당시 레닌이 목도한 광경은 제국주의가 낳은 국제적 갈등의 끔찍한 현실과 [영국] 노동당류의 사회주의 정당들이 ‘자국’ 지배계급을 지지하며 붕괴하는 것이었다. 당시 필요한 것은 혁명에 중심을 둔 정당과 운동이었다.

전쟁 이전, 임금과 노동조건에 관한 선동에 활동을 국한한 노동조합 운동이 있었다. 선거와 투표에 중점을 둔 의회주의 그룹 또한 별개로 존재했다. 평화주의는 개인 수준의 저항과 개인들이 전투를 거부하는 활동을 기반으로 전쟁에 반대했다. 페미니즘은 주로 기존 체제 안에서 남성과의 형식적 평등을 추구했다.

전쟁은 이 모든 세력의 본질을 밝히 드러냈다. 노동조합들은 공장 내 경찰처럼 행동하며 살육 기술을 위한 생산을 끌어올렸다. ‘좌파’ 의회주의 정당들은 대개 모병관처럼 행동했다. 평화주의는 전쟁을 유발한 거대한 구조적 세력 앞에서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페미니즘은 체제 전체에 반대한 소수와 전쟁에 자원하지 않은 남성들에게 모욕을 주는 다수로 분열했다.

새로운 정당이 필요했다. 일터와 거리에서의 행동에 초점을 두고, 제국주의에 온전히 반대하고, 자본주의 국가와 이 국가가 보호하는 기업들을 무너뜨리는 데 헌신하는 정당이어야 했다. 기존 체제 안에서 묘책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 변화를 추구하는 정당이어야 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이런 정당이 노동계급을 권력 장악으로 이끌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줬다. 이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한 교훈이자 방식이다.

이 책을 읽어 보길 바란다. 혁명가라면 도움이 될 내용을 누구나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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