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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프랑스 공장점거 운동 70주년:
민중전선 정부와 대립하다

1936년 6월 프랑스에서 무려 2백만 명이 참가한 거대한 대중파업이 벌어졌다.

메이데이에 벌어진 파업을 이유로 해고된 노동자들을 복직시키기 위해 5월 11일과 13일, 14일에 3군데의 서로 다른 공장에서 파업이 벌어졌다. 파업 참가율은 1백 퍼센트를 기록했고 공장점거(연좌) 전술과 지역 주민들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신속하고 완전한 승리를 쟁취했다.

사실, 이 파업이 벌어지기 몇 달 전부터 프랑스의 정치적 분위기는 한껏 고양돼 있었다.

2월에 파시스트들이 길거리에서 사회당 지도자이자 유대인인 레옹 블룸을 공격하자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1백50만 명이 참가한 이 시위는 민중전선 ― 공산당과 사회당과 급진당의 동맹 ― 이 5월 선거에서 크게 승리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하지만 정작 선거가 끝나자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선출한 의회의 변덕과 복지부동에 실망했다. 블룸은 내각을 구성하는 데만 한 달을 보내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결국, 2월에 벌어진 스페인의 대중파업 소식과 메이데이 파업 승리에 고무된 제조업 노동자들이 파리 외곽 산업지구(“적색 벨트”)의 공장들을 멈춰 세웠다. 모든 공장이 노동자들에게 점거됐고 그 중 한두 곳에는 붉은 깃발이 내걸리기도 했다. 사장을 사무실에 감금하는 일도 있었다. 이들은 임금인상, 주 40시간 노동, 유급휴가, 노조 인정을 요구했다.

5월 29일에는 처음으로 비제조업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고 파업은 전통적으로 취약한 부문의 노동자들에게도 급속히 확산됐다. 백화점, 호텔, 식당, 극장, 영화관 등이 점거됐다.

파업 물결은 며칠 만에 북부의 노르파데칼레에서 남부의 마르세유까지 전국의 모든 주요 도시로 확산됐고 점거된 공장의 수는 셀 수도 없었다.

1936년 6월 총파업의 규모뿐 아니라 그 운동이 당시 사회를 휩쓸면서 형성된 분위기에 대해서도 말할 필요가 있다. 정부와 사장들은 경찰 동원을 두려워했다. 유혈낭자한 피켓 라인의 충돌 대신에 노동자들은 공장 뒤뜰에서 카드게임과 볼링을 하고 즉흥연주회와 판토마임을 감상하며 ‘따뜻한 6월’을 보냈다. 그러나 고용주들은 점잖고 고요한 노동자들의 태도에 오싹한 두려움을 느꼈다.

6월 7일에 총리 블룸은 사장들과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집무실로 불러 의회가 주 40시간 노동제와 유급휴가, 그리고 단체협상의 구속력에 대한 긴급조치를 내릴 것이라고 말하고는 앞으로 전 부문에 걸친 임금인상 협상을 할 것을 양측에 제안했다.

사장들은 확실히 지푸라기를 붙잡았다. 그 후 몇 주 동안 총리, 시장, 국회의원들, 장관들과 노동조합 고위 간부들이 전국의 모든 곳에서 임금협상을 벌였다.

7월 말이 될 때까지 프랑스의 양대 노동자 정당(공산당과 사회당)은 운동의 동력을 소진시키고 그 활력의 원천(공장점거)을 제거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사회당은 자신들의 의회주의 유희를 깨뜨릴까 두려워서, 공산당은 스탈린이 히틀러의 소련 침공을 막기 위해 프랑스에서 부르주아들과 동맹을 맺기를 자신들에게 요구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

그들은 점거를 풀고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을 고립시키고 6월의 위대한 정신을 파괴했다. 블룸 정부는 이듬해 5월까지 살아남았지만 결국 1년 뒤 우익들이 권력을 되찾았고 이들은 노동자들이 쟁취한 성과들을 깡그리 파괴하기로 작심했다.

뒤이은 몇 년 동안 노동자들에게 위안이 있었다면, 그것은 그들이 패배한 결정적 이유가 지배자들의 힘이 너무나 강력했기 때문은 결코 아니라는 것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