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1945~46년) 공장관리운동 60주년 - 한국사 최초의 대중적 노동자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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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했다. 일본의 폭압적 지배기구는 급속히 붕괴했다. 조선총독부가 여전히 존재했지만, 그 권위는 예전같지 않았다. 두려움에 떤 총독부 소속 일본인·조선인 관료들의 출근률은 10퍼센트밖에 되지 않았다. 공업부문 총자산의 90퍼센트를 차지했던 일본인 자본가들의 패퇴는 노동자들이 폭발적으로 진출할 공간을 만들었다.
일본에 협력했던 조선 자본가들은 대부분 생산을 기피했고 인플레를 틈탄 투기행위가 만연했다. 공업부문 생산은 75.2퍼센트나 감소했고 실업률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에 맞서 노동자들은 생산을 재조직하기 위해 공장을 접수해 통제하기 시작했다.
조선에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도입은 일본의 조선 식민화와 함께 진행됐기 때문에 노동자들에게 일본의 식민통치는 민족적 억압뿐 아니라 자본주의적 착취를 뜻했다. 따라서, 노동자들에게 일본의 패배는 자본주의적 착취 질서의 폐지를 뜻해야 했다.
군산 종연조선 노동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누구를 위한 해방이고 누구를 위한 독립이냐? 노동자에게서 직장을 빼앗고 빵을 주지 못하는 독립이라면 무슨 기쁨이 있고 무슨 의의가 있으랴. … 우리 6백 명 공원은 … 노동자 대중에게 완전한 해방을 가져오는 그 날을 위하여 끝까지 싸우기를 여기에 맹서한다.”
자주관리운동은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집단화·조직화돼 있던 공장을 중심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공장뿐 아니라 운수업, 상업, 어장, 극장, 학교 등으로 확산됐다. 1945년 11월 4일까지 16개의 산별노조에 7백28개의 공장관리위원회가 구성됐다.
물론 자주관리운동의 성격은 불균등했다. 대부분의 사업체에서는 그 사업체의 노동자들이 단독으로 접수·관리했지만, 일부 사업체에선 노동자와 자본가가 공동으로 운영하기도 했고 또, (대개 계급연합 기구인) 지역 인민위원회가 관리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노동자들은 어떤 형태로든 공장관리에 개입했고, 자본가들이 주도하는 관리위원회조차 노동자들의 협조 없이는 공장을 운영할 수 없었다.
공장자주관리운동은 일본인 사업장뿐 아니라 화신백화점·경성방직·조선비행기 등 조선인 자본가의 사업장으로 확대되는 경향을 보였다. 화신백화점 노동자들은 “재래의 중역진 전부 배척, 박흥식 사장 절대 배척, 화신의 관리는 자치위원회에서 하겠다”며 투쟁했다.
노동자들의 공장 통제가 반자본주의적 성격을 띠자마자 미군정은 이 운동을 탄압했다. 곳곳에서 충돌이 벌어졌다.
그러나 당시 조선공산당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는 “공장관리운동”이 “미군정과의 마찰을 불러일으킨다”며 투쟁을 자제시켰다. 심지어 조선공산당 중앙 간부인 이관술은 공장관리운동이 “중앙간부로서 귀찮으니 자본가한테 넘겨줌이 어떠냐”고 하기도 했다.
사실, 조선 노동자들의 급진화는 전 세계 차원에서 벌어진 급진화 물결의 일부였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직후 남부 유럽 중심으로 노동자들이 공장을 접수하는 등 급진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서방 제국주의 국가와 협력하고 있었다. 전후 세계질서를 놓고 서방 제국주의 국가와 흥정하는 게 그에게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주의에 충실했던 조선공산당은 이에 따라 “단계혁명”론과 “진보적 민주주의”론을 내세웠다. “현재 조선의 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단계”이기 때문에 조선 정부의 성격은 계급연합 정권인 민중전선 정부여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양심적 자본가와의 협력”이 중요해졌다. 공장관리운동은 “조선인 자본가에게도 관리 문제를 제기하여 그들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 했다”는 이유로 비판받았다.
결국 노동자들의 공장관리운동은 1946년 9월 총파업의 패배 이후에는 거의 의미 있는 구실을 하지 못한 채, ‘인민정권’과 노동조합의 보조기구로 문서상으로만 존재하게 됐다.
자주관리운동은 노동계급의 변혁적인 정치 없이는 노동계급의 자기해방 역시 없음을 교훈으로 남겨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