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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피해자다움이란 무엇인가》(최성호 지음, 필로소픽 출판):
성폭력 문제에 대한 철학자의 신중하고 논리적인 분석

피해자다움이란 무엇인가 - 성범죄 재판에 대한 철학자의 성찰 최성호 지음, 필로소픽, 224쪽, 15000원

지난해를 장식한 미투 운동은 성폭력과 성차별에 침묵하지 않겠다는 여성들의 용기 있는 외침을 보여 줬다. 오랫동안 은폐된 위계 성폭력 문제도 부각됐다.

다른 한편, 까다롭고 때때로 회색 지대도 있는 성범죄의 특성상, 어떻게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접근해야 하는가 하는 만만찮은 과제도 남겼다. 이와 관련해 특히 ‘피해자다움’, ‘피해자 중심주의’, ‘성인지 감수성’ 같은 개념들이 여전히 논란의 한가운데 있다. 특히 ‘안희정 성폭력 사건’의 경우, 1심과 2심에서 정반대 결론이 나와 논란을 가중시켰다.

최성호 경희대 교수의 신간 《피해자다움이란 무엇인가》(부제: 성범죄 재판에 대한 철학자의 성찰)는 뜨거운 감자를 정면으로 다룬 논쟁적인 책이다. ‘피해자다움’이 중심 논제이지만, 그와 관련된 ‘피해자 중심주의’ 문제도 다룬다.

저자 최성호 교수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와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대학교, 캐나다 퀸스대학교 재직을 거쳐 현재 경희대학교에서 논리학, 형이상학, 언어철학, 법철학 등을 교수하는 철학자이다. 그는 이 책에서 전문 철학자답게 신중하고 논리적인 태도를 견지하면서 본인의 견해를 펴 나아간다.

성 관련 분쟁은 결코 단순하지 않고 복잡 미묘한 문제인데도 도덕주의적이고 일방적인 잣대로 단순하고 경솔하게 다루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최성호 교수는 그 미묘함을 무시하지 않고 요모조모 다각적으로, 신중하게 접근한다. 이것은 이 책의 큰 장점이다. 저자가 자신의 견해에 제기될 수 있는 비판과 우려들을 일축하지 않고 진지하게 응답하는 것도 장점이다.

물론 이 책은 다소 학술적인 설명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책의 대부분은 일반 독자들도 이해할 수 있는 현실 쟁점과 사례를 다루고 있어 비교적 쉽게 읽힌다.

저자의 말처럼 한국 사회에서 성범죄는 소셜 미디어나 각종 인터넷 게시판에서 불꽃 튀는 논쟁이 종종 벌어지는 매우 민감한 이슈다. 그런 논쟁은 건설적 논의로 이어지기보다는 상대방을 모욕하고 비방하는 이전투구로 끝나는 것이 다반사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성범죄 재판 문제는 복잡하고 난해한 데다 인화성이 큰 이슈인 만큼 미리 결론을 정해 놓지 말고 인내심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접근하자.” 이런 당부를 따라 이 책을 찬찬히 읽어나가다 보면 흥미롭고 유익한 논점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피해자다움’,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

저자는 성범죄 재판에 대한 상당수 국내 페미니스트들의 다소 일면적이고 주관주의적인 잣대에 맞서, (피해)고소인 진술의 신빙성에 대한 평가가 꼭 필요하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최근 사회적 쟁점으로 부상한 몇몇 성범죄 재판(대표적으로 안희정 성폭행 사건)에 대한 한국 여성운동 단체와 주류 언론사의 공식적인 입장과 반대되는 입장을 옹호한다. 그들은 성범죄 고소인의 행위가 피해자다운지 묻는 것이 또 하나의 가해라고 성토하지만, 나는 이 책에서 그것이 객관적 사실에 근거한 공정한 재판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를 곧 미투 운동을 지지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실제로 저자의 접근법은 성폭력에 대한 편협하고 보수적인 이해와는 거리가 멀다.

저자는 논의의 출발점으로서 ‘넓은 의미의 피해자다움’와 ‘좁은 의미의 피해자다움’을 구분한다. 그리고 ‘넓은 의미의 피해자다움’은 성범죄 사건과 무관한 사건 발생 이전의 피해자 ‘행실’과 이력을 부당하게 끄집어 내어 여성에 대한 편견을 부추기는 것으로 규정하고 이에 분명한 어조로 반대한다.

“일부 강간죄 남성 피고인의 변호인들은 여성 고소인이 성범죄 우범 지역을 배회했다는 이유로, 야한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과거에 성경험이 풍부했다는 이유로, 성매매 업소에 종사했다는 이유로, 정신질환 병력이나 전과가 있다는 이유로, 성폭력 당시 음주 상태였다는 이유로 피해자답지 못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이러한 시도는 인식적 정당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부도덕한 행위라고 본다.”(21~22쪽)

또한 이는 청산돼야 할 “피해자다움의 부끄러운 과거사”라고 지적한다.

저자는 성범죄 재판에서 고소인 여성 진술의 신빙성만 의심의 대상이 되는 반면, 남성 피고인 진술의 신빙성은 거의 쟁점이 되지 않는 관행도 문제라고 본다. 그래서 고소인 여성의 진술뿐 아니라 피고인 남성 진술의 신빙성도 마찬가지로 평가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성범죄 사건 이후의 행적이라 할지라도 ‘피해자다움’ 개념을 남용해서는 안 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가령 피해자가 성적 피해를 당한 뒤에도 평소처럼 출근하는 등 평범한 일상을 수행하거나 피해 사실을 침묵한 행위 등은 성폭력 피해자에게 흔히 나타날 수 있는 태도로, ‘피해자답지 못한’ 증거가 될 수는 없다. 특히, 아무리 괴로워도 자신이나 가족을 위해 당장 쉬지 못하고 생계를 꾸려 나아가야 하는 노동계급 여성의 처지는 더욱 그렇다.

성폭행 피해자가 사력을 다해 저항하지 않았다 해서 ‘피해자답지 않다’고 본 판례들도 마찬가지로 부당하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전형적이고 이상적인 피해자상을 설정해 놓고 그에 맞지 않으면 피해자가 아니라고 성급하게 의심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저자는 위와 같은 논점들을 거듭 강조해, 자신의 견해가 성차별적 견해들과 혼동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 문제

그럼에도 저자는 고소인 진술의 신빙성을 평가하는 일 자체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성범죄의 특성상 고소인의 진술 증거 외에 범죄 사실을 증명할 객관적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므로, 결국 고소인의 진술 증거에 대한 신빙성 평가가 불가피하게 재판의 초점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만약 이를 “2차 가해”나 “2차 피해” 등으로 부르며 거부한다면, 사건의 유일한 증거에 대한 검증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 저자의 말처럼 이는 “객관적 진실을 찾는다는 중차대한 대의를 포기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것이 “사법체계를 나쁜 형태의 기만에 노출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저자는 배우 이진욱, 경희대 서정범 교수 등의 사례를 들어 무고한 사람이 “거짓된 성범죄 혐의로 엄청난 고통을 받는 일이 반복돼선 안 된다”고 지적한다.

물론 저자는 여성주의자들의 우려에 이해할 만한 취지가 있음을 인정할 뿐 아니라 그 취지를 충분히 경청하고 공감한다. 하지만 성범죄 고소 여성의 진술 신빙성을 평가하는 것(“피해자다운지”를 판단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입장은 결국에는 난점이 많다는 것을 조목조목 짚는다.

이 대목에서 피해 호소 여성의 진술을 무조건 진실로 전제하고 그대로 믿어 줘야 한다는 ‘피해자 중심주의’의 문제점이 다뤄진다.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피해자 중심주의’ 관련 논문 등 이 문제에 관한 선구적 논의들도 소개된다. 특히, 진상 조사도 없이 피해 호소 여성의 말에 “진실의 권위를 부여”해 부작용을 낳은 2000년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위원회’의 사례를 든다. ‘100인위’에 대한 페미니즘 안팎의 문제제기를 소개하며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범죄 고소인의 진술에 대한 신빙성 평가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매우 비상식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비상식이 비교적 최근까지도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이름으로 공공연히 주창되어 왔다는 사실은 진정 놀라울 따름이다.”(100~101쪽)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저자는 일반 범죄 사건의 수사나 일상 생활에서 널리 사용되는 합리적인 추론 방법을 성범죄 재판에도 적용하자고 제안한다. 그 방법을 요약하면 이렇다. ‘성범죄가 벌어진 시점 이후의 고소인(A)의 특정 행위(S)가, A가 그 범죄의 피해자가 아니라는 가설 하에서보다 A가 그 범죄의 피해자라는 가설 하에서 더 잘 설명되고 이해된다.’

저자가 직접 든 사례를 들어 설명하면 이렇다. 심각한 상해를 당했다고 진술한 고소인(A)이 그 이후에 고통을 호소하며 병원을 찾았다면 그 행위는 상해죄에 대하여 피해자답다고 말할 수 있다. A의 행위(고통을 호소하고 병원을 찾는 행위)가 그가 상해죄의 피해자라는 가정 하에서 설명되고, 이해되고, 납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A가 사건 이후에 고통을 호소하거나 병원을 찾지 않고 철인 3종 경기에 참가한다면 그의 행위는 상해죄에 대하여 피해자답다고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성폭행 고소인이 사건 이후 심각한 심리적 파국을 경험했다면 피해자다운 모습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대신 그가 가해자로 지목한 B와 사건 다음 날 온종일 데이트를 즐겼다면 피해자다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저자는 자신이 제시한 추론은 모두 추가 정보가 주어진다면 바뀔 수 있다고 덧붙인다. 가령 성적 자존감을 결여한 상태의 여성이라면 그가 성폭행 피해 후 성적 수치심이나 심리적 파국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사실로부터 곧장 피해자답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부 강간의 경우 관계의 속성상 피해자가 가해자와 사건 다음 날 온종일 데이트를 즐겼다는 것만으로 곧장 피해자의 행위가 피해자답지 못하다고 성급히 결론 내릴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장기간 성폭력이나 가정폭력에 노출된 피해자의 경우, “학습된 무기력” 상태에 빠져 그 상황에서 탈출하기를 자포자기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피해자다움 개념을 적용할 때 특별한 주의가 요망[된다.]”(85쪽)

이런 이유로 “피해자다움에 대한 최종 판단은 해당 사건에 대한 충분한 정보가 주어진 후에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39~40쪽)

한편, 사건 이후 고소인의 행적 외에 다른 판단 근거들도 살펴봐야 한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특히 대법원의 이런 판시를 상기시킨다. “고소인 진술이 증명력을 갖추려면 진술 자체의 합리성, 일관성, 객관적 상당성은 물론이고 피해자의 성품 등 인격적 요소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또한 믿음직함, 정직성, 일관성, 남김없이 진술하기(반쪽 진실이 아닌 온전한 진실 말하기) 등도 범죄학과 심리학 등에서 고소인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하는 요소로 이미 인정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래서 “고소인의 정직성에 대한 평가와 직접 관련이 있는 신상 조사조차도 ‘피해자 보호’라는 미명 하에 금기시하거나 혹은 ‘남성 중심적 시각’이라며 거부하는 것은 또 다른 부작용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107쪽)

다만, 고소인의 정직성, 일관성 등의 요소들은 해당 사건에 대한 고소인 진술의 신빙성에 대한 간접적 지표로 참고할 수 있을지언정 결정적 판단 근거가 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설사 고소인이 습관적인 거짓말쟁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곧 현재의 진술이 거짓이라고 할 결정적 증거는 못 되기 때문이다.(‘양치기 소년’ 우화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그래서 진술의 일관성만 따지는 것도 마찬가지 한계가 있다. 어떤 사람은 일관되게 거짓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107~109쪽)

그밖에도 저자는 성범죄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는 데 필요한 여러 판단 요소들을 요모조모 따져본다. 이런 부분들은 민감하고 까다로운 성 관련 분쟁을 다룰 때 참고할 만하다.

안희정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다움’ 문제

저자는 자신의 추론 방법을 안희정 성폭력 사건에 적용한다. 우선, 저자는 위력 성폭력의 특징을 잘 이해하고 있다. 위력 성폭력에서 가해자의 직접적인 폭행·협박 유무나 피해자의 저항 유무는 진정한 쟁점이 아니라고 옳게 지적한다. 또한 “안희정 사건의 공소사실과 관련 있는 고소인과 피고인의 모든 행위를 이 책에서 다 살펴볼 수는 없다”고 밝힌다.

그럼에도 저자는 가장 많은 논란을 낳은 고소인 김지은 씨의 행위 하나를 선별해 그것의 “피해다자움”을 평가한다. 저자는 김씨가 수차례 위력 간음과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한 시점 이후에 제3자에게 보낸 메시지(“지사님[안희정] 말고는 아무것도 절 위로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등)가 피해자답지 않은 행위라고 본다. 김씨가 사건을 당한 후에도 (자신의 진심을 숨길 필요가 없는) 제3자에게 안희정에 대한 존경과 애착을 나타낸 것은 위력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가 할 만한 행동이 아니고, 이는 “고소인 진술의 신빙성을 치명적으로 훼손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이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저자의 지적처럼 고소인 진술의 신빙성에 의문을 드러낼 만한 여지가 이 사건에 있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희정이 무죄임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충분한 것도 결코 아니다.(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안희정 사건 1심 판결 전문을 분석한 본지 기사 ‘안희정 성폭력 무죄 판결 비판 ― 가해자가 위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라면 피해자가 두려워했음직하다’를 보시오.)

저자도 밝혔듯이, “안희정 재판에서 고소인 진술의 신빙성 판단, 나아가 안희정에 대한 유무죄 판단은 여러 정황이나 증언 등에 대한 종합적인 고려 하에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김지은의 문자 메시지가 피해자다운지 아닌지는 그 종합적인 고려의 일부일 뿐이다.”(144쪽)

무엇보다 안희정이 가진 막강한 권력을 이 사건에서 핵심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안희정은 사건 당시 충남도지사이자 차기 유력 대선주자인 권력자이자, 피해자를 언제든 해고하거나 피해자에게 각종 불이익을 줄 수 있는 사용자였다. 게다가 피해자는 안희정을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비서였다. 안희정은 ‘모두가 나에게 노(no)라고 할 때 너는 예스(yes)를 해야 한다’는 수칙을 수시로 주지시킬 정도로 둘의 관계는 위계적이었다.

물론 일반으로 말해, 위계 관계에 있는 유력 정치인과 비서 사이에도 자유의사에 따른 합의적 성관계나 연애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위력의 존재가 곧 행사”라며 둘을 구분할 필요조차 부인하는 여성주의 일각의 견해는 기계적이다. 결국 성관계에서 위력이 작용했는지를 구체적 정황에 비추어 판단해야 한다. 그런데 성관계에 위력이 작용했음직한 정황들이 여럿 있어 안희정의 결백을 단정할 수는 없다.(정황들의 자세한 내용은 위에서 언급한 본지 기사 ‘안희정 성폭력 무죄 판결 비판 ― 가해자가 위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라면 피해자가 두려워했음직하다’를 보시오.)

안희정 재판에 대한 저자의 주장들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이 때문에 이 책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전혀 아니다. 성범죄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는 방법을 다루는 부분들은 모두 설득력이 있다.

특히, 저자의 신중하고 논리적인 접근법은 이 문제를 다룰 때 고민해 봐야 할 점들을 제공해, 배울 점이 매우 많다. 무엇보다, 회색 지대가 많고 까다롭고 민감한 성 관련 분쟁을 현명하게 다루려면 일도양단 식으로 치우쳐선 안 된다는 점을 잘 보여 준다.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