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성폭력 수사 매뉴얼 개정:
수사기관에 대한 여성들의 정당한 분노가 반영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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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1일 법무부와 대검찰청은 ‘성폭력 수사 매뉴얼’을 개정했다. 성폭력 여부를 명확하게 판단할 때까지 성폭력 무고 수사를 중단하는 것이 그 골자이다. 이번 성폭력 수사 지침 개정은 법무부 성희롱성범죄대책위원회의 권고에 따른 것이다.
올해 미투 열풍 속에서 성범죄에 대한 분노와 함께 수사기관의 보수적 태도를 성토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도 커졌다. 특히 5월에는 여성 대상 몰카범죄 피해를 무시해 온 경찰과 검찰에 대한 여성들의 분노가 수십만 명의 청원과 6월 3만여 명의 시위로 폭발했다. 이번 성폭력 수사 지침 개정은 이런 일반 여성들의 반발을 반영한 것이다.
성폭력 피해자 지원 단체 등 많은 단체들은 수사기관이 성차별적 편견에 따라 성폭력 피해자들을 근거 없이 의심해 온 관행을 비판해 왔다. 무고 수사나 명예훼손 고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피해 여성들이 신고를 주저한다는 지적도 많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번 수사 지침 개정을 환영했다.
물론 반발도 있다. 유명 유튜버 양예원 씨를 성추행하고 노출 촬영을 강요한 혐의로 고소된 스튜디오 실장 A씨가 검찰의 수사 지침 개정안에 대해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이 지침이 헌법이 보장하는 평등권과 형사 피해자의 재판 절차진술권을 침해한다는 것이다.
진보 성향 사람들 중에서도 반대 의견이 있다. 2017년 1월 〈미디어 오늘〉에 ‘성폭력 무고죄 적용 유예를 반대하는 이유’라는 글을 쓴 르포작가 이선옥 씨는 이번 수사 지침 개정을 반대하며 그 글을 〈리얼뉴스〉(5월 31일자)에 다시 게재했다.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 출신인 더불어민주당 정춘숙 의원이 2016년 말 대표발의한 성폭력처벌법 개정안에 반대한 글이다.
이 법안은 성폭력 피해자가 무고 혐의로 고소·고발되는 경우, 성폭력 범죄에 대해 “검찰의 불기소 처분이 종료되거나 법원의 재판이 확정되기 전까지” 무고 사건의 조사·수사·심리·재판을 유예하자는 것이다. 〈노동자 연대〉 196호에서 필자는 이 법안의 취지를 지지했다.
이선옥 씨는 “무고는 심각한 범죄”이고 “유독 성범죄에 한해서만 예외적 장치를 두는 것은 자칫 공정하게 보장되어야 할 기본권을 적용받지 못하는 2등 시민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며 이번 수사 지침 개정에 반대했다.
성폭력 무고로 피해받는 사람들이 소수이지만 있는 게 엄연한 사실이다. 성폭력 무고 피해자들이 겪는 고통이 엄청나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따라서 여성 차별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성폭력 무고 피해 문제를 무시해선 안 된다. 이선옥 씨가 이 점을 지적한 것은 이해할 수 있다. 무고죄 수사 유예가 무죄 추정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지적도 기본권과 헌법 원리상으로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사회에 만연한 성차별이 경찰·검찰·사법부에도 깊이 스며들어 있어서 여성들이 성폭력 피해 호소 과정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일이 훨씬 많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이번 수사 지침 개정도 여성들의 불만이 커, 보수적 국가기관인 검찰과 법무부가 그 불만을 약간 인정한 것이다.
성폭력 무고의 통념과 진실
지난해 이선옥 씨는 “성범죄에서 무고의 비율은 다른 범죄보다 몇 배 높다”고 주장했지만, 근거가 빈약하다. 보수 언론이 이런 주장을 흔히 되풀이하지만, 한국에는 전체 무고와 분리된 성폭력 무고 통계 자체가 없다.
성폭력 무고 기소가 늘어나고 있지만 이것이 곧 여성의 성폭력 허위 신고가 늘어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니다. 성폭력 범죄 친고죄 폐지 뒤 검찰이 뚜렷한 기준 없이 무고죄 기소를 남발하고 있다는 비판이 많이 나온다.
성폭력 무혐의 판정이 많다는 것도 성폭력 무고가 흔하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무혐의 판정을 받은 사건이 모두 무고 사건인 것은 아니다. 성폭력 범죄는 그 특성상 신고 여성의 진술을 제외하고 뚜렷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경우 무혐의 판정이 내려지기 쉽다. 그러나 증거 불충분이 곧 해당 신고의 허위성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수사기관의 무관심이나 편견이 작용해 초기 수사가 제대로 안 돼 증거 확보에 실패하는 일이 드물지 않고, 심지어 명백한 물증이 있는데도 무혐의 판정이 내려지기도 한다.
미국과 영국 등 해외 연구 결과를 봐도, 성폭력 신고 여성은 거짓말을 잘 한다는 편견이나 성폭력을 별것 아닌 것으로 취급하는 시각 등의 이유 때문에 조사 자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한국은 신뢰할 만한 통계가 없지만, 해외의 사례를 보면 허위 강간 신고가 많다는 통념은 잘못된 것이다. 미국의 여성 대상 범죄 최고 전문가로 꼽히는 법학자·변호사인 조디 래피얼은 《강간은 강간이다》(글항아리, 2016)에서 미국의 강간 허위 신고율을 2~8퍼센트로 추정했다. 2013년 영국 검찰청은 17개월간 접수된 5651건의 강간 신고 중 단지 35건(0.6퍼센트)만이 허위 신고였다고 보고했다.
이런 통계가 뜻하는 것은 성폭력 신고 여성의 압도 다수가 진실을 말한다는 것이다. 물론 많은 여성들은 성폭력 신고를 꺼린다. 여기에는 피해의 다수가 잘 아는 관계에서 일어난다는 점이 작용한다. 또한 길고 힘든 수사와 재판 과정에 대한 두려움도 상당히 작용한다.
그럼에도 일부 여성들은 이런 고통을 무릅쓰고 사법 당국에 피해를 호소한다. 따라서 경찰과 검찰이 자의적으로 여성들의 피해 호소를 재단하는 게 아니라 일단 여성들의 신고를 진중하게 받아들여 철저히 수사하는 게 필요하다.
물론 이선옥 씨처럼 성폭력 피해자 보호 취지에 공감함에도 무고 피해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성폭력 사건 수사와 무고 수사가 동시에 이뤄지는 것이 증거 확보에 더 낫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성폭력 무고가 매우 과장돼 있긴 해도 실제로 존재하므로, 억울하게 성폭력범으로 몰리는 사람들이 없도록 하려는 취지는 공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성폭력 피해 수사와 무고 수사가 동시에 이뤄지면 성폭력 피해자가 심리적으로 위축되기 쉽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나중에 가해자로 판명되는 사람 다수가 무고나 명예훼손을 피해자를 위축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해 왔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성폭력 수사·재판 과정은 피해자에게 이미 충분히 힘든 일인데, 억울하게 무고죄 피의자로까지 몰리게 되는 상황은 없어져야 한다. 따라서 성폭력 수사에서는 피해호소인에 대한 무고죄 수사를 유예하고 성폭력 신고를 주의 깊게 조사하는 것이 우선 이뤄져야 한다. 이 과정이 철저할수록 무고 피해자가 생겨날 가능성도 줄어들 것이다.
무고죄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무엇보다 피의자나 피고인의 신상을 퍼뜨리는 언론의 선정적 보도 관행과 이에 부응하거나 부추기는 수사기관의 행태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수사와 재판 과정이 끝나기도 전에 성폭력 피의자나 피고인을 유죄로 취급하거나 그들의 신상을 공개하는 일은 성폭력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번 수사 지침 개정은 성폭력 피해자가 공정한 수사를 받아야 한다는 취지가 담겨 있다. 성차별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마땅히 그 취지를 지지해야 한다.
물론 이런 조처로 성폭력 사건의 공정한 수사·처벌이 온전하게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한국보다 성폭력 피해자 보호 제도를 훨씬 많이 갖춘 해외에서도 여성들은 여전히 성차별에 따른 사법 피해를 많이 겪는다. 따라서 대학로 3만 명 시위처럼, 여성차별에 맞서는 아래로부터 투쟁이 강화돼야 한다. 그래야 수사기관과 재판부에 존재하는 성차별적 태도가 실질적으로 도전받기가 쉬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