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사이토 고헤이):
마르크스를 탈성장 코뮤니즘으로 왜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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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주목할 만한 책이 출간됐다. 일본에서 15만 부나 팔린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이다. 이 책의 저자는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국역)로 2018년에 아이작 도이처 기념상을 수상한 사이토 고헤이(齋藤幸平)다. 그는 일본에서 이미 60만 부나 팔린 《인신세의 자본론》(국역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의 저자이기도 하다.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의 번역자 정성진 교수는 ‘제로에서 시작하는’ 의미가 초보자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도 있지만 완전히 새로운 시각에서 《자본론》을 설명한다는 뜻도 포함돼 있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어떤 점이 “새롭고 신박”할까?
이 책의 첫 부분에서 고헤이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라고 지적한다. 일반적으로 노동은 자연을 가공하고 변형해서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필요한 것을 서로 협력해서 생산하는 사회적 과정이기도 하다. 전자에는 노동수단과 생산의 조직 등이 중요하며, 후자의 경우 노동 참여자들의 사회적 관계와 특히 생산물의 통제, 분배 등이 중요하다.
고헤이가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전자의 중요성을 부각한다는 점은 기존의 설명과 차이가 있다. 고헤이는 인간의 노동이 의식적이고 합목적적일 뿐 아니라 다양하고 역동적인 방식으로 자연에 작용을 가한다고 지적한다.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가 순환적이지 일방적 통행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런데 자본주의 체제는 이런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를 파괴하고 돌이킬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
고헤이는 화석연료의 대량 소비가 파키스탄의 대홍수, 캘리포니아의 산불, 아프리카의 가뭄, 빙하와 빙상의 해빙에 따른 해수면 상승, 집중호우와 태풍의 대형화 등 기후변화를 초래했다고 지적한다. 또 육식 위주의 생활이 과도한 삼림 파괴를 유발해 생물다양성이 상실되고 있고, 신종바이러스 팬데믹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책이 지닌 장점은 환경 파괴와 기후 위기가 이윤에 대한 맹목적 탐욕의 결과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는 점이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자연의 남용으로 인한 토양의 피폐가 결국 사회의 물질적 기반을 위협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설명들 때문에 그의 책이 기후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과 특히 MZ세대에게 큰 울림을 주는 듯하다.
그런데 고헤이의 《자본론》 소개는 흔히 새로움을 좇다가 더 중요한 문제를 간과하게 되는 다른 좌파 학자들의 오류를 답습하는 것처럼 보인다.
고헤이는 “《자본론》의 분석은 ‘상품’에서 시작하지만 《자본론》 자체는 ‘부’로 시작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노동이 ‘부’(wealth)를 만들어내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 ‘부’가 상품으로 변질된다는 것이다(28쪽). 이어서 고헤이는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는 모두의 공유재산(common)이던 ‘부’가 자본에 의해 독점돼 화폐를 이용한 교환의 대상, 즉 ‘상품’이 됐다고 주장한다(33쪽). 고헤이는 공유재산의 상품화만 지적할 뿐이고 자본주의에서 생산되는 거의 대부분의 재화(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재화는 노동력이다)가 상품이 된다는 것의 모순을 보지 못하고 있다.
고헤이의 이 주장은, 얼핏 마르크스의 설명과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할 때 꼭 필요한 상품에 대한 분석 과정을 생략하고 있다. 자본주의에서 상품이 지닌 두 요소(사용가치와 가치)와 상품에 체현된 노동의 이중성에 대한 분석이 그것이다. 마르크스는 상품 분석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가 내포한 모순의 원초적 형태와 이 체제가 지닌 소외와 상품 물신성을 보여 줬다. 쉽게 말해 마르크스는 상품을 생산하는 체제에서 개인의 노동이 사회적 노동으로 인정받아야 하는 모순이 경제 위기로까지 발전할 수 있음을 지적했다. 또한 마르크스는 인간의 노동생산물인 상품이 인간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를 뛰어넘는 초인적 힘을 가진 존재로 변한다고 지적하며 이를 물신화로 표현했다. 소외와 물신성 개념은 변증법 개념, 자본 및 노동 착취에 대한 개념과 더불어 마르크스가 평생을 견지했던 이론 중 하나였다.
고헤이는 착취와 자본축적 그리고 잉여가치의 증대를 위한 노동시간 연장 등을 비교적 쉽게 설명한다. 그런데 고헤이의 《자본론》 설명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 중 하나인 자본들 사이의 경쟁과 자본축적에 대해서는 큰 비중을 두고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자본의 가치 증식 과정이 생태계의 상호 연관성을 파괴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생태사회주의
더 나아가 고헤이는 마르크스가 농화학, 식물학 등의 자연과학 분야 지식을 섭렵하면서 “다가올 포스트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을 지구환경의 지속가능성 문제와 결부해 구상”(154쪽)했는데, 이를 생태사회주의라고 설명했다. 사실 고헤이는 이전 책에서 마르크스의 사상적 ‘전환’을 더 정교하게 세 단계로 구분했다. 1840~1850년대의 생산력 지상주의 단계(지속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고 경제 성장만 추구), 1860년대의 생태사회주의 단계(지속 가능성과 경제 성장을 모두 고려), 그리고 1870~1880년대의 탈성장 코뮤니즘 단계(경제 성장은 고려하지 않고 지속 가능성만 추구)가 그것이다(《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196쪽).
자본주의 체제에 내재돼 있는 자본들 사이의 경쟁과 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본의 노력(생산력과 노동 착취의 증대 등)을 분석하고 비판하느라 평생을 보낸 마르크스가 ‘생산력 지상주의’였다는 딱지는 너무 과하다.
고헤이가 마르크스를 ‘생산력 지상주의’라고 비판한 근거는 《공산당 선언》이다. 고헤이는 이 책의 내용을 거칠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고 한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자본가들은 생산성을 높이게 되고 저임금으로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은 더 많이 생산된 상품을 구입하지 못한다. 그 때문에 과잉생산 공황이 일어난다. 공황으로 실업자가 늘어나고 더욱 빈곤해진 노동자들이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고 마침내 노동자들은 해방을 맞이한다.”
하지만 고헤이는 자신이 언급한 《공산당 선언》의 첫 부분에서 마르크스가 인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며, 그 결말은 적대하는 두 계급의 공멸로 끝날 수도 있다(미래는 결정되지 않았다는 의미)고 지적한 사실을 애써 무시한다.
마르크스가 영국의 인도 지배를 역사적 진보라고 보거나 자본주의 근대화가 후진국의 미래라고 한 주장은 그 당시에도 옹호하기 힘들다. 하지만 이미 1856~1859년에 마르크스가 인도와 중국의 반제국주의적 저항 운동을 지지한 사실을 무시한 채 그를 생애 대부분 유럽중심주의나 오리엔탈리즘에 젖어 있다고 묘사하는 것은 마르크스를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고헤이는 마르크스가 1881년 베라 자술리치에게 보내는 편지글에서 “유럽중심주의의 진보 사관을 버리고 자신의 역사관을 크게 바꾸었”(206쪽)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편지를 보낸 때에 마르크스가 입장 전환을 했다는 주장도 논쟁거리이지만 사실 입장 전환의 내용이 더 큰 문제다. 왜냐하면 고헤이는 마르크스가 “서구 사회와 비교하여 미르[러시아의 촌락공동체-필자]의 ‘경제적 우위’까지 인정”(204쪽)했고, 더 나아가 “서구가 잃어버린 평등과 지속가능성을 아직 간직하고 있는 공동체 사회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게 되었고, 심지어 그것이 코뮤니즘의 기반이 된다고까지 말했”(205쪽)다는 것이다.
고헤이는 마르크스를 근대 사회를 버리고 전(前)근대 사회로 되돌아가자고 주장한 인물로 묘사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베라 자술리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마르크스는 러시아 공동체 촌락이 사회주의적 변혁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음을 암시했지만 마르크스의 관심사는 농업공동체의 자급자족 경제가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러시아가 사회주의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서구 기술 발전과의 연결, 특히 서구 노동운동과의 상호관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마르크스는 서구 프롤레타리아 혁명과의 상호 교류 및 보완 속에서 러시아의 공동체적 토지 소유가 공산주의적 발전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봤다.
전향
고헤이가 마르크스를 왜곡한 또 하나의 쟁점은 마르크스가 말년에 ‘탈성장 코뮤니즘’으로 전향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를 자본주의적 경제 성장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탈성장론자라고 말한다면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성장 또는 발전이라는 용어가 생산성을 향상시켜 자원이나 노동력을 적게 사용하면서 더 많은 생산물을 만들어낸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마르크스가 일반적인 성장과 발전에 반대했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고헤이 자신도 지적했듯이, 음식, 의료, 교육, 돌봄 등 사회복지 서비스와 필수재가 상품이 아닌 재화로서 사회에 충분히 공급되기 위해서는 “자유롭고 평등하며 공정한 동시에 지속 가능한 사회”(《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137쪽)의 수립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고헤이는 탈성장이 기술 발전에 기대를 걸지 않고 경제 성장과 풍요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231쪽), 말년에 경제 성장을 하지 않는 정상형 경제(지속 가능하며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를 안정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체제)를 찾아나섰던 마르크스를 탈성장 코뮌주의자로 묘사한다.
이제는 고헤이가 생각한 마르크스의 ‘코뮤니즘’ 또는 ‘사회주의’ 사회에 대해 검토할 차례다. 먼저 고헤이는 “소련과 코뮤니즘은 다르다”(166쪽)고 역설한다. 고헤이는 “현존하는 ‘사회주의 국가’는 자본가를 대신해 관료가 노동자의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경제체제에 불과”하다고 지적하면서 일본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오타니 데이노스케를 따라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라고 주장했다. 관료가 특권계급이 되고 민주주의가 결여된 옛 소련과 현재의 중국을 비판하는 내용이 ‘굿바이 레닌!’이라는 장에 포함돼 있다.
그런데 이 책에는 레닌과 옛 소련 체제의 붕괴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언급돼 있지 않다. 이 책의 번역자이면서 고헤이와 공동 연구를 추진하고 있는 정성진 교수가 이 책의 번역자 자격으로 참가한 북토크에서 한 답변이 이 둘의 관계를 미루어 짐작하게 해 준다.
정성진 교수는 “레닌의 지도 하에 수립된 역사적 공산주의는 노동자계급을 착취 수탈하고 소수민족을 지배 수탈하는 국가자본주의 체제로 귀결되었”으며, “국가집권주의, 위로부터 혁명, 일국 혁명 등으로 요약되는 레닌의 이론과 실천 자체가 마르크스의 코뮤니즘과 상충되었다” 하고 주장했다. 그래서 “‘굿바이, 레닌’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성진 교수는 이전의 글에서는 레닌이 “1917년 〈4월테제〉에서 러시아혁명의 성격에 대해 레온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을 수용했”고, “혁명적 노동자운동만이 민주주의 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으며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선언했다”고 지적했다. 이어서 그는 “1917년 러시아혁명은 완전히 새로운 사회 조직인 노동자평의회, 즉 소비에트에 기초했다”(2017년에 발표한 〈레닌의 사회주의론 재검토〉)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제는 1917년 10월혁명이 “위로부터 혁명”이고 “국가집권주의”라고 비난한다.
정성진 교수의 이 주장이 고약한 것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1917년 러시아 노동자 국가의 성과와 경험을 완전히 무시한다는 점이다. 노동자 해방이자 피억압 인민들의 축제였던 러시아 혁명이 1928년 스탈린의 반혁명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요인을 갖고 있었다는 주장은 결국 1917년 러시아 혁명까지도 옹호할 수 없게 만든다. 이 혁명은 결국 관료가 지배하고 노동자 계급이 착취당하며 소수민족이 수탈당하는 그런 체제로 이어질 수밖에 없을테니 말이다.
파리 코뮌
이와 관련해 노동자 국가 문제에서 고헤이는 마르크스의 견해를 왜곡한다. 고헤이는 마르크스가 파리 코뮌의 경험을 기초로 “국가권력을 사용하는 것 이외의 길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216쪽)했다고 지적하며 파리 코뮌은 “국가가 아닌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민주적 정치형태”(215쪽)라고 강조했다. 고헤이는 마르크스가 최초의 노동자 국가인 파리 코뮌을 얼마나 열렬히 지지했는지를 완전히 무시한다. 마르크스는 파리 코뮌이 “본질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정부이며, 사적 전유계급에 대항한 생산계급의 투쟁의 산물”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마르크스는 파리 코뮌이 “수탈자의 재산을 수탈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는 점에서 여전히 계급지배에 기초한 체제이고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막연한 열망만을 표현한다고 지적했다. 이는 파리 코뮌이 공산주의로 나아가는 과도기에 꼭 필요한 노동자 정부이자 국가라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고헤이가 바라는 코뮨주의는 어떻게 달성할 수 있을까? 고헤이는 “마르크스에게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데 중요한 것은 국가권력의 탈취나 정치체제의 변혁이 아니라 경제 영역에서 이 물상화의 힘을 억제하는 것”(강조는 원문)이라고 주장한다. 이어서 그는 “요컨대 상품과 화폐에 의존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도록 일상에서 선택의 여지를 넓혀 가는 것”(177쪽)이라고 설명한다.
마르크스는 노동자 계급의 자력 해방을 위한 이론과 전략·전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그런 그에게 자본가 계급의 국가 권력에 대항하는 계급 투쟁이 아니라 상품과 화폐에 의존하지 않는 삶을 추구한 인물이라고 말한다면 너무 심한 왜곡 아닐까?
더 나아가 고헤이는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도 시장은 있었기 때문에 굳이 시장을 완전히 부정할 필요도 없다”(225쪽)고 주장한다. 그래서 고헤이가 제시하는 대안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시작된 ‘뮤니서펄리즘’(지역자치주의)과 글로벌 자본주의에 맞서는 지방자치단체의 글로벌 연대라고 주장한다.
이런 사회를 누가 건설할 것인가? 이 점에서도 고헤이는 마르크스가 역사 변화의 주체라고 말한 노동자 계급(프롤레타리아트)을 변형시킨다. 고헤이는 “프롤레타리아트라고 하면 남성 공장 노동자를 떠올리는 사람도 많겠지만, 자본주의 아래에서 부정적 영향을 받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모두 프롤레타리아트”(237쪽)라고 주장했다.
고헤이가 주장하는 정치적 입장은 자율주의다. 국가에 대항하지 않고, 자본과 화폐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공동체를 건설하며, 자본주의에 의해 피해를 입는 모든 사람들을 노동자 계급과 동등한 지위와 영향력을 갖는다고 보는 시각이 자율주의 정치의 특징들이다. 자율주의는 2000년대 초반 반자본주의 운동에서 큰 힘을 발휘했지만, 2001년 아프간 전쟁과 2003년 이라크 전쟁 같은 제국주의 전쟁과 반자본주의 시위대에 대한 국가의 탄압(2001년 G8 반대 시위에서 경찰 총격으로 이탈리아 청년 카를로 줄리아니가 죽었다)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자율주의 정치는 국가에 대항하지 않고도 공산주의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국가가 공산주의 운동을 저지하고 나설 때 자율주의는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사이토 고헤이의 이 책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자율주의 정치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율주의가 이미 20여 년 전에 그 정치적 한계를 드러냈듯 그의 《자본론》 해설에서도 ‘신박한’ 내용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