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스 캘리니코스 방한 강연:
《자본》 코드 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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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석학으로서 런던대학교 킹스칼리지 유럽학 교수이고,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중앙 위원장인 알렉스 캘리니코스(사진)가 8월 7~10일 노동자연대가 주최한 ‘맑시즘2014’ 참가를 위해 방한했다. 이 글은 캘리니코스가 8월 8일 강연한 ‘《자본》 코드 풀기’를 녹취한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본에 대해 얘기합니다. 그 이유 하나는 올해 초 영어로 출간된 책 한 권입니다. 그 책은 프랑스인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쓴 《21세기 자본》입니다. 주류 언론이 이 책에 대해 여러 논평을 내놓았습니다.
이 책에 관해 조금 말씀드리겠습니다. ‘21세기 자본’이라는 책 제목은 사실 마르크스의 걸작 《자본》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피케티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고, 그 스스로도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책 제목을 ‘21세기 자본’이라고 지은 것을 보면, 피케티는 19세기에 마르크스가 했던 일을 21세기에 해 보겠다는 야심이 있었던 듯합니다.
마르크스의 《자본》은 단지 19세기뿐 아니라, 21세기에도 마찬가지로 유용한 책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인정합니다.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 강의》(강신준 옮김, 창비 출판, 2011)가 큰 인기를 얻은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데이비드 하비처럼 저도 마르크스의 《자본》이 왜 오늘날의 현실에도 잘 들어맞는지를 제 책(Deciphering Capital, Bookmarks Publication, 2014)에서 밝혔고, 오늘 강연에서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책의 제목은 ‘《자본》 코드 풀기’인데, 이중적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 ‘자본’은 마르크스의 저작을 가리킬 수도 있고, 그 저작이 다룬 대상, 즉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제 책에는 《자본》을 어떻게 이해할지에 관한 설명이 많습니다. 《자본》은 오늘날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자본》보다는 자본주의에 초점을 더 맞추려고 합니다. 물론 《자본》에 대해서도 얘기할 것입니다.
오늘날 왜 자본에 관한 얘기가 많을까요?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왜 그토록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답은 2007년 8월 세계경제 위기가 시작된 지 올해로 정확히 7년이 됐지만 아직 진행중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바보가 아니고서는 경제 위기가 끝났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많은 주류 경제학자들도 세계 자본주의가 여전히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음을 시인합니다. 예컨대 그들은 새로운 경제 침체의 시대에 대해 말합니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마이클 로버츠가 쓴 장기 불황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입니다. 장기 불황은 오랜 기간 경제 성장 속도가 매우 느리고 때로는 경제가 수축하는 상황을 뜻합니다.
사람들이 자본을 그토록 많이 거론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지금의 시기가 경제 위기 시기일 뿐 아니라, 경제적 불평등이 커지는 시기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불평등
심지어 세계 자본주의의 대주교라고 할 수 있는 IMF 같은 기구들조차 불평등이 너무 심하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대다수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계속 하락하는 반면, 극소수는 점점 더 부유해집니다. 예컨대 제가 살고 있는 런던은 백만장자 수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도시입니다. 지금은 영국 정부가 러시아에 경제 제재를 가한다고 하는 상황인데도 많은 러시아 갑부들이 거액을 들여 영국 비자를 구입합니다.
세계경제 위기와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가 결합되면서 정치경제학에 비판적인 사상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해, 주류 경제학은 무용지물임이 판명났습니다. 이 자리에 경제학 학위가 있는 분이 있다면 미리 사과드리겠습니다. 경제학 학위는 ‘나는 경제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소이다’ 하는 것을 증명해 주는 증서와 다름없습니다.
주류 경제학의 눈으로 보면 경제 위기는 일어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주류 경제학은 현재의 위기를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위기의 원인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마르크스가 《자본》의 부제로 ‘정치경제학 비판’을 쓴 것은 적절해 보입니다.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말로써 마르크스가 단지 당시 정치경제학을 비판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을 비판하는 것을 통해 경제 체제로서 자본주의의 동역학을 더 잘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피케티의 저작을 논하는 것이 유용합니다. 피케티는 주류 경제학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매우 추상적이고 몰역사적이라는 것 등의 문제이죠. 그러나 여러 면에서 피케티 자신도 주류 경제학의 이론적 틀에 갇혀 있습니다.
피케티는 무엇을 말했을까요? 피케티 책의 주요 강점은 경험적 자료를 한데 모았다는 것입니다. 피케티는 다른 경제학자들과 공동으로 작업하면서 선진국의 불평등 문제를 심도 있게 연구했습니다. 이 연구를 통해서 그가 밝혀 낸 것은 지난 2백 년 동안의 자본주의 역사 내내 불평등 수준이 매우 높았다는 사실입니다.
불평등 수준은 대략 1백 년 전인 20세기 초에 최고조에 이르렀습니다. 피케티가 사용하는 주요 지표 하나는 국민소득과 자본의 양의 관계를 나타낸 ‘자본/소득 비율’입니다. 자본/소득 비율은 1914년에 6백~7백 퍼센트로 최고점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사회의 부는 대부분 상속된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부를 가진 부자들은 그 부를 자식들에게 물려 줬습니다.
피케티는 이런 패턴이 20세기 전반기에 조금 바뀌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세계 대공황과 양차 세계대전이 그런 부의 규모를 축소시켰습니다. 특히 전쟁을 수행해야 했던 각국 정부들은 세금을 더 많이 걷었고, 그래서 부자들이 물려 줄 수 있는 부가 조금 줄었습니다. 그러다가 20세기 후반기에 들어서, 특히 신자유주의 시대를 거치며 불평등이 다시 커졌습니다.
피케티는 현재의 추세가 역전되지 않으면 불평등이 1914년 이전 수준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즉, 부자들이 자식들에게 물려 주는 부가 경제 전체를 쥐락펴락하는 수준으로까지 갈 것이라는 뜻입니다.
피케티의 수치
이런 경험적 분석은 매우 효과적이고 설득력이 있습니다. 영국의 주요 친기업 신문 〈파이낸셜 타임스〉는 피케티가 제시한 수치를 반박하려다 누워서 침 뱉는 꼴이 됐습니다. 심지어 대다수 주류 경제학자들조차 〈파이낸셜 타임스〉가 틀렸음을 인정했습니다.
피케티가 제시한 수치들은 좋습니다. 그러나 피케티의 약점은 이 수치들을 꿰서 설명하는 방식에서 비롯합니다. 피케티는 불평등의 증가를 아주 단순하게 설명합니다. ‘r이 g보다 크다’라는, 이제는 많이 알려진 공식으로 설명합니다. r은 자본수익률로, 자본을 투자해서 버는 수익이 얼마인지를 나타내는 수치입니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이윤율이라고 불렀습니다. g는 경제성장률로, 한 나라 경제의 산출량이 얼마나 늘었는지를 나타내는 수치입니다.
피케티는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대체로 더 높다고 말합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부자들은 계속해서 더 부유해질 것입니다. 부자들이 소비를 경제성장률만큼 늘리더라도 이윤은 여전히 남습니다. 부자들이 그 남은 이윤을 저축한다면 자본의 규모가 커지고 국가 경제의 규모보다 자본이 더 커집니다. 그래서 부자들의 경제적 비중이 나머지 사람들에 견줘 더 커집니다.
제가 조금 간단하게 말씀드렸지만, 피케티의 분석이 불평등의 증가를 기계론적으로 설명한다는 느낌이 드실 것입니다. 불평등의 증가를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사태를 너무 단순하게 보는 면이 있습니다. 이는 피케티가 여러 면에서 여전히 주류 경제학의 틀을 벗어나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다른 경제학자들처럼 피케티도 전쟁과 경제 위기가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발전과 긴밀히 연관돼 있음을 보지 않습니다. 전쟁과 경제 위기는 자본주의 외부로부터 오는 충격이라는 것입니다. 그냥 우연히 생기는 불운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마치 제1차세계대전과 대공황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반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제1차세계대전, 대공황, 최근의 경제 위기가 자본주의에 내재한 모순과 자본주의 열강 사이의 경쟁에서 비롯한 것으로 봅니다.
문제는 자본 개념 자체와 관련 있습니다. 피케티는 갖가지 부를 모두 자본으로 봅니다. 공장·주택·귀금속 등 돈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자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본은 사회적 관계
마르크스는 자본을 전혀 다르게 규정했습니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자본은 사회적 관계입니다. 그는 ‘자본은 특정 사물이 아니다’ 하고 힘주어 주장했습니다. 마르크스는 토지나 설비 등이 자본이라고 본 당시 주류 경제학자들에게 반대했습니다. 마르크스는 ‘그런 것들은 그저 생산에 사용될 수 있는 요소들일 뿐이다’ 했습니다.
오늘날 경제 체제를 규정하는 자본은 사회적 관계입니다. 더 정확히 말해, 자본은 아주 핵심적인 두 가지 관계로 규정됩니다.
첫째, 자본과 임금노동의 관계입니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규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관계는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존재하는 착취 관계입니다. 자본가(기업)들이 노동자들에 대해 가지는 핵심적 우위는 엄청난 액수의 자금이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노동자들은 오직 일할 능력, 즉 노동력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불평등입니다 노동자들은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만 생존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돈에 힘이 있다고 했는데, 자본가들은 그 돈 덕분에 노동자들을 착취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해, 착취는 노동자로 하여금 이윤(마르크스의 말로 잉여가치)을 창출하는 노동을 하도록 강요하는 것을 뜻합니다.
자본주의를 규정하는 또 다른 중요한 관계는 자본가들 사이의 관계입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은 오로지 많은 자본들(‘다수 자본’)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달리 말해, 자본가 계급은 조화롭게 통합돼 있는 단일 집단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본가들은 ‘서로 다투는 형제들’이라고 마르크스는 말했습니다. 그들은 절도 행각을 함께 벌이는 데서는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는 도적떼와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절도에 성공한 뒤에는 그것을 어떻게 분배할지를 두고 서로 싸웁니다.
그들 내부 다툼의 형태는 경쟁입니다. 자본주의는 착취에 바탕을 두고 경쟁에 의해 추동되는 체제입니다.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착취해서 자본을 축적하는 것은 그들이 단지 사악하고 탐욕스러워서가 아닙니다. 물론 사악하고 탐욕스러울수록 자본가로서 생존하는 데 유리하겠지만 말이죠.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착취하지 않으면, 그래서 자본을 축적하지 않으면 결국 경쟁자들에게 밀려날 것입니다.
어제 개막식에서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의 연설을 들었는데요. 만약 삼성이 이제는 노동자들을 잘 대해 주겠다며 노동자들로부터 추출하는 잉여가치를 줄인다고 한다면, 삼성에 대한 애플의 우위가 점점 더 강해질 것입니다.
착취와 경쟁
자본이 이처럼 착취와 경쟁이라는 두 가지 관계를 근간으로 한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피케티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많은 마르크스주의적 좌파들도 자본의 본질이 관계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제국》을 쓴 토니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그렇습니다. 그들은 자본을 그저 기생적인 사물로만 봅니다. 그와 별도로 다른 한편에서 사람들이 창조적 생활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찌어찌해서 자본이 사람들의 창조적 활력을 빨아먹으며 기생충처럼 몸집을 키울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실을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자본은 일련의 적대 관계를 뜻합니다. 이 적대 관계 속에서 노동자와 자본가는 서로 의존하는 동시에 서로 투쟁합니다.
자본의 본질을 이렇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낳는 치명적 결과는 자본주의 체제의 동역학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피케티가 그렇습니다.
피케티가 상정한 자본주의에서는 실질적으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는 자본 개념을 이상하게 규정했고, 그래서 그가 말한 자본수익률은 자본주의 역사뿐 아니라 지난 수천 년 동안 변하지 않은 것이 됩니다.
그러나 자본 개념을 마르크스처럼 이해하면 완전히 다른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역사 자체가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적대 관계에 의해 변해 왔습니다. 이 말은 자본주의가 계속해서 조방적으로, 그리고 집약적으로 성장한다는 뜻입니다.
자본주의는 경쟁적 축적 체제입니다. 자본가들은 경쟁자들을 더 효과적으로 물리치기 위해 투자를 합니다. 그 속에서 자본가들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노동력·시장·원료를 차지하려 애쓸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조방적 성장, 즉 양적 확장을 추동합니다.
지난 몇십 년 동안 자본주의의 조방적 성장이 일어난 주된 무대는 동아시아였습니다. 그 시작은 남한과 타이완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중국으로 확산됐습니다. 이제는 베트남과 타이 등지로도 퍼지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집약적으로도 성장합니다. 집약적 성장은 달리 말해, 개별 국가 경제 내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대중을 자본의 착취적 힘에 더 깊숙이 밀어넣는 것을 뜻합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영국에서 벌어지는 공공부문에 대한 공격은 착취를 강화하려는 노력의 일부입니다.
이 과정은 위기를 낳기도 합니다. 경제 위기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거나 외부로부터 오는 충격이 아닙니다. 경제 위기는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 내재한 장애물입니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경제 위기를 설명하는 방식은 좀 복잡합니다. 그러나 경제 위기의 요인으로 마르크스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은 이윤율 저하 경향입니다. 즉, 피케티와는 달리 자본주의에서 자본수익률이 일정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등락을 거듭하는데, 이것이 중요한 경제적 결과를 낳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경쟁 때문에 자본가들은 생산을 효율화하는 데 이윤을 재투자합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생산수단, 즉 기계류나 기술에 대한 투자가 더 많아집니다. 생산에 로봇을 더 많이 이용하게 되는 것이 이 경향의 한 사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윤의 원천이 노동자들의 ‘산 노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이윤을 창출하는 노동자에 대한 투자보다 전반적 투자가 더 빨리 커지는 경향이 생깁니다. 그 결과 이윤율이 떨어집니다. 이것이 현재 경제 위기의 근저에 있는 현상입니다.
한국 정부든 영국 정부든 하는 얘기는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돈이 없으니 우리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근검절약해야 한다’는 것이죠.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지난해 전 세계 최상위 2천 개 기업이 투자하지 않고 사내에 쌓아 놓은 돈이 4조 5천억 달러였습니다. 달리 말해, 경제가 정체하고 있는 것은 자본가들이 투자하지 않기 때문이고, 자본가들이 투자하지 않는 것은 이윤율이 낮기 때문입니다.
상호 의존 관계
자본 관계 발전의 동역학에서 비롯하는 가장 근본적인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자본 관계는 자본과 임금노동의 상호 의존 관계입니다. 노동자들이 생존하려면 자본가들이 노동자를 고용해야 합니다. 반대로, 자본가들도 이윤을 창출하려면 노동자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성장할수록, 그리고 특히 위기가 닥치면, 자본과 임금노동 사이의 적대도 마찬가지로 더 커집니다. 이것은 현재 동아시아에서 특히 두드러집니다.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이 스스로 노조를 만들고 조직화하기 시작한 것도 이런 적대가 성장하는 것을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또한 노동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이 통치한다는 중국·베트남·캄보디아 등지에서도 이런 적대의 성장을 볼 수 있습니다.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고 거리 시위를 벌이는 일이 점점 더 흔해지고 있습니다.
이제 이처럼 자본을 관계로서 이해할 때 도출되는 중요한 정치적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자본』 코드 풀기》를 쓴 이유는 너무나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본을 관계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본을 관계로서 이해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자본가들이 서로 경쟁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자본가들이 체제를 배후에서 다 좌지우지하는 것으로 오해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저 맹목적으로 서로 경쟁하고 투쟁합니다. 자본가들이 맹목적으로 쟁투를 벌이므로 자본주의 체제가 불안정에 빠지고 전쟁이 일어납니다.
자본주의의 더 핵심적인 관계인 착취는 훨씬 더 근본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즉,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에게 훨씬 더 크게 의존한다는 뜻입니다. 노동자들은 자본주의를 전복할 잠재력이 있습니다. 자본이라는 관계를 끝장내는 것도 바로 이 노동자들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오로지 필요한 것은 노동자들이 이 힘을 자각하고 사용하는 것입니다.
혁명적 사회주의도 따지고 보면 결국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힘을 자각하고 사용해서 체제를 무너뜨리도록 돕고 촉진하는 것입니다.
정리발언
어떤 분이 마르크스의 자본 개념을 다시 설명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마르크스의 개념과는 대조적으로 주류 경제학자들은 이윤을 추출할 수 있는 요소를 모두 자본으로 봅니다. 피케티도 이런 규정을 받아들여, 예컨대 부동산도 자본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무언가가 이윤을 벌어다 주는 자본이 되는 것은 오로지 매우 특수한 경제 관계에서만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 관계는 첫째, 가장 핵심적으로는 자본과 임금노동의 관계인 착취입니다. 둘째, 축적과 경제 위기를 낳는 자본들 사이의 경쟁입니다.
옛 소련에 마르크스의 자본 개념이 적용될 수 있는가
이런 자본 개념은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들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옛 소련을 보면, 자본 관계의 첫 번째 측면인 자본과 임금노동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극단적인 형태로 존재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원자화돼 있었고, 노동조합이 없었고, 국가 관료인 경영진에게 극도로 착취당했습니다.
자본 관계의 두 번째 측면인 자본들 사이의 경쟁은 어땠을까요? 크게 봐서 이 관계는 옛 소련 내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공산당과 국가의 관료들이 경제를 통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산당과 국가의 관료들이 경제를 운용하는 데서 완전히 자율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매우 강력한 경쟁 관계에 종속돼 있었습니다. 이 경쟁은 미국과의 지정학적 경쟁이었습니다.
냉전 때 옛 소련은 미국과 군사적으로 경쟁했습니다. 군사력을 양성하는 데 필수적으로 필요한 중공업을 구축하려면 매우 높은 수준의 축적이 필요했습니다. 어떤 분이 옛 소련에서는 그래서 혁신이 없었냐고 질문하셨는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늘날 러시아 국가는 해킹 기술이 뛰어납니다. 우크라이나 총리가 러시아 정보기관으로부터 해킹을 당했다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러시아의 해킹 능력이 뛰어난 이유는 옛 소련 시절 국방 목적으로 IT 산업이 육성됐고, 그 과정에서 IT 인재들이 양성됐기 때문입니다.
옛 소련이 붕괴한 것은 근본적으로는 미국 경제가 언제나 소련 경제보다 훨씬 더 크고 더 선진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에서 등장한 것은 국가자본주의와 자유시장 자본주의가 혼합된 체제였습니다. 이 혼합된 체제는 중국에서는 국가의 통제를 더 많이 받는 형태를 띠었습니다.
데이비드 하비의 ‘과정으로서 자본’ 개념
다음으로 마르크스를 해석하는 방식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분이 데이비드 하비의 ‘과정으로서 자본’ 개념에 대해 질문하셨습니다. 다른 분이 말씀하셨듯이, 그 개념은 특히 마르크스의 《자본》 제2권에 나오는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자본》 제2권에서 자본의 순환을 분석했습니다: 화폐자본, 생산자본, 상인자본. 마르크스가 자본을 순환하는 과정으로 봤다는 것은 완전히 사실입니다.
이 순환에서 자본가들은 자금을 투입해 노동자를 착취하고, 운이 좋으면 더 많은 자금을 가지고 순환의 끝에 도달합니다. 하비의 개념은 옳은 것이지만, 자본을 관계로 볼 때만 그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본은 과정이지만, 그 전에 관계입니다.
한 분이 자본 일반과 많은 자본들(‘다수 자본’)의 구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그룬트리세》(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말한 것으로, 자본의 본질(자본 일반)과 자본들 사이의 경쟁적 투쟁 과정(많은 자본들)의 구분을 뜻합니다.
그러나 《자본》을 포함해 그 뒤에 쓴 글들에서 마르크스는 다소 단순하게 경쟁을 자본의 본질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이에 대해 양면적이었지만 경쟁에 관한 논의를 점점 더 자본 일반에 대한 분석에 통합시켰습니다.
자본가들은 왜 경쟁하는가
그래서 저는 경쟁 자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분이 자본가들은 왜 맹목적으로 경쟁하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핵심적으로, 체제의 개별 단위들, 즉 개별 자본, 개별 기업, 그리고 때때로 개별 국가가 오로지 자기 이익을 챙기는 데만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는 《자본》 제1권에서 하루 노동시간을 법으로 제한하기 위해 결국 국가가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했습니다. 노동자들을 계속해서 장시간 일시키는 방식은 19세기 영국에서는 점점 더 효율성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본가 계급 전체의 입장에서 볼 때 하루 노동시간을 법으로 제한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개별 자본가가 혼자서 노동시간을 줄였다면 그는 시장에서 퇴출됐을 것입니다. 이처럼 자본가들 전체에게 이익이 되는 조처를 도입하는 데는 국가의 개입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행태는 오늘날 기후변화와 관련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는 것은 자본가 계급 전체는 물론이고 인류 전체에게 이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어떤 자본주의 국가가 나서서 먼저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면 그 국가는 다른 국가와의 경쟁에서 뒤처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전 세계 자본주의 국가들을 강제할 만한 세계 정부가 없습니다.
경제 위기 발생
어떤 분이 자본들 사이의 경쟁이 왜 경제 위기를 낳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제가 방금 말씀드린 경쟁의 본질이 경제 위기를 낳는다고 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본가들은 각자의 이익만을 추구합니다. 그것이 체제 전체의 이익과 충돌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자본들 사이의 경쟁이 위기로 이어지는 것을 더 엄밀하게 설명해 주는 개념은 이윤율 저하 경향입니다. 자본가들은 단지 마음 내켜서 생산수단에 대한 투자를 늘리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주고받는 경쟁 압박 속에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윤율 저하 경향과 금융의 관계에 대해 질문하셨습니다. 마르크스는 금융 위기에 큰 관심이 있었습니다. 마르크스는 금융시장에서 일어나는 호황과 공황의 순환이 자본 축적을 추동하고 위기를 일으키는 데 일조한다고 했습니다. 금융시장에서 거품이 일고 장밋빛 전망이 판칠 때는 더 큰 규모로 투자하기 쉬워집니다. 반면 금융시장이 공황에 빠지면 기업들이 대규모로 파산합니다.
이것은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윤율이 떨어진다는 것은 이윤에 견줘 자본이 너무 많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자본가들은 이윤이 충분치 않아서 투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금융 위기가 일어나 기업들이 파산하면, 이것은 자본을 파괴하는 데 도움을 주고, 그 덕에 이윤율이 회복됩니다.
어떤 분이 자본들이 경쟁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담합을 하기도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업 간 담합이 경쟁을 종식시킬 정도로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레닌은 자본주의가 불균등하게 성장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일부 기업이나 국가가 경쟁자들보다 더 빨리 성장하고 우위를 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불균등 발전은 체제를 불안정하게 합니다. 즉, 경쟁이 더 심해지고 위기가 더 빈번히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기술 혁신과 노동계급 투쟁
마지막으로, 어떤 분이 생산과 더 일반적으로는 사회가 점점 더 디지털화되는 상황에서 마르크스는 시대에 뒤떨어지게 된 것 아니냐고 질문하셨습니다. 물론 마르크스는 인터넷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방편으로서 기술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잘 이해했습니다. 그는 19세기 영국에서 자동 방적기가 등장한 것을 예로 들어 설명했습니다. 그는 노동자들이 자동 방적기를 ‘아이언 맨’이라고 부르며 변화에 저항한 사례를 듭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역사를 죽 살펴보면, 기술 발전이 일부 노동자를 약화시켰지만, 다른 노동자들을 성장시켰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 일반으로 말해,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을 사랑하게, 또는 자본주의를 사랑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예컨대 영국에서는 사람들이 은행가와 정치인을 혐오합니다. 한국에서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자본가들은 결코 우리로 하여금 자본주의에 열광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우리가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 정도입니다. 즉, 자본가들은 우리의 의식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단지 우리에게는 힘이 없다는 체념을 부추길 수만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이런 무기력은 오로지 실천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계급투쟁을 중요하게 봤습니다. 오로지 계급투쟁을 통해서만 노동계급이 자신의 힘을 자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1987년 남한 노동자들의 투쟁을 담은 사진을 본 기억이 아직도 납니다. 군부독재를 종식시킨 항쟁이었습니다. 그 사진에서는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힘을 자각한 노동자들의 표정이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이제 독재자의 딸이 여러분을 통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남한에서는 노동계급 투쟁도 되살아나기 시작한 듯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노동자 투쟁이 발전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비록 그 투쟁이 처음에는 경제적 쟁점들을 놓고 시작됐더라도, 그 투쟁이 발전할수록 노동자들의 자신감과 힘이 더 강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직접 투쟁하는 노동자들뿐 아니라 다른 노동자들도 그렇습니다. 이를 통해 노동자들은 박근혜뿐 아니라 박근혜가 대변하는 체제도 날려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녹취 김지은·전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