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지성 부르디외를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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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23일 프랑스의 탁월한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가 파리의 한 병원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1930년 프랑스 남부의 시골에서 태어난 부르디외는 꼴레주 드 프랑스(프랑스의 최고 석학들이 교수진으로 있는 시민 대학 또는 개방 대학) 교수를 지낸 프랑스 학계의 최고봉이었다. 그러나 그는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결코 외면하지 않고 《세계의 비참》(동문선)이라는 유명한 책에서 이를 고발했다. 죽기 전 10년 동안 부르디외는 정치 활동에 투신해 자본주의적 세계화에 반대하는 운동의 거목 중 하나가 됐다.
부르디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포스트구조주의의 거장 철학자 미셸 푸코, 질 들뢰즈, 자끄 데리다 등과 같은 세대다. 그는 파리고등사범학교에서 데리다와 함께 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인류학자이자 사회학자로서 쓴 책에서 그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와 구조주의·포스트구조주의 사이의 대립 ― 그는 이것을 쓸데없는 대립이라고 여겼다 ― 을 뛰어넘으려 했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는 개별 주체를 세계의 주인으로 보는 반면, 구조주의나 포스트구조주의는 그런 주체를 비인격적인 구조와 과정의 산물로 여긴다. 부르디외는 ‘아비투스’라는 유명한 개념을 통해 이런 대립을 피하려고 했다. 그는 사회 구조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것이 사람들의 몸에 배어 일상 생활에서 행위나 지각 양식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의 많은 저작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구별짓기》(새물결)에서는 그가 ‘문화 자본’이라고 부른 것의 불평등한 분배가 개인의 예술적 취향을 어떻게 좌우하는지를 보여 주었다. 문화 자본이란 중간계급 가정에 익숙한 상징들, 그리고 대학 입시나 고소득 직종을 위한 경쟁에서 그들의 자녀에게 결정적으로 유리한 상징들을 다루는 기술을 말한다.
부르디외는 과학이 세계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는 점을 부인하는 상대주의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는 스스로를 19세기 말 에밀 뒤르캥의 저작에서 유래한 프랑스 사회학 전통에 서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과학적 객관성을 얻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도 알고 있었다. 《파스칼적 명상》(동문선)이라는 탁월한 저서에서 부르디외는 학술 연구와 일상 생활을 분리시키는 간극을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비교적 풍족하고 여유 있는 학자 생활은 사회적 특권의 한 형태이지만 그 덕분에 평범한 물질적 압력에서 벗어나 현실의 변화를 통찰할 수 있게 해 준다고 그는 주장했다. 부르디외의 초기 저작 일부는 겉보기에 자율적인 예술가와 지식인 들의 세계가 어떻게 역사적으로 특정한 사회적 토대를 갖게 됐는지 잘 보여 준다. 그는 《예술의 규칙》(동문선)에서 19세기 파리의 모더니즘 미학이 출현하는 과정을 추적한다. 그는 끝없는 경쟁을 분석하는데, 그런 경쟁 속에서 각각의 예술적인 혁신이 더 큰 사회에 수용되고 동화됐듯이 새로운 유파들이 나타나 훨씬 더 상식에 어긋난 스타일과 기법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현대 예술은 절대적 자율성을 선언하지만, 그 발전은 부르디외가 ‘예술적 장(場)’이라고 부른 것의 사회적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 《예술의 규칙》은 현대 프랑스 사회의 탁월한 인물이 형성되는 과정을 분석했다. 그 인물은 예술이나 과학 영역에서 거둔 업적으로 명성을 얻고 그런 권위를 이용하여 공적 생활에 개입한다. 1890년대의 드레퓌스 사건에 개입한 에밀 졸라나 제2차세계대전 후의 장 폴 사르트르가 그런 예다.
생애 말년에 이런 역할을 향해 한발 나아간 사람이 바로 부르디외 자신이다. 1970년대 말에는 프랑스의 소위 ‘신철학자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스탈린주의와 등치시킴으로써 마르크스주의를 지적인 세계의 주변부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1989년 이후에는 신자유주의가 아닌 대안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1995년 11월과 12월의 공공부문 대파업에서 저항은 폭발했다. 그리고 부르디외는 그런 파업을 열정적으로 옹호했다. 그의 초기 저작들에는 피억압자에 대한 공감이 저변에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이 표면으로 떠올랐다. 부르디외는 1995년 12월에 파리 북부역 앞에서 파업 중인 철도 노동자들에게 “문명의 파괴에 맞서서 싸우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실업자나 난민 들이 직접 행동에 들어갔을 때도 그들을 지지했다. 부르디외는 가까운 협력자들과 함께 그가 ‘연구자 활동가들’의 조직이라고 부른 ‘레종 다쥐르’(‘행동해야 하는 이유들’)를 결성했다. ‘레종 다쥐르’는 값싸고 얇은 책들을 시리즈로 출판했고 이는 널리 읽혔다. 이런 책들은 부르디외가 ‘숙명론’이라고 비난한 것, 즉 정치인·언론인·학자 들이 신자유주의 정책들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데 이용한 ‘숙명론’을 산산조각냈다. 1997년 6월에 집권한 리오넬 조스팽의 ‘복수 좌파’ 연립정부가 이런 정책들을 계속 추진하자 부르디외는 가차없는 비판을 퍼부었다. 그는 ‘블레어-조스팽-슈뢰더라는 신자유주의 트로이카’에 대한 대안으로 1995년 이후 발전해 온 사회운동에 기초한 ‘진정한 좌파’(‘좌파 중의 좌파’)를 소집했다. 그는 이제 학술 세미나보다는 노동조합 대회에 훨씬 더 자주 나타났다. 농민 지도자 조제 보베는 2000년 6월 미요의 대규모 시위에 참가한 부르디외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는 이틀 동안 토론에 참가했다. 거기서 그는 다른 모든 사람들 사이에 이름 없이 앉아 있었다.” 부르디외가 비록 금융투기 반대 운동 단체인 ‘금융거래과세 시민연합’(ATTAC)의 공동 창립자 크리스또프 아기똥과 정치적으로 절친했지만, 어떤 친구에 따르면 그는 “ATTAC이 너무 개량주의적이고 정부 당국과 너무 가깝다고 생각했다.”부르디외의 저작들에서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을 찾아 내기는 어렵지 않다. 이론적으로 그의 저작들은 부당하게도 마르크스주의를 결정론으로 여기는 잘못이 있어 보인다. 정치적으로 그는 비록 국가 차원에서는 실패한 사회민주주의를 유럽 차원에서 재창조하여 자본주의를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이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부르디외는 프랑스의 탁월한 지식인이 얻을 수 있는 엄청난 명성을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에 제공했다. 반자본주의 운동은 가장 강력한 대변인 가운데 한 명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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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앨릭스 캘리니코스는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 중앙위원이며 반자본주의 연설가로도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