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혁명 그 이후 1917-1921: 러시아 내전》(앤서니 비버 지음, 눌와, 2024):
왜곡된 서사와 볼셰비키 악마화로 가득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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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 20세기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교양인, 2009),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전투》(다른세상, 2012), 《베를린 함락 1945》(글항아리, 2023) 등 꽤 인기 있는 역사서를 쓴 앤터니 비버의 최신작이 국내에 번역돼 나왔다. 이번에는 러시아 혁명과 그 뒤에 일어난 내전을 다룬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600쪽이 넘는 분량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역사에서 가장 격동적이었던 그 4년을 제대로 설명하는 책이 전혀 아니다.
1917년 러시아에서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이 일어난 이유를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최소한 그 전 20년을 살펴봐야 한다. 유럽부터 극동까지 뻗어 있는 대제국 러시아에서는 그 시기에 전제적이고 억압적인 차르 정권을 개혁하려는 여러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시도들은 관료적 국가의 계략에 의해 모두 좌절됐다. 종종 그런 시도들은 차르의 경찰과 군대가 시위를 진압하며 일으킨 피바다로 끝나곤 했다.
저자는 차르 정권하에서 러시아 노동자·농민이 겪은 고통과 천대를 짧게 다룬다. 그 고통은 제1차세계대전과 러시아 정치·군사 지도자들의 무자비함과 무능함 탓에 훨씬 악화됐다.
그러고 나서 저자는 곧장 1917년의 사건으로 넘어간다. 저자는 2월 혁명으로 차르 정권을 무너뜨리고 들어선 임시정부와 그 정부를 이끈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에게 비판적인 시각을 보이면서도, 곧장 볼셰비키, 그중에서도 블라디미르 레닌을 향후 러시아 사회가 겪는 만악의 근원으로 지목한다.
저자는 “레닌은 … 자신이 무조건 옳다고 굳게 믿었다”(71쪽)고 주장하면서, 볼셰비키의 진정한 동기가 마키아벨리적 권모술수에 있었다는 설명을 늘어놓는다. 저자는 볼셰비키가 내심 국가를 완전히 통제하려 했으면서 소비에트를 앞세워 그 의도를 숨기려 했다고 비난한다. “레닌은 마치 소비에트가 독립적인 조직이고 단순히 볼셰비키 지도부의 꼭두각시가 아니라는 듯, 모든 국가권력과 사유재산이 소비에트의 손에 들어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농민들이 토지를 소유하고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고 믿게 했다”(72쪽)는 것이다.
저자는 케렌스키가 혁명을 피바다에 빠뜨리기 위해 반혁명적 군 장성 코르닐로프와 했던 합의의 의미를 축소하면서 “코르닐로프는 정부를 전혀 전복하려 하지 않았다”(116쪽)고 단언한다.
다른 주류 역사가들과 마찬가지로 저자는 1917년 10월 임시정부의 전복을 대중의 혁명적 봉기가 아닌 볼셰비키의 쿠데타로 묘사한다. 그러나 그런 저자도 다음과 같은 레닌의 말을 은연중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혁명적인 프롤레타리아트는 대중을 선동하고 투쟁에 끌어들이는 데 있어 의회 내에서보다 의회 밖에서 투쟁할 때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훨씬 강하다.”(156쪽)
그래서 러시아 노동계급과 많은 농민은 10월 혁명으로 들어선 소비에트 정부를 자신들의 정부로 여겼다. 특히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러시아를 제1차세계대전에서 벗어나게 하는 평화 회담의 타결을 승인했을 때 특히 그랬다. 1918년 제헌의회가 소집돼 소비에트와 경쟁하는 기구가 되고, 소비에트의 우위를 인정하지 않으며 러시아를 다시 전쟁으로 끌고 들어가는 데에 전념하자, 볼셰비키가 이끄는 소비에트는 의회를 해산시켰다. 저자는 이를 두고 “갓 태어난 민주주의의 살해”(155쪽)라고 비난한다.
곧이어 저자는 볼셰비키가 ‘반혁명과 사보타주에 맞서는 전 러시아 특별위원회’(일명 체카)를 제 입맛대로 이용해 공포 정치를 저질렀으며, 이를 통해 일당 독재를 공고히 했다고 묘사한다.
사실, 제1차세계대전의 연합국 측은 백군, 사회혁명당(특히 차르 치하에서 정부 요인 암살 등 테러 활동을 하다 임시정부에서 전쟁부 차관을 지낸 보리스 사빈코프), 그 외에 러시아 우익 세력과 공모해 신생 소비에트 정부를 파괴하고 러시아를 다시 전쟁에 참여시키려 했다.
저자는 이런 사실들을 일축해 버리고는 러시아가 내전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는 상황을 다루는 장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기병도로 난도질하고, 칼로 베고, 산 채로 끓이고 태우고, 머리 가죽을 벗겨내고, 견장을 못으로 어깨에 박고, 눈을 파내고, 겨울에 피해자들을 흠뻑 적셔 얼려 죽이고, 거세하고, 장기를 적출하고, 신체를 훼손하는 이 극단적인 잔학성은 어디에서 왔는가?”(285쪽)
저자의 서술은 내전 중에 일어난 전쟁 범죄와 잔혹 행위의 책임이 볼셰비키에게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준다. 그러나 이는 사태를 지독하게 왜곡하는 것이다.
저자는 내전 과정의 세세한 사실관계의 바다에 풍덩 뛰어든다. 그 전쟁은 십중팔구 인류 역사에서 가장 잔혹한 갈등의 하나였을 것이다. 백군은 전제정을 복원하고, 그것이 아닌 정부 형태는 모두 굴복시키거나 파괴하려 했다. 볼셰비키가 아닌 사회주의 정당이 수립한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볼가강 유역의 사마라 지역에 들어선 코무치(전 러시아 제헌의회 의원 위원회) 정부의 운명이 그런 사례다.
그러나 익히 예상할 수 있듯이, 저자는 이런 사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볼셰비키를 테러의 주된 행위자로 보는 자신의 주장을 되풀이한다. 가령 저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20년 후 나치가 소련을 침공할 때 힘러의 친위대와 게슈타포는 체카의 방식에서 많은 것을 배운 것으로 보인다.”(604쪽)
〈파이낸셜 타임스〉, 〈타임스〉 등 세계적 기업주 언론들은 이 책에 찬사를 보냈다. 영국의 보수 주간지 〈스펙테이터〉에 실린 서평의 제목은 “참을 수 없는 볼셰비키의 잔혹함”이었다. 그 제목은 저자의 의도를 정확히 드러낸다. 즉, 볼셰비키를 악마화하려는 것이다. 저자는 러시아가 내전과 빈곤으로 빠지게 된 것이 볼셰비키 때문이라고 비난하고, 혁명이 필연적으로 타락하여 스탈린주의 독재로 이어졌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레닌은 스탈린과 관료 집단의 부상에 맞서 필사적으로 투쟁했다.)
국내 여러 언론사들도 이 책이 여러 나라의 기록보관소에서 찾은 새로운 사료들을 방대하게 수집해 러시아 내전을 생생하게 다뤘다고 호평했다.
그러나 이 책은 왜곡된 서사로 가득하다. 따라서 러시아 혁명과 내전의 기원을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들은 다른 책을 찾아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