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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형구 동지의 비판에 대한 반박:
동어반복으로는 오류를 감출 수 없다

우선, 나 역시 구형구 동지의 글이 ‘전진’의 공식 입장이라고 확신할 수 없어 “하나의 의견”이라고 전제했다. 그래서 결론 부분에서도 “‘전진’의 공식 입장이 아니길 바란” 것이다.

그럼에도 구형구 동지의 글이 ‘전진’ 기관지에 독자편지도 아닌 기사로 실렸기에 단지 “개인의 기고문일 뿐”이라고 보기는 힘들다는 생각에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어쨌거나, 구형구 동지는 내 글을 정확히 반박하지 못했다. 그는 내 핵심 문제제기에 반박하기보다 몇 가지 지엽적 문제로 논점을 일탈해 동어반복했다.

첫째, 내 비판은 정치사상의 자유와 간첩 행위를 칼같이 구분하면서 “간첩 행위는 방어할 수 없다”는 구형구 동지의 전제 자체를 비판한 것이었다. 나는 이것이 지금 현재 남한의 현실에서 무의미한 구분법일 뿐 아니라 국가보안법을 이용한 마녀사냥에 저항하는 데 효과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구형구 동지는 여전히 “간첩 행위를 방어할 수 없다”는 단순 동어반복만 할 뿐이다. 그는 내가 “일반론에 특정 사실을 끄집어 반박”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구형구 동지야말로 “일반론에 특정 사실”을 적용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미국 CIA나 한국 국정원 요원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반론 차원에서 ‘스파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 운동 내 자생적 좌파의 이른바 ‘간첩’ 행위를 어떻게 볼 것인가였다.

주체주의자 동지들은 북한을 대안적 사회주의 사회라고 생각하고 북한 관료들을 혁명가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일부 주체주의자 동지들이 북한 지배자들과 연대하거나 북한 지배자들에게 지도받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정치사상의 일부다. 따라서 그들의 행위 자체와 사상을 억지로 분리하게 되면 현실에서 국가보안법 탄압을 용인하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우리 운동 내부의 토론·입증 대상이지 지배자들의 자의적 처벌 대상이 될 수 없다.

둘째, 그는 ‘간첩 행위’ 여부를 판단하는 주체가 공안당국이어야 하는가 라는 내 물음에 답변하지 않은 채, 자신이 말한 “간첩 행위”는 “명백한 사실로서의 행위인 것이지, [나의 글에서 언급한] 공안당국이 조작한 사건까지 포함한 것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내가 과거 공안 사건을 열거한 것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었다. 공안기관도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간첩 사건을 조작할 때 몇몇의 ‘명백한 사실’을 이용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조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단편적 ‘사실’을 부풀리고 가공해서 실체적 진실을 왜곡하고 ‘창조’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정형근이 다시 끄집어내고 있는 중부지역당의 황인욱 씨를 보라.

게다가 그런 조작 사건들도 조작이 판명될 때까지 수 년, 수십 년이 걸리기도 한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우리는 조작이 판명될 때까지 마녀사냥에 찍소리도 못하고 “간첩 행위는 처벌돼야지”하는 말만 읊조릴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잘못된 관점이 ‘일심회’ 마녀사냥에 ‘전진’이 계속 침묵하도록 만든 것이다.

따라서 구형구 동지가 주장하는 바는 사실상 공안당국의 조작 시도 저지에도 무능력할 뿐 아니라, 국가보안법에도 일관되게 반대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가 “북한의 간첩을 국보법으로 처벌하는 것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한국의 특수한 법체계에서 비롯”된다며 단순 “이적행위와 간첩행위”를 ‘뒤섞지 말라’는 것은 사실상 국가보안법의 일부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국가보안법 반대는 철저하지 못한 것이다.

구형구 동지의 이 같은 “일반론”이 일심회 마녀사냥이라는 “특수”에 대한 ‘전진’의 침묵·방조와 상관없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셋째, 그는 내가 자신의 글을 전혀 다른 취지로 재편집했다고 주장한다. 그가 “그 중 압권”이라는 부분을 검토해 보자.

나는 구형구 동지가 “북한 정권이 대안 사회가 될 수 없음이 명백하기 때문에 북한과 내통하는 행위는 반동적이며 해당 행위”라고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북한이 단지 대안사회가 될 수 없어서만이 아니라” 민주노동당 강령에 적대되는 “억압적이고 반동적인 국가권력”이기 때문이라는 문구를 왜 뺐냐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구절을 집어넣는다고 뭐가 달라지는가?

나의 핵심 주장은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당내의 동지들에게 “정치적 청산과 더불어 사법적 정리” 운운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냐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 그 동지들에게 ‘탈당’이나 ‘자수’를 권하는 게 아니냐고 비판한 것이다.

나도 당내의 주체주의자 동지들이 조선노동당과 연대하거나 또는 우파 사민주의 동지들이 배신적이거나 반동적인 행위까지 자행했던 유럽 사민당들을 모델로 삼자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 동지들을 정치적으로 비판하며 토론하기를 원할 뿐이지 ‘정치적 청산이나 사법적 정리’를 요구할 생각은 없다. 다행히 구형구 동지는 “정치적 청산”은 스스로 오류를 바로잡을 것을 권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 동지적 비판이었다면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나 “사법적 정리”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구형구 동지는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넷째, 구형구 동지는 운동의 불균등성과 이데올로기의 모순적 효과를 이해하지 못하는 종파주의와, 당내 존재하는 이질적 사상들을 행정적으로 통제(자신은 아니라고 하지만)해야 한다는 묘한 관료주의가 결합돼 있다.

먼저, 그는 자신이 “청산 대상”이라고 한 것은 “주체주의자 일반이 아니라 반동적 지배집단과 결탁한 특정한 행위 당사자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주체주의자들은 대부분 북한 체제가 진정한 사회주의이고 북한 관료들이 진정한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한다. 또, 북한 국가와 협력을 통해 반제국주의 투쟁과 피억압 민중 해방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어떤 난관을 뚫고서라도 북한 관료들을 만나서 도움을 받고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적 결론이 되곤 한다.

예컨대 유시민처럼 주체주의자였지만 지금은 변절한 386 정치인들도 과거에 그런 생각과 시도를 했음을 고백한다. 그 때 그들은 그런 실천을 “반동적 지배집단과 결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군사독재에 맞선 혁명적 저항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구형구 동지의 주장은 자신의 사상을 ‘일관된 실천’으로 옮기는 주체주의자는 방어할 수 없고 탄압받아 마땅하다는 말이 된다. 여기서 ‘사상을 머리 속에 가지고 있어도 되지만 실천에 옮겨서는 안 된다’는 공안당국의 논리가 떠오르는 이유는 왜일까.

물론 북한 국가와 체제에 대한 주체주의자 동지들의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국가 탄압은 이런 잘못된 정치가 운동 속에서 토론과 실천을 통해 검증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따라서 더더욱 우리는 주체주의자 동지들에 대한 국가 탄압에 반대해야 한다.

게다가 구형구 동지는 개인의 정치사상의 자유와 “당원으로서의 정치행위는 다르다”며 “당 강령에 위배되는 정치사상은 당이라는 공적 집단 내에서는 허용될 수 없다”고 한다.

물론 나도 주체주의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체주의자 동지들은 주체주의가 당 강령에 위배되는 정치사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 점은 당 강령과 정치사상을 둘러싼 우리 내부의 토론과 논쟁 대상이어야지 지배자들의 사법적 심판과 처벌 대상이어서는 안 된다.

그의 주장은 민주노동당이 광범한 정치세력의 연합으로 건설됐다는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당 강령 위배” 운운하는 그의 주장대로라면 당장 당내 주체주의자들 뿐 아니라 노골적인 우파 사민주의자들도 청산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구형구 동지는 하필 국가 탄압을 받고 있는 동지들에게만 이런 잣대를 들이대면서 ‘청산’을 말하고 있다.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가진 좌파들의 연합체로 건설된 당에서 정치적 견해의 차이를 툭하면 ‘당 강령’의 잣대로 재단하고 ‘정치적 청산’을 운운하는 것이 관료적인 태도가 아니고 무엇인가.

다섯째, 그는 북한 핵실험 관련 “‘전진’의 성명서에서 사태의 선차적 책임이 미국에 있음을 제일 먼저 강조”했고 따라서 나의 비판이 ‘용기 있는 왜곡’이라 했다. 그러나 구형구 동지는 성명서의 한 문구로 미국의 제국주의보다는 북한 핵실험 비판에 중점을 둔 ‘전진’의 전반적인 주장과 실천을 합리화하려 한다. 게다가 그 성명서조차 “북의 핵실험을 강력히 반대한다”가 제목이었고, 이 때문에 “미국의 선차적 책임”이라는 구절은 빛이 바랬다. 또, 성명서 발표 직후에 열린 한 토론회에서 ‘전진’ 최백순 동지도 ‘지금은 북한 핵에 대한 비판이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구형구 동지는 “북한 핵실험 사태에 대한 다수 대중의 거부는 핵무기 자체와 전쟁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다”며 “이를 가리켜 후진 대중의 압력으로 일축해 버린” 나의 “배짱”을 비판했다.

나도 구형구 동지가 지적한 북한 핵에 대한 대중적 반감은 공감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함께’도 북한 핵실험을 지지하지 않고 비판했다.

‘전진’의 문제는 우익의 악선동과 여론에 타협해 북한핵 비판에 강조점을 둔 나머지, 진정한 문제는 미국 제국주의이라는 점을 명백하게 드러내는 데 실패했을 뿐 아니라 따라서, 미국의 대북압박에 맞서는 실천으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요컨대, 문제의 핵심을 그 중요성과 비중에 걸맞게 지적하고 주장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에 따른 실천도 없었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구형구 동지는 내가 “국제 교류를 수직적-보고 체계와 뒤섞어 버린다”며 “‘다함께’가 그에 해당하지 않는다면 그다지 불쾌해할 일도 아닐” 것이라며 반박했다. 이 역시 동어반복이자, 한편으로는 적반하장이다.

나는 국제 연대의 교류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 문제라고 했다. 자신의 단언만을 반복하며 내용과 형식을 뒤섞는 것은 구형구 동지다.

또, ‘다함께’에 대해 ‘아님 말고’ 식의 비아냥은 전혀 진지하지 않다. 구형구 동지가 기관지 〈전진〉에 쓴 글은 국제 연대에서 “상급 단위의 단일 국적성” 운운하다 생뚱맞게 다함께의 중앙위 수정 결의안을 문제 삼았다. 이에 대한 비판을 다시 똑같은 논리로 반박하는 태도는 적반하장일 뿐이다. 사회주의자들의 “대등한 교류를 수직적 지도-보고 체계와 뒤섞어버린” 것은 바로 구형구 동지 자신이다.

결론적으로 구형구 동지가 ‘일심회’ 마녀사냥에 대한 ‘전진’의 저항 회피를 어설프게 합리화하고 있다는 내 비판은 여전히 유효하다.

구형구 동지야말로 당내 주체주의자 동지들을 “반동적 지배집단과 결탁한 세력”이라고 낙인찍는 대신, 이들과의 당권 경쟁에서 비롯한 ‘정치공학’ 대신, 그런 ‘단호함’을 지배자들의 마녀사냥에 일관되게 맞서는 진정한 전투성으로 승화시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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