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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치의 혁명적 철학 사상

이 기사는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2022년 7월에 한 강연이다.

우리는 이 모임이 열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루카치는 마르크스주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1885년에 태어나 1971년에 사망한 헝가리의 마르크스주의자였습니다. 꽤 장수했지요. 늙어가고 있는 저 같은 사람에게 좋은 영감이 되는 인물입니다.

그는 1923년에 출판된 《역사와 계급의식》이라는 논문집의 저자입니다. 이 책은 마르크스 이후의 마르크스주의 저작 중 단연 가장 중요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서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루카치는 1971년에 사망했고, 《역사와 계급의식》 이후에도 많은 글을 썼습니다. 특히 그는 매우 중요한 문학비평가가 되어 역사 소설과 리얼리즘에 대해 썼습니다. 그는 방대한 미학 연구서를 썼고, 말년에 미완의 대작 《사회적 존재의 존재론》이라는 책도 썼습니다.

이처럼 그는 매우 다작을 한 헌신적인 마르크스주의 작가였으며, 그의 삶은 매우 파란만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1956년 헝가리 혁명으로 수립된 정부의 장관이었습니다. 이는 매우 용감한 행동이었습니다. 소련 군대에 의한 반혁명 이후 그들에 의해 처형당할 수도 있었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정치적으로나 지적으로 매우 충만한 삶을 살았지만, 저는 《역사와 계급의식》에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 먼저 그 저작의 맥락을 설정하고자 합니다. 그 맥락은 또 다른 헝가리 혁명입니다. 1919년에 일어난 혁명입니다. 그 혁명은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으로 시작돼 제1차세계대전 말에 서쪽으로 휩쓸고 간 혁명 물결의 일부였는데, 독일 혁명, 그 과정의 일부였던 바이에른 봉기 그리고 1919년 수립된, 단명했지만 다루기 어려운 정치적 문제들이 많은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 등의 대사건들이 그 물결을 이뤘습니다.

루카치는 소비에트 공화국 정부의 부(副)인민위원(차관에 해당)이 될 정도로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매서운 시련이었고 첫 번째 주요 혁명적 경험이었습니다. 제가 그가 1885년에 태어났다고 했죠. 이는 1919년 헝가리 혁명 당시 그가 비교적 성숙한 나이였다는 뜻입니다. 그는 30대 중반이었고, 그가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것도 대략 이 시기쯤이었습니다. 아마도 1918년에 마르크스주의자가 됐을 겁니다.

아무튼 그는 갑자기 마르크스주의로 전향해 실제 혁명의 지도적인 인물이 됩니다.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의 배경을 보면, 그는 헝가리의 매우 부유한 유대인 은행가의 아들이었습니다. 즉, 그는 특권층 출신이었습니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 전부터 이미 활발하게 지적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술철학 등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썼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미 지적으로 상당히 깊게 참여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후에 회상하기를, 루카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 전 자신의 입장을 “낭만적 반자본주의”라고 묘사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일까요? 반자본주의, 즉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현대 사회 — 흔히 근대성(모더니티)이라고 불리며 자본주의에 대한 명확한 설명은 아닌, 자본주의 사회 — 를 소외되고, 파편화되고, 무의미한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대 자본주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말했듯이 그것은 낭만적인 관점이었습니다. 그는 이상화된 전근대 사회, 아마도 봉건제의 어떤 버전처럼 더 유기적이었던 과거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사회에 통합돼 있었습니다.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에서는 인간은 세계 속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출발한 다른 중요한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있습니다. 명백한 예로 19세기 후반 영국의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 윌리엄 모리스가 있는데, 그도 봉건 사회를 이상화하는 데서 시작해 혁명적 사회주의자가 됐고, 과거가 아닌 미래를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루카치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면서 일어난 변화는 자본주의가 무의미하고 파편화돼 있다는 비판을 버린 것이 아니라, 이제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우리를 다른 종류의 사회로 데려갈 수 있는 세력, 곧 노동계급을 발견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야만성을 드러낸 제1차세계대전과, 그 끔찍한 위기에서 벗어날 길을 보여 준 10월 혁명의 충격을 반영합니다. 이것이 루카치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맥락입니다.

그리고 제가 이미 언급했듯이 그는 단순히 지적으로만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1919년 혁명의 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헝가리 공산당의 지도적 인물이 되고,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의 인물이 됩니다.

레닌이 1920년에 쓴 《좌파적 공산주의 — 유아적 장애》에는 루카치에 대한 비판적 언급이 실제로 나오는데, 루카치는 레닌 사후에 레닌에 관한 작은 책을 써서 그에 화답했습니다. 제 생각에 그 책은 레닌에 관해 쓰여진 최고의 책 중 하나입니다. 거기서 루카치는 레닌의 이론과 실천을 통일적으로 아우르는 개념을 ‘혁명의 현실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즉, 사회주의 혁명은 막연한 미래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1차세계대전 개전과 함께 붕괴한 제2인터내셔널의 거대한 지적 인물, 특히 “마르크스주의의 교황” 격이었던 독일의 카를 카우츠키는 사회주의 혁명을 역사 과정의 필연적 결과로 펼쳐질 미래로 투사했습니다. 레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루카치는 말합니다. 레닌은 혁명을 현재의 실재하는 경향으로 봤다는 것입니다. 혁명은 지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우리의 사고와 활동을 바로 그것을 중심으로 조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혁명의 현실성’이라는 개념이 루카치가 《역사와 계급의식》을 쓸 때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가 마르크스주의로 전향했을 때 그는 마르크스의 저작에 매우 깊이 천착했습니다. 특히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면밀히 연구했습니다. 《역사와 계급의식》의 핵심 논문 ‘사물화와 프롤레타리아의 의식’을 읽어 보면 그 특징 하나를 느낄 수 있는데, 루카치가 마르크스를 매우 면밀히 읽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을 읽되, 경전 읽듯이 또는 교리적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의 사상을 창조적으로 발전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와 계급의식》

《역사와 계급의식》에 대해 몇 가지를 지적하고자 합니다. 이 책은 논문집으로, 각 논문이 서로 다른 시점에 쓰였기 때문에, 책을 정독해 보면 루카치 사상의 발전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혁명 기간 중에 그가 했던 강연 내용은 나중에 쓴 논문의 내용과 똑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르지 않은 저작입니다. 하지만 여기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대의에 실천적인 방식으로 결합하고,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여 오늘날 마르크스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생각하려 노력하는 절대적으로 뛰어난 지식인이 있습니다. 따라서 고른 저작은 아니지만 엄청나게 중요한 저작입니다.

루카치는 무엇을 하려고 했을까요? 그는 제1차세계대전 개전과 함께 발생한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다루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전에는 특히 유럽에서, 그리고 어느 정도는 북미와 전 지구적 규모에서 거대한 노동계급 운동이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럽에는 거대 노조 운동과 연결된 대중 정당들이 있었고 선거에서 많은 표를 얻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독일 사회민주당(SPD)이 그랬죠.[지금의 SPD는 그때에 비해 너무 우경화해, 좌파에 속한다고 볼 수도 없다. — 역자]

그러다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납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것과 같은 제국주의간 전쟁이 전면적으로 벌어집니다. 물론 제1차세계대전은 전혀 [우크라이나 전쟁 같은 — 역자] 대리전이 아니었습니다. 거대 제국주의 열강이 서로 싸우며 수십만의 사병들, 징집병들을 참호 속에서 학살했습니다. 그런데 제2인터내셔널은 뭘 했습니까? 실질적인 일은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그들은 전쟁을 멈추기 위해 총파업 결의안을 통과시켰지만 총파업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요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각자 자국 정부를 지지했습니다.

제2인터내셔널의 핵심 이론가 카를 카우츠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적대 행위가 진행되는 동안 제2인터내셔널 가동을 중단해야 한다.” 다시 말해, 혁명적 국제주의는 평화로운 시기에만 좋은 아이디어라는 겁니다. 그러나 카우츠키에겐 미안하지만, 우리에게 혁명적 국제주의가 정말로 필요한 건 전쟁 때입니다! 제1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대철학자 헤겔을 읽고 있던 레닌을 포함한 몇몇 인물들에게는 그랬습니다. 레닌은 스위스의 도서관에 앉아 헤겔을 읽고 있었습니다. 볼셰비키 동지들이 와서 말했죠. “레닌, 헤겔 읽는 것 좀 그만두세요.” 그러자 레닌이 말했습니다. “아니, 아니, 이 독서를 마치는 게 매우 중요해요. 왜냐하면 저는 헤겔을 읽으면서 제2인터내셔널의 마르크스주의가 무엇이 잘못됐는지 배우고 있거든요.”

나중에 출판된 레닌의 헤겔 노트에서 그가 단편적으로 행한 작업을 루카치는 훨씬 더 체계적으로 수행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2인터내셔널의 마르크스주의, 특히 카우츠키 같은 인물들의 사상에 스며 있는 ‘역사적 필연성’이라는 생각을 비판하는 것이었습니다. 카우츠키는 “자연의 필연성”이라는 문구를 썼습니다. 자본주의는 자연의 필연성에 의해 붕괴할 것이다. 사회주의는 자연의 필연성에 의해 일어날 것이다. 우리를 자본주의를 거쳐 사회주의 사회로 데려다 줄 유기적인 역사적 과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음, 그러면 정말 고맙겠군, 카를. 하지만 실제로 자본주의가 우리를 데려가고 있는 곳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제1차세계대전 시작 때 썼듯이,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하는 선택지였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야만이 이기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를 재고해야 했고, 특히 우리가 ‘주관적 요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위한 자리를 찾아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 사회를 바꾸는 투쟁 과정에서 인간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루카치만 이런 작업을 한 것은 아닙니다. 당시 꽤 비슷한 시도를 했던 카를 코르쉬라는 독일 마르크스주의자도 있었는데, 그의 작업도 매우 중요했습니다. 또, 이탈리아 공산당 창립자의 한 명인 안토니오 그람시도 있었습니다. 그람시의 평생의 작업은 카우츠키 같은 사람들의 마르크스주의와는 다른 종류의 마르크스주의, 즉 그가 “실천의 철학”이라고 부른 것을 발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루카치가 한 작업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저는 세 가지 요소가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첫째, 루카치의 표현을 약간 바꿔 말하자면, 마르크스주의의 특징은 단순히 사회 내 경제의 역할, 사회에서 작동하는 자본주의 경제 구조와 경제적 힘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총체화’(總體化)의 방법을 포함한다는 겁니다. 물론 마르크스주의는 경제 구조, 생산력과 생산관계 등에 대해 얘기합니다만, 경제 구조를 사회의 다른 모든 측면과 함께 ‘총체성’(總體性) 안으로 통합함으로써 그렇게 합니다. 마르크스주의의 방법은 총체성의 방법이며, 따라서 좋은 마르크스주의 사상은 총체화합니다. 즉, 사회의 다른 요소들을 단순히 묘사하고 비교하고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어떻게 역동적이고 모순적인 총체(또는 전체)를 이루는지를 보여 줍니다.

둘째, ‘사물화’라는 개념입니다. 제가 앞에서 언급한 논문 ‘사물화와 프롤레타리아의 의식’에는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 전 루카치 사상과의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근대성이 파편화되고 소외됐다는 그의 사상을 제가 언급한 걸 기억하시죠? 루카치는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이것을 더 발전시킵니다. 그는 자본주의의 특징이 사회 관계의 체계적인 파편화뿐 아니라, 제가 ‘자연화’[자연 현상처럼 되기 — 역자]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회 관계가 파편화될 뿐 아니라, 마치 자연 현상처럼, 물리적 세계에서 일어나며 우리와 무관하고 인간의 행위에서 독립적인 물리 법칙의 지배를 받는 것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사회가 ‘자연화’된다는 게 자본주의의 특징이라는 것은 인간이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중요한 점을 함축합니다. 파편화돼 있으면 산산조각들을 맞춰 전체를 만들 수 없습니다. 게다가 ‘자연화’돼 있으면, 그래서 물리 법칙 같은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통제 밖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지도 못하고 아무 영향도 못 미치는 과정의 수동적인 관찰자가 될 뿐입니다.

여기서 루카치가 한 일은 — 이것은 “신의 한 수”인데 — 자본주의 사회의 경험에 대한 다음과 같은 종류의 비판을 연결한 것입니다. 그는 친구인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영향을 부분적으로 받았습니다. 그들은 제1차세계대전 중 ‘하이델베르크 서클’이라는 토론 그룹의 일원이었습니다. 베버도 자본주의가 경험을 파편화하고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견해를 강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루카치는 이것을 자본주의 생산관계 안에 위치시킵니다. 그는 사물화가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산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특히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나오는 중요한 주제 하나를 끌어오는데, 바로 ‘물신성’입니다. 《자본론》 1권 1장에서 마르크스는 상품의 물신성에 대해 얘기합니다. 물신성은 이런 함의가 있습니다: 사회 관계가 시장 관계에 의해, 시장에서의 재화와 용역의 교환에 의해 매개되는 사회는 우리가 전체를 지각하지 못하는 사회 형태를 띠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의 다른 측면들 사이의 연결을 지각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러한 관계들이 우리가 통제하지 못하는 자연의 관계들처럼 보인다는 것 — 이것이 마르크스가 물신성에 대해 얘기한 이유인데 — 입니다. 그래서 루카치가 한 일은 마르크스의 상품 물신성 이론을 당대 자본주의 사회의 경험에 창조적으로 적용한 것입니다.

셋째, 초기 발전 단계의 루카치와 《역사와 계급의식》의 루카치 사이에는 또 다른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데, 이제는 ‘출구’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프롤레타리아가 역사의 주체라는 것입니다. 마르크스를 발전시키며 루카치는 자본주의가 상품화 사회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상품으로 환원됩니다. 즉, 모든 것을 사고 팔 수 있습니다. 관계들은 상품화되고 따라서 어떤 종류의 깊거나 진지한 의미에서의 관계가 더는 아니게 됩니다.

하지만 이 상품화 과정의 정점은 프롤레타리아입니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은 그들의 노동력, 즉 일할 능력이 시장에서 사고 파는 상품이 된다는 사실에 의해 시스템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루카치는 노동자가 일종의 “절대적 상품”(이 말은 아도르노의 용어입니다만)이라고 강조합니다. 그가 부분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상품화 과정이 여기서 극단적인 지점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간은 상품으로, 더 정확히는 그들의 노동력으로 변모됩니다. 하지만 또한 노동자는 그가 시스템의 중심축이라는 의미에서도 절대적 상품입니다.

얼마 전 철도 파업에서 보았듯이, 시스템은 노동자, 집단적 노동자에 의존합니다. [2017년 1월과 7월 영국에서 구조조정 반대와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철도 파업이 있었다. 1월에는 ‘서던레일 철도 파업’이 사흘간 진행됐고, 7월에는 33년 만에 최대 규모인 영국 철도노조 파업이 벌어져 노선의 80퍼센트가 운행이 중단됐다. — 역자] 철도와 같은 전략적 산업에서 노동자들이 노동을 철회하면 모든 것이 멈춥니다. 시스템은 노동자들에게 의존합니다. 그래서 루카치는 절대적 상품이자 시스템이 의존하는 노동자의 이 피착취 계급으로서의 관점이 자본주의를 ‘총체성’[전체]으로 이해할 수 있는 관점이라고 말합니다.

자본주의의 일상적인 삶의 흐름을 그냥 따라가면 전체를 지각하지 못합니다. 총체화할 수 없습니다[전체를 보지 못한다 — 역자]. 노동계급의 관점을 취한다면, 노동자의 절대적 상품으로서의 위치에서 사회를 본다면, 우리는 상품화를 보게 됩니다. 총체성을 봅니다. 그것이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한 일입니다.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의 관점을 취했고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재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물론 혁명가로서 루카치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이 단지 자본주의를 지적으로 이해할 능력만을 가진 게 아니라 자본주의를 전복할 능력을 가졌다는 점입니다. 그는 노동자가 역사의 ‘바로 그 주체-객체’[‘주객동일성: 주체와 객체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개념 — 역자]라고 말합니다. 꽤 난해한 문구이지만, 그는 시스템이 의존하는 세력이자 시스템을 변혁할 수 있는 세력으로서 노동계급의 중요성을 강조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영향을 미친 전적으로 뛰어난 성취입니다. 예를 들어,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독일 철학자는 마르틴 하이데거인데, 그는 나치였습니다. 우린 그 점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이탈리아 파르티잔들은 제2차세계대전 말에 이탈리아판 하이데거였던 조반니 젠틸레를 처형했습니다. 어쨌든 하이데거의 가장 유명한 저작은 1927년에 출판된 《존재와 시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존재와 시간》이 부분적으로 《역사와 계급의식》에 대한 답변으로 의도된 것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루카치는 발터 벤야민, 테오도르 아도르노 등 온갖 매우 중요한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만큼 중요했습니다.

남은 짧은 시간 동안, 《역사와 계급의식》의 약점에 대해 몇 가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위대한 저작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첫째, 루카치는 사물화를 균일하고 한결같은 과정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물화 과정은 자본주의하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루카치 사상의 근원인 마르크스의 《자본론》 분석으로 돌아가 보면,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그리는 그림은 그렇게 균일하고 한결같은 과정이 아닙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규정하는 ‘모순’들을 훨씬 강하게 의식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실제로 착취, 물신성 등을 포함합니다. 하지만 마르크스에게 자본주의는 또한 다른 종류의 사회를 위한 물질적 기초를 제공하는 생산력 발전을 포함합니다. 그리고 생산력 발전을 통해 노동자들의 집단 행동 능력과 궁극으로 사회 변혁 능력도 증대됩니다. 그런데 《역사와 계급의식》에는 그런 모순에 대한 인식이 없습니다.

둘째, 저는 루카치가 주지주의적 프롤레타리아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노동자를 절대적 상품으로 보는 개념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며, 이것은 마르크스에게서 발견되는 보편적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라는 개념을 발전시킨 것입니다. 하지만 노동계급 사람들 대부분은 자발적으로 자본주의를 총체성으로 파악[전체로서 이해 — 역자]하지는 않습니다.

루카치는 그가 ‘귀속된 의식’과 ‘실제 의식’이라고 부른 것 사이의 유명한 구분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여기서 ‘귀속된 의식’은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생산관계 내에서의 위치에 따라 가져야만 하는 의식[계급의 객관적 이해관계가 온전히 의식화된다면 마땅히 도달할 의식 — 역자]입니다. 절대적 상품으로서 그들이 가져야 하는 의식이죠. 한편, 실제 계급 의식이 있는데, 이는 노동자들이 실제로 가지고 있는 의식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실제 계급 의식에서 귀속된 계급 의식으로 어떻게 이동하는 걸까요? 루카치는 이에 대해 몇 가지 얘기를 하는데, 이 맥락에서 노동자들이 온전히 의식적이 되는 과정에 기여하는 혁명적 정당의 역할에 대해 얘기합니다. 하지만 이는 전혀 발전되지 못한 채로 있습니다. 책 제목이 《역사와 계급의식》이고 계급 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훌륭한 책이긴 하지만, 계급 의식을 이해하고 싶다면 그람시를 봐야 합니다.

그람시는 계급 의식에 대해 훨씬 더 발전되고 유용한 분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람시는 노동계급이 그가 말한 ‘헤게모니적 계급’, 즉 사회를 지배하고자 하는 자의식적 정치 세력으로 응집하도록 마르크스주의 정치와 조직이 돕는다는 루카치 주장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람시는 노동자 의식의 모순에 대해서도 매우 뛰어납니다. 우리 SWP(사회주의노동자당)가 많이 인용하는 그람시 《옥중수고》의 한 구절이 있는데, 거기서 그는 노동자들이 모순된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인종차별이나 애국심[민족주의 — 역자]처럼 그들을 지배계급에 묶어 두는 관념, 또는 그가 “석기시대적 관념”이라고 부르는 점성술에 대한 믿음 같은 것들이 섞여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들은 또한 공산주의적 의식의 요소들, 집단적 자력 해방의 과정을 암시하는 집단적 의식도 가지고 있습니다. 계급 의식을 발전시키는 것은 실제로 계급 의식 내의 이러한 서로 다른 요소들 간의 투쟁입니다.

그런데 루카치 자신도 《역사와 계급의식》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자신이 “헤겔보다 더 헤겔적이려고” 했다고 인정했습니다. 제1차세계대전 이후 레닌을 비롯한 모든 혁명적 사상가들은 헤겔에 매우 관심이 많았고, 마르크스주의를 실천의 이론, 혁명적 변혁의 이론, 혁명적 주체의 이론으로 재고하기 위해 헤겔을 원용했습니다. 하지만 루카치는 자신이 너무 나갔다고 생각하게 됐는데, 이는 옳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1920년대 중반부터 가속이 붙기 시작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스탈린주의화라는 맥락 속에서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바꿨습니다. 그의 후기 사상의 세부 사항으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지만, 루카치는 본질적으로 스탈린주의와 타협합니다. 공정하게 말하면 그는 항상 독립성을 유지했습니다. 특히, 1930년대 모스크바 망명 시절처럼 스탈린주의 공포정치로 생명이 위험했을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스탈린주의 정권들과 일정한 타협점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정당한 평가를 내리기 위해 덧붙여야 할 것은, 1956년 혁명이 일어나 청년들과 노동자들이 헝가리의 스탈린주의 정권에 맞서 봉기했을 때 그는 그들의 편에 섰고, 혁명 정부에 가세했으며 그 결과 처형당할 수도 있었다는 점입니다. 혁명 정부의 지도자 너지 임레는 탄압 이후 처형당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비록 루카치의 후기 저작에 다루기 어려운 문제들이 여러모로 많지만, 그는 존경할 만한 인물로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화 하나로 마치겠습니다. 1956년 헝가리 혁명 패배 후 루카치는 감옥에 잠깐 수감됐는데요. 그를 신문하던 소련 장교가 물었습니다. “무기 가진 것 있소?” 그러자 루카치는 자기 앞에 놓인 펜을 가리켰다고 합니다.

질의 응답

우선, 주디[주디 콕스], 정말 멋진 얘기네요. 저는 루카치가 초기에 참정권 운동을 지지했다는 걸 몰랐습니다. 그 얘기를 알고 나니 왜 그가 제1차세계대전이라는 맥락 속에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로의 도약을 이뤘는지 이해하기가 더 쉬워지네요.

1919년 헝가리 상황에 대한 질문과 관련해 저는 1919년 공산주의 정부와 소비에트(노동자 평의회)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당시 혁명이 쿤 벨러라는 인물에 의해 주도된 모험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일종의 정치적 모험가였고 나중에 1921년 독일 공산당에도 매우 나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것은 혁명 정부를 지탱할 헝가리 노동계급 운동의 역량을 넘어선 모험이었습니다. 쿤은 시스템의 일반적 위기 등을 반영해 일을 너무 밀어붙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생존할 수 없는 정부였고, 레닌은 그 모든 것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루카치를 보는 관점에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의 일종의 혁명적인 매서운 시련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조셉[조셉 추나라]이 루카치가 1950년대와 1960년대 초에 어떻게 재발견됐는지에 대해 중요한 지점을 짚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좋은 친구이자 SWP 역사의 핵심 인물 중 하나인 크리스 하먼은 《역사와 계급의식》의 프랑스어 번역본을 읽었는데, 아마 1960년에 나왔던 걸로 기억됩니다. 영역판보다 10년 이상 앞선 것이었죠. 그 책의 프랑스어판이 나온 이유는 프랑스에서, 특히 1956년 헝가리 혁명과 스탈린주의 체제의 위기 등으로 인해 지적이고 정치적인 유동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장폴 사르트르나 모리스 메를로퐁티 같은 매우 중요한 철학자들이 바로 혁명적 주체의 문제, 의식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개인의 의식과 계급 의식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등도 말이죠.

비슷하게 영국에서도 《뉴 레프트 리뷰》 편집자 페리 앤더슨이 1970년경 루카치를 만나러 부다페스트로 가서 매우 흥미로운 인터뷰를 했고, 루카치의 여러 저작을 출판하는 데 동의를 얻어 냈습니다. 왜냐하면 앤더슨도 스탈린주의의 절정기에 억압됐지만 새로운 혁명 세대에게 유의미해 보였던 이단적인 마르크스주의 버전을 재발견하는 데 핵심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의식 문제에 관해서는, 저는 이것이 그람시의 글들에서 잘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의식의 층위에 대해 얘기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가진 의식에는 층위들이 있습니다. 프로이트를 따르자면 무의식까지 내려가기도 하고, 개인 내부의 힘뿐 아니라 사회가 주는 다양한 압력과 기회를 반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의식은 복잡합니다. 계급 의식, 즉 자신을 주장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노동계급 주체의 일부라는 집단적 자각은 어떻게 노동계급 투쟁과 조직의 발전과 결정적으로 관련되는가? 이 점은 뒤에 얘기하겠습니다.

롭[롭 호브먼]은 레닌과 철학의 관계에 대한 질문에 이미 답변의 단초를 제공했습니다. 철학은 레닌에게 매우 중요했습니다. 제가 레닌이 제1차세계대전 초기에 헤겔을 읽었다고 언급했죠. 하지만 그는 생애 말기에도 철학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도 일종의 전환점이었습니다. 혁명[러시아 혁명]은 생존했지만 고립됐습니다. 엄청난 내부적·외부적 압력을 받고 있었죠. 레닌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얻고자 철학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그는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는데, 부분적으로는 볼셰비키 당이 막다른 골목에 처했기 때문이고, 또 부분적으로는 그 자신이 뇌졸중으로 무력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철학에 매우 진지하게 관심이 있었습니다.

루카치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을 좋아하지 않지만, 저는 그것이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은 매우 흥미로운 책입니다. 왜냐하면 레닌은 ‘관념론자가 되는 것은 아무 문제도 없다’고 주장하는 볼셰비키 당 내의 경향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 물리학의 발전, 양자론의 시작과 상대성 이론으로 물질과 관념의 구분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해서 말이죠. 레닌은 말합니다. “아니, 아니, 그건 참말이 아니야. 인간에게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우리가 그 일부이고 상호작용하는 물질 세계와, 어떤 시기에 사회에 만연한 특정한 물질 개념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주장입니다. 저는 임레 라카토슈 같은 과학철학자들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루카치의 제자였는데 레닌의 그 저작을 매우 존경했습니다.

이것은 루카치와 그람시의 사상적 관계 문제와 약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루카치는 특정 철학적 질문들의 명료화에 초점을 맞춘 반면, 그람시는 ‘실천의 철학’을 발전시키고 있음에도 철학을 주로 특정 계급이 사회를 지배하려는 의지를 표현하도록 돕는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보는 훨씬 더 도구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람시는 롭이 언급한 대로 ‘실재론’을 거부했습니다. 실재론은 우리가 가진 이론이 세계의 상태에 따라 참이거나 거짓이라는 견해입니다. 우리 생각을 참으로 만드는 것은 세계이지, 우리 머릿속의 어떤 것, 주관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람시는 그것을 거부하고, 우리가 공산주의를 달성해 사회가 더는 분열되지 않을 때 진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도달합니다. 저는 그람시가 정말로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생각은 완전히 지지할 수 없는 생각이라고 봅니다. 이에 대해 몇 시간이고 얘기할 수 있지만 여러분께 그런 고통을 주진 않겠습니다.

루카치의 흥미로운 점은 그가 훨씬 더 실재론적인 입장으로 이동한다는 것입니다. 《역사와 계급의식》에 관념론적 요소가 있다는 자기 비판의 일부가 그를 실재론으로 이동시킵니다. 문제는 그가 1920년대 후반에 그렇게 했을 때 유럽에서 혁명의 물결이 빠져나갔다는 것입니다. 헝가리 공산당은 다른 공산당들과 마찬가지로 스탈린주의화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이미 이탈리아에는 파시즘이 있었고, [독일에서는 — 역자] 훨씬 더 큰 반혁명 물결의 시작 등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루카치의 실재론 채택은 그를 — 이것은 특히 루카치에 대한 좋은 책을 쓴 브라질계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미셸 뢰비가 발전시킨 견해인데 — 현실에 대해 더 관조적이고 초연한 태도로 이끕니다. 이는 불행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실재론이 필요로 하는 일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적절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적 접근은 슬라보예 지젝이 말한 ‘사유의 편파성’이라는 개념을 결합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간단하지는 않지만 사상이 세계의 상태에 따라 참이거나 거짓이라는 개념을 가지면서도, 특정 관점을 취해야만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루카치의 후기 정치에 대한 질문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는 단순히 1956년 헝가리 혁명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그의 말년은 정확히 페리 앤더슨 같은 사람들이 10월 혁명 시대의 혁명적 전통과 다시 연결되기 위해 그의 문을 두드리던 시기였습니다. 헝가리의 상황이 조금 완화돼서 그는 더 자유롭게 글을 쓰고 말할 수 있게 됐고, 혁명적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을 매우 명확히 했습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서구 자본주의의 대안에 관한 것이지만, 또한 스탈린주의에 대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충분히 발전되지 못했지만, 매우 중요합니다.

총체화 문제에 대해 더 듣고 싶으신가요? 오늘 오후 ‘재난’을 주제로 한 제 모임에 오세요. 지금은 얘기할 시간이 없네요. 하지만 타자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혁명에 절대적으로 헌신한다고 하면, 예를 들어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그랬던 것처럼 노동계급의 위치를 포함한 상황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말이죠. 엥겔스가 말한 ‘노동계급의 상태’를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느 정도 분석적인 거리를 둬야 합니다.

물론 마르크스가 어느 편인지는 전적으로 명확합니다. 그는 특히 《자본론》 1권의 노동일(勞動日: 노동자가 하루에 일하는 시간을 한 단위로 하여 이르는 말 — 역자) 관련 부분에서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끔찍한 조건을 매우 인상 깊게 묘사합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의 편입니다. 그는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쓰고 있지만, 또한 그들의 상태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얘기의 끝이라면, 그것은 실천과 분리된 또 다른 지식인의 얘기일 뿐일 겁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의 지도적 인물일 때 이것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단체의 지도자로서 노동조합원들과 함께 일하며, 아일랜드 독립 지지, 미국 남북전쟁에서 북부 지지 같은 이슈로 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노동자들을 단순히 자본주의 착취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발전하는 주체로서 그들과 관계 맺고 있었습니다.

루카치는 제1차세계대전 종전 무렵 혁명기에 그와 비슷한 무언가의 일원이 되는 순간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그 후 그는 본질적으로 그의 서재로 후퇴합니다. 부분적으로는 생존을 위해서였지만, 부분적으로는 그가 별로 낙관적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그는 매우 중요한 말을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것이 우리의 질문에 대한 답이 될 텐데요. 그는 이론과 실천의 분리가 극복되는 곳은 바로 혁명적 조직 안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더 강력한 노동계급 운동을 건설하려는 조직의 일원이라면, 상황을 분석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철도 파업이 얼마나 중요한가? 어제 조셉[조셉 추나라]과 마이클 로버츠가 분석했던 인플레이션 위기의 전개라는 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우리는 분석하려 하지만, 동시에 상황에 영향을 미치려 합니다. ‘우리에게 철도 노동자가 몇 명이나 있는가? 우리가 아는 철도 노동자는 몇 명인가? 그들과 대화할 수 있는가? 우리는 연대를 구축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믹 린치(철도해운교통노조 사무총장)를 사랑합니다. 알다시피 그는 노조 지도자입니다. 노조 지도자들은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 존재합니다. 철도 노동자들의 상황을 정말로 개선하고 나머지 노동계급에게 모범이 될 좋은 거래를 보장하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노조 지도자들에게 압력을 가할 수 있을까요? 만약 철도 노동자들이 돌파구를 마련한다면, 어떻게 다른 그룹의 노동자들이 싸우도록 독려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자본주의하에서 노조 관료와 그들의 매개 역할에 대한 이론 등을 포함한 이론이 실천과 만나는 것입니다. 청중석 질문에 좋은 대답이 될지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에, 루카치가 옳게 본 것 하나는 지식인들이 ‘내 이론을 내 실천과 어떻게 연결할까’ 고민하는 그 문제가 (혁명적 조직 내에서)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영구적으로 해결되는 건 아니고요. 그것은 혁명적 조직 안에서 활동하며 지속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투쟁입니다.

번역: 최일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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