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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합의 - 중동에 전념하기 위한 부시의 일시적 조치

지난 2월 13일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 조치”가 합의됐다. 9.19 공동성명이 발표된 지 거의 1년 반 만이다. 북한 핵실험 이후 조성됐던 긴장 ― 이런 분위기는 얼마 가지 않았다 ― 은 2.13 합의로 완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것은 다행한 일이지만, 사실 2.13 합의의 전망은 여러 모로 불투명하다.

2.13 합의에서 명시된 ‘행동’ 대 ‘행동’의 구체적 내용은 북한이 60일 내에 영변 핵시설을 폐쇄·봉인하고 그 대가로 중유 5만 톤을 제공받는다는 것이 거의 전부다. 서동만 상지대 교수의 지적대로, “핵시설 폐기에만 합의하고 그 뒷부분은 일단 미뤄둔 합의”다. 북미 관계 정상화 같은 핵심 문제는 모호하게 남아 있다. 한반도 또는 동아시아 평화 체제 구축 문제도 마찬가지다.(이 문제는 뒤에서 상세히 다룰 것이다.)

미국의 양보

그나마 이 정도라도 합의가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은 부시 정부가 그 동안의 강경 입장으로부터 몇 걸음 뒤로 물러났기 때문이다. 첫째, “악행은 보상하지 않는다”던 부시 정부가 입장을 180도 바꿨다.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 폐기” 전에 중유를 제공하기로 한 것이다.

둘째, 양자회담을 한사코 마다하던 부시 정부가 베를린 북미회담을 가졌고, 이를 통해 합의의 큰 틀을 마련했다.

셋째,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의 북한 계좌 동결 문제에서도 후퇴했다. BDA 문제는 9.19 공동성명 채택 이후 북미 갈등을 심화시킨 결정적 쟁점이었다. 이 갈등은 결국 북한의 핵실험으로까지 이어졌다. 그 동안 북한은 대화 재개의 조건으로 BDA 문제 해결을 요구했다. 하지만 부시 정부는 BDA 문제와 핵 협상은 관계 없는 일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더니 결국 부시 정부는 베를린 회담에서 BDA 문제 해결을 약속함으로써 북한을 6자회담으로 복귀시켰다. 6자회담에서 크리스토퍼 힐은 BDA 문제를 30일 안에 해결하겠다고 말했다. 이것은 BDA 문제 해결이 북한이 60일 안에 이행하기로 한 초기 조치에 대한 “성과급”이 아니라 도리어 선행 조치라는 뜻이다.

넷째,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 문제를 적어도 이번에는 명시하지 않았다.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은 2002년부터 시작된 이른바 “2차 북핵 위기”를 일으킨 핵심 문제였는데도 말이다. 당시에 부시 정부는 플루토늄 시설에 대한 동결을 포기하면서까지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을 문제 삼고 나섰다. 이번 합의에 따르면 “모든 핵 프로그램의 목록을 여타 참가국들과 협의”하게 돼 있는데, 이 과정에서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 문제는 논란거리가 될 수 있다.

“올해는 이란의 해”

미국의 이런 태도 변화는 무엇 때문일까? 개번 매코맥이 지적하듯이, “기본적인 요인은 지난해 11월 선거에서 공화당의 참패, 이라크 상황의 악화, 이란 문제 및 중동 전쟁의 확대 가능성”이다.

부시 정부는 2만 1천5백 명을 이라크에 추가 파병하려 하고 있고, 2.13 합의 이틀 전에는 이란을 이라크 무장 세력의 배후로 지목해 이란 공습의 명분 쌓기가 아니냐는 관측을 낳았다. 〈워싱턴포스트〉가 인용 보도한 바에 따르면, 부시 정부의 진정한 실세 딕 체니의 국가안보보좌관인 존 해너는 최근 한 모임에서 부시 정부가 2007년을 “이란의 해”로 여기고 있다고 말했다. 이란 공격이 현실적 가능성이라는 얘기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북한 문제로 힘을 분산할 여력이 없다. 이것이 타협을 선택한 이유다. 하지만 부시 정부 대북정책의 이 변화는 과장할 만한 것이 못 된다. 미국은 대북 ‘전쟁’에서 ‘대화’로 이동한 것이 아니다. 미국은 중동 전쟁을 치르면서도 소말리아 같은 나라에 개입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어하지만, 북한은 경우가 다르다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다.

미국은 군사적 제재도 아니고 대화도 아닌 방식으로 시간을 끌고 있었는데, 북한의 핵실험은 계속 이러다가는 위험을 키울 수 있음을 드러냈다. ‘전쟁’할 여력이 없다면 일단 ‘대화’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 북한 핵을 동결하는 동시에 그것이 주변국에 미칠 효과도 차단할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태도 변화가 이라크와 이란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기대가 일각에 존재한다.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은 파국으로 치닫는 미국의 이라크 점령과 대결국면으로 치닫는 이란의 핵문제에도 현실적 방안의 가능성을 던져주고 있다.”(장정수 한겨레 논설위원) 하지만 이런 희망 섞인 관측은 비현실적이다. 오히려 부시 정부는 중동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 관철에 전념하기 위해 다른 전선에서 “악의 [한] 축”과 내키지 않는 대화를 시작한 것이다. 이 점을 명확히 인식하지 않는다면 어느 때보다 높아진 반전 운동의 중요성을 망각하게 될 위험이 있다.

적은 보상, 더 많은 요구

2.13 합의에서 미국이 여러 타협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북한이 “미국과의 적대관계 청산, 관계정상화를 위한 기틀 마련이라는 ‘정치외교적 승리’를 거뒀다”(〈민중의 소리〉배혜정 기자)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북한의 입장에서 봤을 때 적은 보상에 더 많은 것을 요구받은 데다 중요한 문제들은 뒤로 넘겨졌다.

첫째, 북미 관계 정상화라는 핵심 문제는 실무그룹의 일로 넘겨졌다. 합의문에는 테러지원국 해제와 적성국 교역법 종료를 위한 과정을 60일 이내에 개시한다는 것말고는 어떤 구체적 내용도 명시돼 있지 않다. 북한은 ‘북미 관계 정상화 실무그룹’의 진전이 없으면 결코 비핵화로 나아가려 않으려 할 것이고, 미국은 정반대일 것이다. 이 입장을 조율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둘째, 북한에 제공될 보상도 제네바 합의 때와 비교하면 약소한 편이다. 제네바 합의 때는 핵시설 동결만으로 매년 50만 톤씩 중유를 지원받았다. 8년 간의 동결로 북한이 받은 중유는 총 365만 톤이다. 이번에는 영변 핵시설 폐쇄·봉인과 IAEA 요원 복귀의 대가로 받게 될 중유의 양이 5만 톤에 불과하다. 동결 기간을 최대한 줄이고 핵시설 “불능화” 조치로 나아가야 중유를 더 주겠다는 것이다. 부시 정부는 제네바 합의가 동결만을 합의함으로써 북한이 8년 뒤 봉인을 뜯어내고 시설을 재가동할 수 있게 길을 터준 것을 결정적 실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불능화 조치에 상응하는 100만 톤도 제네바 합의 2년치에 불과한 데다, 그것이 제공되는 조건도 모호하다. 합의문에 따르면 “불능화를 포함하는 다음 단계 기간 중”에 지원하게 돼 있는데, 어떤 실천에 따라 얼마만큼의 상응 조처를 제공할지는 ‘경제 및 에너지 협력 실무그룹’으로 넘겨졌다.

셋째, 이번 합의문은 경수로 지원 문제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북한의 가장 중요한 요구 가운데 하나인 경수로 제공을 피해간 것이다. 이는 이번 합의가 초기 조치에 집중된 결과라고 할 수 있지만, “적절한 시기에 경수로 제공을 논의한다”는 9.19 공동성명의 모호한 합의를 둘러싸고 본격적 논란이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수많은 암초들

2.13 합의는 수많은 논란과 갈등의 씨앗을 품고 있다. 첫째, 이번 합의는 “9.19 공동성명에 명기된 모든 핵 프로그램의 목록을 여타 참가국들과 협의”하도록 했는데, 목록에 포함될 대상을 두고 논란이 일 수 있다.

우선,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이 문제가 될 수 있다. 미국은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을 제네바 합의 위반으로 지목했던 반면 북한은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데이비드 올브라이트 미국 과학국제안보연구소 소장은 미국 정보기관의 근거 없는 과장을 비판하면서도 북한이 “20여 개의 가스원심분리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평가했다.

더 큰 문제는 핵무기다. 북한은 핵 프로그램의 목록에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을 포함시키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지만 핵무기는 포함시키지 않겠다는 입장이라 한다. 핵 프로그램 목록 작성은 사찰로 연결될 것이라는 점에서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사찰 범위 문제는 1993~94년 북미 협상 과정에서도 위기를 부른 중요 쟁점이었다.

둘째, 핵무기 폐기 문제는 초기 조치 과정에서는 그냥 넘어간다 해도 2단계 이후의 협상 과정에서는 핵심 쟁점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폐기하기 위해 핵무기를 만들지 않았다”는 북한측 강석주의 말에서 이것이 결코 호락호락한 쟁점이 아님을 느낄 수 있다. 북미 관계가 정상화되지 않는 한 북한은 먼저 핵무기를 폐기하려 할 것 같지 않다.

셋째, 이번 합의에서 새로 등장한 용어인 “불능화”가 무엇을 뜻하는지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2.13 합의 직후 북한은 중유 100만 톤 제공이 “핵시설 가동 임시 중지”의 상응 조처인 것으로 보도해, “불능화”를 가동 임시 중지로 해석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논란을 낳았다. 가동을 중지하면 핵시설이 “불능” 상태가 되는 것은 맞지만, 이것은 아예 재가동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싶어하는 미국과는 차이가 큰 해석이다. “불능화”가 봉인·폐쇄와 폐기·해체 사이 어디쯤에 있는 개념인지,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 논란이 불가피할 것 같다.

여전히 제국주의 “사슬의 가장 약한 고리”는 중동

2.13 합의는 말 그대로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 조치”일 뿐이다. 부시 정부의 정책 변경에 대한 얘기들이 많이 나오고 있지만, 부시 정부가 북미 관계 정상화로 방향을 잡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미국은 일단 중동 정세에 전념하기 위한 선에서 작은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 변화란, 전에는 북한을 6자회담에 묶어두려 하기만 했다면 이제는 그러기 위해 당근도 제공해야 함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목적에 비춰 봤을 때, 2.13 합의의 앞날은 상당 부분 중동 정세에 달려 있을 것이다. 중동에 전념해야 하는 동안에는, 미국은 여러 문제들을 일단 덮어두고 그럭저럭 관계를 관리하려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중동에서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인다면 미국은 덮어뒀던 문제를 언제든 다시 꺼내들어 부상하고 있는 중국을 견제하는 데 사용하려 할 수 있다.

문제는, 중동 전쟁의 반사이익 격으로 한반도 날씨가 개는 얄궂은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이다. 한반도를 세계의 중심처럼 여겨 “2.13 합의문 발표로서 … 미국의 패권 정책에 제동이 걸리고 대화와 협력을 통한 세계 질서 구축이라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고 본다면, 현재진행형인 미국의 전쟁에 대한 반대는 자연히 뒷전이 될 것이다. 미국이 중동에 전념할 수 있게 해주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미국이 중동에서 확실하게 패퇴하지 않는 한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지속적인 평화체제가 구축되기는 어렵다. 더구나 자국 정부가 제국주의 전쟁을 지원하는 상황에서는 진정한 평화 체제를 구축하기 어렵다. 2.13 합의의 앞날이 상당 부분 중동 정세에 달려 있기 때문에라도 한반도 평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은 이라크 점령 반대(그리고 자이툰 철수)와 이란 공격 반대를 위해 흔들림 없이 투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