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게재] 사회연대전략:
오건호의 동어반복을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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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필자가 〈레디앙〉에 기고한 글을 재게재한 것이다.
그동안 다양한 정치 경향의 비판자들이 다양한 측면에서 비판을 제기했음에도 오건호 위원의 답변은 애초 사회연대전략과 ‘국민연금 보험료 지원사업’을 제기할 때 제시된 논거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건호 위원이 지속적인 논쟁을 “동의하기 어려운” 반론이라고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척박한 토론 문화”를 벗어나려면 먼저 비판자들이 왜 ‘노동자 양보론’, ‘계급분열전략’이라고 비판하는지 경청해 볼 필요가 있다.
한 발자국
오 위원은 보험료 지원사업 재원 13조 원 중 노동자 ‘참여’ 몫이 4조 원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 액수가 핵심은 아니지만 애써 ‘불과’하다고 말할만큼 적은 액수도 아니다. 또, 오 위원이 “양보가 아니라 참여”라고 표현을 다르게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사회연대전략이 실현되면 노동자들의 지갑이 가벼워지는 현실까지 바꿀 수는 없다.
오 위원 스스로 지적했듯이 “노동조합 활동가의 3분의 1이 보험료 지원사업을 노동자 임금양보론으로, 사회연대전략을 계급분열전략으로 판단하고 있다”면 척박한 토론 문화를 따지기 전에 오 위원 스스로 자기 이론을 재점검해 봐야 하지 않을까?
연금 보험료의 절반을 내는 사용자의 부담은 해당 노동자를 고용한 대가로 지불하는 것이고 이것은 지급 시점이 노후로 연기된 임금의 일부일 뿐이다. 따라서 사용자의 연금 부담분이 사용자의 ‘사회적 연대 참여’인 것은 아니다.
그래서 민주노동당은 2004년 총선 공약에서 직장 가입자의 연금 보험료를 사용자가 전액 부담하라고 요구했던 것이다(2004년 민주노동당 총선공약 제3권 626페이지를 보라).
오 위원의 시장임금과 사회임금 구분 논리나 ‘복지 재원 노동자 참여론’ 모두 2004년 총선 공약에서 후퇴한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오 위원이 “사회연대가 부유세를 포기하거나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다.
그러나 “노동자가 자기에게 주어진 소득세를 납부하는 것이 부자에게 부유세를 납부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서로 상충되지 않는다”는 주장은 생뚱맞다. 이 나라의 기업주, 부자 들은 지난 10여 년 동안 특별소비세 인하, 법인세 인하, 소득세 인하를 위해 부단히도 투쟁하고 투쟁해 자신의 목표를 쟁취해 왔다. 결국 노무현 정부는 그 부족분을 메우려고 부가가치세 등 노동자 증세를 추진해 왔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이미 “주어진 소득세”를 ‘원천징수 당하고 있다’. 그 세금으로 쥐꼬리만한 복지를 제공하자 기업주, 부자 들은 ‘퍼주기식 복지’라며 호들갑을 떤다. 백지 위에 새로운 사회를 그리고 있는 게 아니라면 오 위원은 이런 현실에서 노동자들의 부담을 늘리라는 ‘사회연대전략’이 누구를 기쁘게 할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양보
오 위원은 자신의 최초 주장인 ‘계급형성전략론’과 진보정치연구소의 ‘헤게모니전략론’을 들이대며 ‘사회연대전략’이 계급 분열 전략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그러나 오 위원이 국민연금 ‘가입자의 특혜’와 ‘미가입자의 배제’를 대립시키는 한 분열 전략일 수밖에 없다. 불행히도 ‘사회연대전략’은 연금 가입자의 양보를 끌어내야 하기 때문에 오 위원은 가입자 특혜론을 버릴 수 없을 것이다.
오 위원은 최대 다섯 배나 돌려받는다며 가입자의 ‘특혜’를 과장한다. 실제로 최저소득 22만 원을 기준으로 월 2만 원씩 연금 보험료를 납부하는 가입자는 20년을 납부했을 때, 매달 소득의 1백%를 연금으로 받는다. 평균 소득대체율 60%(40년 납부 기준)보다도 높은 것으로 대단한 ‘특혜’다.
그러나 평생 매달 22만 원으로 살다가 노후에도 매달 연금 22만 원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을 두고 ‘가입자의 특혜’라 부를 수 있을까? 138만 원 소득자가 20년 동안 보험료를 내고 받게 될 연금 급여 44만1천9백80원도 기준 소득대체율보다 높지만 ‘특혜’라고 부를 만한 것은 못 된다.
반면 평생 특혜를 누리며 살면서도 얼마 안 되는 보험료를 내고 최고액의 연금을 받아 가는 자들이 국민연금에서도 특혜를 누리는 것은 사실이다.
결국, 오건호 위원은 가입자와 미가입자 사이의 차이는 지나치게 과장하면서도 이보다 훨씬 커다란 계급 간 차이는 무시하는 것이다. 다른 사회 문제들처럼 현재 국민연금의 가장 큰 문제도 노동자들에게는 불충분하고 부자들에게는 지나치게 관대한 데 있다.
요컨대, 진정한 불평등의 분단선은 가입자와 미가입자 사이가 아니라 계급 사이에 있다. 필요한 것은 가난한 이들의 노후 생계를 보장할 충분한 연금이다. 오건호 위원을 비롯한 사회연대전략 입안자들의 ‘제도내적’ 접근법으론 “우리끼리 나눠먹기”를 넘어설 수 없다.
오 위원은 “계급은 역사 속에서 오직 형성될 뿐이다”라는 EP 톰슨의 말을 인용했다. 그러나 생산관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로부터 계급을 규정하지 않는 EP 톰슨의 이론은 맹점이 있다. 또, 사회연대전략을 통해서 자기의식적 계급이 형성될 수 있다는 오건호 위원의 주장은 EP 톰슨의 ‘계급형성론’의 합리적 핵심과도 어긋난다.
EP 톰슨은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에서 차티스트 운동까지 이르는 지난한 투쟁 속에 어떻게 영국 노동계급이 ‘형성’되는가를 다뤘다. 노동자 계급이 단결과 계급의식을 획득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역동적 계급투쟁 속에서지, ‘사회연대전략’ 같은 ‘양보와 나눔’ 속에서가 아니다.
정부, 사용자, 노동자 모두 함께 이루는 ‘사회적 연대’는 사실상 ‘국민적 연대’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그래서 사회연대전략은 낡은 노사정 대타협 모델과 근본에서 하나도 다르지 않다. 하나의 자기의식적 계급이 역사적으로 형성되려면 계급으로 구성될 사람들의 동일한 객관적 이해관계가 존재해야 한다. 따라서 훌륭한 계급 정책은 이 이해관계를 명확히 밝혀주는 것이다.
계급 분단선을 명확히 하고 계급 투쟁을 고무하는 정책만이 자기의식적 노동계급의 형성을 도울 수 있다. 오 위원은 “우린 게을렀다. 손쉽게 투쟁, 총파업이라는 만병통치약으로 도망갔다”고 하지만, 사실은 투쟁, 총파업을 입으로만 했지 그것을 실제 가능케 할 노력과 실천에 게을렀다고 하는 편이 훨씬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이에 책임이 있는 노동 운동의 주요 지도자들이 “도피한” 곳이 바로 사회연대전략 같은 노사정 대타협 모델이었다는 점에서 진정한 문제는 ‘척박한 토론 문화’가 아니라 ‘수세적 후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