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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의 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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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7일 편집자주] 최근 코로나19 팬데믹과 경제 위기 등을 맞아 국가 개입이 강화되면서 신자유주의가 끝났다는 주장을 종종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몇몇 국유화나 국가 개입 강화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말한다.
자유시장 옹호자들은 “대안이 없다”는 말을 끊임없이 되풀이한다.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신자유주의 반대 운동이 이런 주장을 반박할 수 있으려면 민주적 계획의 실행 가능성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글은 영국의 혁명적 반자본주의 월간지 〈소셜리스트 리뷰〉 2006년 7월 호에 실린 글을 번역한 것이다.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중앙위원이자 런던대학교 킹스칼리지의 유럽학 교수이고, 《반자본주의 선언》, 《카를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 《미국의 세계 제패 전략》 등 많은 책을 썼다.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반란의 물결이 계속 고조되고 있다. 유럽에서 이 점이 가장 분명히 드러난 곳은 프랑스다. 프랑스에서는 1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신자유주의 유일사상(빵세 위니끄)이 두 번이나 아찔한 패배를 경험했다. 첫째는 유럽연합 헌법 찬반 국민투표에서 좌파들의 반대 운동이 승리한 것이고, 둘째는 청년 노동자들의 권리를 제한하려는 최초고용계약법(CPE)에 반대하는 사회적 반란의 성공이었다.
그러나 이런 승리를 거두자, 신자유주의를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훨씬 더 날카롭게 제기된다. 대안세계화 운동이 실질적 성공을 거둘수록 이 운동을 향한 진부한 비난, 즉 대안세계화 운동은 현 상태에 반대만 할 뿐 건설적인 강령은 전혀 제시하지 못한다는 비난도 커진다.
운동 안에는 이런 과제에 도전장을 낸 이들이 있다. 예컨대, 프랑스 국민투표 후 ‘다른 세계를 향한 운동’ 활동가들은 “다른 유럽의 원리 헌장”을 작성해 신자유주의적 유럽 헌법을 대체하자는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지난해 11월 피렌체 회의에 이어, 최근 아테네 유럽사회포럼에서도 이 주제로 토론회가 열렸다.
지금까지 작성된 “원리 헌장”의 초안에는 논쟁의 소지가 별로 없다. 초안은 기존의 인권 개념을 확장해서 일련의 “공통된 사회적 권리들”을 엄밀히 규정함으로써 예컨대 공공 서비스가 초국적기업들의 먹잇감이 되는 것 등을 막는 데 집중하고 있다.(이 초국적기업들은 사실상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진행 중인 민영화 정책으로 이윤을 얻으려고 혈안이 돼 있다.)
“원리 헌장”은 전후 사회민주주의 이데올로기에 굳건히 뿌리박고 있다. TH 마셜은 그의 고전적 에세이에서 지난 200년 동안 시민권 개념이 시민적 권리(예컨대 개인의 자유, 사유재산)에서 정치적 권리(특히 보통 선거 실시)를 거쳐 사회적 권리(예컨대 고용·복지·교육)에 이르기까지 확장된 과정을 추적했다. 근본적으로 신자유주의는 전후의 복지국가로 대표되는 사회적 권리들을 제거해서 이 시민권 확장 과정을 되돌리려는 “반(反)종교개혁”[반동]이다.
사적 소유에 도전하기
그런 점에서 이런 사회적 권리들을 방어하는 것은 분명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 권리들을 지켜야 한다는 것과, 이 권리들 그 자체만으로 신자유주의를 대체할 대안이 충분히 갖춰진다고 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오늘날 세계를 주름잡는 워싱턴 컨센서스는 자본 논리를 아주 날것으로 대변한다. 이에 따르면, 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상품화 해야 한다. 이런 논리를 거부하려면 대안적 사회적 논리를 제시해야 함에도 “원리 헌장”은 이 문제에 침묵한다.
한 가지 핵심 문제는 사적 소유다. 모든 것을 상품화 하려면, 개인과 기업이 그런 상품 ― 유전자 같은 추상적 재산도 포함하는 ― 을 배타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권리가 확고하게 보장돼야 한다. 세계은행이나 세계무역기구(WTO) 같은 국제 금융 기구가 매우 강력하게 추진하는 신자유주의 의제 가운데 하나가 절대적 사유재산권의 강화·확장이다.
대안세계화 운동은 이에 대해 뭐라고 말해야 하는가? 세계를 조각 내어 기업들과 부자들의 재산으로 만들려는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설 대안으로 대안세계화 운동은 어떤 소유 개념을 제시할 수 있는가? 이것은 단지 학술적 문제가 아니다. 2006년 5월 1일 볼리비아의 새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는 군대를 보내 석유·천연가스 시설을 장악함으로써 탄화수소 산업을 다시 국유화한다는 명령을 관철시켰다. 석유·천연가스 산업 국유화는 2005년 5∼6월 우파 대통령 카를로스 메사를 축출한 민중항쟁의 주된 요구였다.
그런데 사실, 많은 대안세계화론자들은 국유화 요구를 불편하게 여긴다. 지난해 10월 나는 멕시코시티의 꽉 막힌 도로 위 미니버스 안에서 승객들 ― 전 세계에서 온 지식인들과 활동가들 ― 이 서로 열띤 논쟁을 벌이는 장면을 목격했는데 그 주제는 볼리비아 운동이 국유화를 요구하는 것이 과연 옳으냐는 것이었다. 비슷한 맥락 속에서 위의 “원리 헌장” 초안도 소유 문제를 다음과 같이 얼버무린다.
“이런 공공 서비스가 기능하고 토양·대기·물·에너지 같은 공공재를 사용하는 문제는 사회적 소유 프로젝트를 실행하도록 요구한다. 우리는 새로운 종류의 사회화를 고안해야 한다. 그런 사회화는 국가 소유나 정부 소유가 아닌 동시에, 공공 서비스의 조직·기능·구상과 관련된 의사결정 과정에 민중과 노동자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어색한 문장으로 정식화가 된 것은 운동 안팎에서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영어로 소통하느라 빚어진 문제만은 아니다. 국유화에 대한 이런 의구심의 배경에는 동구권에서 스탈린주의가, 서구에서 사회민주주의가 도입한 관료적 국가 소유의 기억이 있다. 그러나 더 직접 영향을 미친 것은 존 홀러웨이의 유명한 책 《권력을 잡지 않고 세계를 바꾸기》[국역: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갈무리] 제목에 요약된 자율주의 이데올로기다. 다시 말해, 국가는 잊어 버리고, 신자유주의를 대체할 지역적 대안들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국유화
홀러웨이의 관점은 일반적 전략으로서 전혀 가망 없는 것이다. 하지만, 당면 과제를 해결하려 할 때도 가망 없기는 마찬가지다. 볼리비아 민중은 탄화수소 민영화 철회를 원한다. 이 경우, 탄화수소 산업을 렙솔YPF나 페트로브라스 같은 외국의 다국적기업들한테서 빼앗은 후 그 산업을 어찌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불가피하게 이것은 소유 문제를 제기한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국유화 외 대안은 없는 듯하다는 것이다.(오히려 모랄레스의 국유화가 소유권을 100퍼센트 온전히 가져오지 못했다고는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는 탄화수소 산업 장악처럼 어마어마한 일을 집행하는 데에 필요한 강제력과 정치적 정당성을 모두 가진 국민적 기구이다. 더욱이, 그런 정당성은 국가가 대중의 요구에 부응한다고 여겨지는가에 결정적으로 달려 있다. 이 때문에 국가는 아래로부터의 압력에 따를 수도 있다. 그 압력이 볼리비아에서처럼 거대하다면 말이다. 모랄레스는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는 사회주의운동당(MAS) 지도자로서 탄화수소 국유화에 사실 반대했다. 그러나 모랄레스를 권좌로 밀어올린 운동이 국유화를 그에게 강요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적인 사회민주주의의 낡은 실수를 되풀이하면서 기존 국가를 진보적 사회 변화의 주요 주체로 여겨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대중의 압력에 반응하는 것은 자본주의 국가이고, 그때조차 자본주의 국가는 자본의 지배를 유지하려 한다. 이를 위해 국가는 무엇보다 대중의 참여·주도력·통제를 배제하고자 관료적·위계적 방식으로 조직된다. 이 때문에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자본에 반대하는 혁명이 성공하려면 자본주의 국가를 파괴하고 그것을 기층의 민주주의 기구로 대체해야 한다고, 그래서 노동 대중이 스스로 통치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항상 주장해 왔다.
따라서 국유화 자체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그렇다고 해서 볼리비아에서 일어난 일이 덜 중요해지는 것은 아니다. 수십 년 동안 공공 자산이 사적 이윤을 위해 매각돼 왔는데, 한 나라에서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대중 반란이 정부를 압박해 이를 되돌리는 성과를 낸 것이다. 그 성과가 결코 시덥잖지 않다는 점은 모랄레스 정부가 석유·천연가스 산업을 장악했을 때 세계의 정·재계 권력자들이 죽겠다고 비명을 지른 것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런 경험은 프랑스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LCR)의 앙트완 아르투(Antoine Artous)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확인시켜 준다. “소유관계를 통째로 전복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각하게 변형을 가하는 것도 피하면서 어떻게 역동적인 사회 변혁의 동력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르투는 더 나아가 국유화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사회적 소유라는 개념 전체를 단지 소유권의 법률적 이전으로 환원할 수는 없다. 사회적 소유는 자본주의적 노동 분업(위계적 방식의 생산 조직)에 전면적으로 도전해서 협력적 생산 방식으로 대체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시장이냐 계획이냐
정말이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논리와 제대로 단절하려면 국유화를 확장하는 매 단계마다 민주적 자주관리 조직이 함께 등장해야 할 것이다. 그런 조직을 통해 국유화한 산업의 노동자들은 그 생산품의 소비자들과 함께 집단적으로 경영하면서 공공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도 단지 학술적 문제만은 아니다.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미국에 대항하며 “21세기의 사회주의”를 주창하고 있는 베네수엘라에서는 급진적으로 변하는 상황 속에서 대안적 경제 편제 방식이 무엇이냐는 문제가 떠오르고 있다.
이 문제를 진지하게 다룬다는 의미는 국유화뿐 아니라 계획경제에 대해서도 말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금기를 깨는 것이다. 1930년대 이래로 계획경제는 옛 소련과 그 위성국가들의 관료적 지령경제와 동의어로 여겨져 왔다. 이들 국가의 경제가 성장하는 동안에는 계획경제가 엄청난 위세를 떨쳤고, 그래서 인도 같은 탈식민지 국가들이 모방하기도 했다. 소련의 쇠퇴와 몰락 이후 계획경제는 철저한 불신의 대상이 됐고 신자유주의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됐다. 오늘날의 주류 경제학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경제들 가운데 일부 ― 중국과 남한 ― 가 국가 개입에 얼마나 크게 의존했는지를 체계적으로 은폐한다.
계획경제에 대한 반감 때문에, 현존하는 자본주의를 대신할 대안을 찾으려는 사람들조차 모종의 시장경제는 불가피하다고 여긴다. 이 점은 예컨대 철학자 데이비드 밀러와 경제학자 존 로머(John Roemer)가 옹호하는 시장사회주의에서 가장 분명히 드러난다. 시장사회주의에서는 협동조합을 집단적으로 소유하지만 각각의 협동조합은 자신의 생산물을 시장에서 판매하기 위해 서로 경쟁한다. 심지어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인 토니 스미스(Tony Smith)조차 그의 신간 《세계화: 체계적인 마르크스주의적 설명》(Globalisation: a Systematic Marxian Account)에서 시장을 민주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식의 전략에 내재한 근본적 문제점은 어떤 시장경제든 필연적으로 경쟁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조금 더 전문적으로 말하면, 시장경제에서는 자원의 할당이 기업 간 경쟁의 의도치 않은 결과이다.(그 기업들은 공동으로 그러나 비(非)집단적으로 경제를 지배한다.) 다시 말해, 각 기업이 차지하는 자원의 양은 자신의 상품이나 서비스를 얼마나 성공적으로 시장에서 판매했는가에 달려 있다. 사회 전체가 자원 배분 방식을 집단적으로 결정하는 과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기업이 경쟁에서 패배하면 그 기업은 자신의 자원을 잃고 파산한다. 따라서 시장경제의 개별 단위들은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생산비를 절감해서 상품의 가격을 낮춰야 한다는 압력을 체계적으로 받는다.
당연히, 이런 구조에서는 전체 경제를 민주적으로 조직할 수 없다. 왜냐하면 민주적이든 아니든 자원 할당을 둘러싼 집단적 결정 과정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경제 전체가 아니라] 개별 기업 수준에서도 민주적 조직을 유지하기가 매우 힘들다. 이 점은 〈지넷〉(ZNet)의 마이클 앨버트가 아주 잘 설명했다. 노동자들이 통제하는 어떤 기업이 민주적이고 평등하게 운영되지만 매출이 지지부진하다고 치자. 이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어찌 해야 하는가?
노동자들이 파산을 피하려면 대체로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자기 임금을 깎고, 노동조건 악화와 노동강도 강화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을 대단히 소외시키는 방법이고 정서적·심리적으로 감당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경영진을 고용해서 비용 절감 및 매출 신장 대책을 실행하도록 하고, 그로 인한 부정적 효과에서 경영진은 면제시켜 주는 것이다. 실제로는, 후자의 가능성이 아주 클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따라서 시장에는 노동인구를 두 집단으로 나누는 강한 압력이 존재한다. 바로 복종하는 다수와 결정을 내리는 소수로 나누는 것이고 그 소수는 더 많은 소득과 권한을 향유하고, 다수에게 비용 절감 정책을 부과하지만 자신은 그 부정적 효과에서 면제된다.
따라서 시장경제 안에서 민주주의·평등의 고립된 섬들이 등장하더라도 시장경제의 논리는 그것을 침식하고 마침내 집어삼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시장을 민주화할 수 있다고 믿는 로머와 스미스 같은 사회주의자들도 딜레마에 봉착하리라는 것이다. 시장의 작동에 온갖 규제를 가해서 시장이 민주주의를 훼손하지 못하게 막거나(이 경우 경쟁 논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구상한 경제는 붕괴할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경쟁 논리를 관철시키려 하다가는 자신들이 실현하고자 하는 사회주의의 이상을 파괴할 것이다.
파레콘
이것의 함의는 모름지기 신자유주의를 대체할 지속가능한 대안이 되려면 시장이 아니라 민주적 계획에 바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경제가 어떤 모습일지 보여 주는 모델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앨버트의 파레콘(참여경제)이다. 이 모델에서는 노동자 평의회나 소비자 평의회가 존재하고, 개인과 기업은 이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사회적 자원을 제출한다. 이후 점진적 조정 과정을 거치는 동시에 모든 참여자들이 최대한 자원을 할당받을 수 있도록 기술 전문가들이 계획을 수립한다.
이 모델의 주된 약점은 시장경제의 작동 방식을 너무 많이 모방한다는 것인데 자원 할당 요구가 개별적 수요에 따라 좌우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앨버트는 아나키스트인데, 분권화에 대한 그의 열정이 여기서는 너무 멀리 나아갔다. 사회적 자원의 할당은 가치 중립적인 기술적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모종의 집단적·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이 필요한 정치적 문제이고 사회적 우선순위에 대한 여러 이견들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경우가 흔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영국의 좌파 경제학자 팻 드바인(Pat Devine)이 제시한 이른바 협상 조정 모델이 더 우월하다. 여기서는 생산자와 소비자, 기타 이해당사자 집단이 서로 논의한 결과에 따라 대체로 자원이 할당된다. 그러나 이는 일국적·국제적 수준에서 민주적으로 결정된 경제적 우선순위의 틀 안에서 자리매김해야 한다.
물론 민주적 계획경제에 대해 할 말은 훨씬 더 많고 해야 할 일은 그보다도 더 많다. 그럼에도 앨버트와 데바인 등 여러 사람들이 수행한 작업이 중요한 것은, 계획경제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고 시장을 거부한 경제가 어떻게 민주적이면서도 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지를 개략적으로 보여 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노동자 국가
그러나 자본주의와 어떻게 단절하더라도 완전한 계획경제로 단번에 도약할 수는 없다. 오래 전에 마르크스는 《고타 강령 비판》에서 새로운 노동자 국가는 자본주의의 자국이 깊이 새겨진 사회를 물려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초기에 노동자 국가는 낡은 질서와 타협해야 할 것이고 점진적으로 “능력에 따른 노동, 필요에 따른 분배!”라는 공산주의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자본주의와 단절한 사회라면 경제에서 결정적 전환을 이뤄 우선순위를 경쟁의 무계획성에 내맡기지 않고 민주적으로 결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핵심적으로 금융시장을 통제하고, 노동자 통제 아래 경제의 핵심 부문을 국유화하고, 부(富)와 소득을 부자에게서 빈민에게로 분배하는 진보적 세금 제도를 바탕으로 사회복지 제도를 확장해야 할 것이다.
이런 조처들은 분명 급진적이지만, 여전히 시장경제의 많은 측면들을 남겨 뒀을 것이다. 여전히 상당한 부문이 민간의 수중에 있을 것이다. 경제 전체를 민주적 계획의 원리에 따라 전환하려면 지속적으로 압력을 가하고 새로운 조처들을 도입해야 할 것이다. 한 가지 핵심 조처는 오늘날 우리의 생활을 좌지우지하는 자본주의 노동시장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를 위한 최상의 방법은 보편적 기본소득을 도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국민에게 기본적 필요를 (아주 높은 수준은 못 돼도 존엄을 지킬 정도로는) 충족시킬 소득을 당연한 권리로 지급하는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 목적에 이바지할 것이다. 첫째, 기존 사회복지 제도보다 훨씬 더 효율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기본적 복지를 보장할 것이다. 자녀가 있거나 신체 장애가 있거나 어떤 이유로든 남들보다 더 많이 필요한 사람들은 기본 소득을 더 많이 받을 것이다.
둘째, 기본 소득이 보장되면 노동시장이 제공하는 일자리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압력이 크게 줄어들 것이다. 자본주의의 주된 전제조건 가운데 하나 ― 노동자들에게는 임금노동말고 달리 대안이 없다는 것 ― 가 제거되는 것이다. 노동과 자본 사이의 힘의 균형이 (고용주의 본성과 무관하게) 노동자들에 유리하게 기울 것이다.
더 크게 보면, 권력 문제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내가 방금 간략히 설명한 구상에서 분명한 난관 하나는, 시장 자본주의로의 복귀나 옛 소련에서 득세한 국가자본주의가 아니라 민주적 계획경제를 향해 나아가도록 어떻게 담보할 것이냐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정치 권력이라는 조종대를 노동자들 자신이 쥐고 있는 것뿐이다.
권력을 위한 투쟁
국가가 오늘날과 같은 형태 ― 자본과 이해관계를 긴밀히 공유하는 국가 운영자들로 이뤄진 위계적 기구와 관료적 조직 ― 를 취하는 한, 어떤 사회 개선도 일시적이거나 취약할 수밖에 없다. 국가를 무시하자는 홀러웨이 등의 전략이 어리석은 이유는 이 때문이다. 우리가 민주적 계획경제를 향해 나아가려 한다면, 기존 국가와 대결해서 그것을 분쇄해야 한다.
이런 과업은 새로운 종류의 권력을 발전시켜야만 이룰 수 있다. 자본에 맞서 투쟁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자주적으로 만든 조직은 그런 권력이 등장할 토대가 될 수 있다. 20세기의 위대한 혁명 운동들은 이런 권력을 언뜻언뜻 보여 주었다.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의 노동자·병사 평의회부터 1978∼79년 이란 혁명기의 노동자 쇼라에 이르기까지. 2003년 10월과 2005년 5∼6월 볼리비아 민중항쟁 당시 운동이 만들어낸 자주적 조직들을 보면, 오늘날 반신자유주의 운동들도 이런 종류의 권력을 창출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민주적 계획경제는 자주관리 사회일 것이다. 그 사회에서는 작업장과 지역사회에서 직접 선출된 평의회들이 자신들의 일상사를 책임지고 서로 연계해서 사회 전체를 위한 결정들을 내릴 것이다. 1871년의 파리 코뮌을 보며 마르크스가 얻은 핵심 통찰은, 이런 조직 형태들이 새로운 사회가 건설되기 전에, 낡은 사회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등장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자주관리 사회의 토대가 될 이 자주적 조직들은 피착취·피억압 대중이 자본에 저항하고 마침내 자본주의 자체를 타도하는 데도 필요하다.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과정이다. 시장경제 하에서 노동자 협동조합이 부딪힐 딜레마라고 앨버트가 본 문제는, 자본주의가 여전히 지배적인 세계에서 어느 한 나라가 민주적 계획 원리를 도입하기 시작할 경우에 직면할 딜레마이기도 하다. 이 똑같은 딜레마가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이 변질되고 끝내 패배했던 원인이다. 세계의 어느 한 곳에서 자본의 논리를 뚫고서 열린 돌파구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자본의 논리를 계속 전복하며 점차 세계 규모로 확산하는 것뿐이다.
이것은 무리한 요구처럼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자본의 세계화 때문에 저항도 세계화했다. 세계의 각지에서 벌어지는 투쟁들은 서로에게 전염된다. [멕시코] 치아파스와 시애틀 투쟁은 세계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프랑스의 위대한 반(反)CPE 투쟁은 그리스 학생 운동을 고무했고 그 운동은 최근 우파 정부를 패퇴시켰다. 라틴아메리카의 운동들은 신자유주의에 맞서 싸우는 모든 사람들에게 등대가 됐다.
아직은 한 나라에서라도 자본주의를 타도하려면 갈 길이 멀다. 그러나 규제받지 않는 시장에 반대하는 세계적 저항은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다는 생각을 의제에 올려놓았을 뿐 아니라, 그 대안을 쟁취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내는 데도 일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