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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난 두렵지 않아요》 외

난 두렵지 않아요

이크발은 집이 가난해서 카펫 짜는 공장에 팔려왔다. 그 곳 어린이들은 자기처럼 빚을 갚기 위해 팔려온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15시간 가까이 일한다. 일을 잘 못 하면 벌로 쇠사슬을 감은 채 일해야 한다. 화장실을 마음대로 갈 수도 없고 마음놓고 씻지도 못 한다.

잘못이라도 저지를 땐 ‘무덤’에 갇힌다. 무덤은 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지하 물탱크다. 물탱크 안에는 물뱀이나 전갈 같은 무서운 동물들도 살고 있다. ‘잘못을 저지른’ 아이들은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한다. 5∼12세 어린이들에게는 죽음보다도 고통스런 벌이다.

카펫 공장에는 커다란 칠판이 있다. 아이들의 빚을 기록해 놓은 칠판이다. 이크발이 칠판에 적힌 빚이 결코 없어지지 않을 거라고 얘기하자 아이들은 울먹인다.

카펫 공장에는 금지된 말이 있다. “내년 여름”이나 “3년 뒤”, 혹은 “내가 커서”라는 말이다. 그 곳 아이들은 더 이상 꿈을 꾸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크발에게는 꿈이 하나 있다. 변호사가 돼서 노예 노동에 시달리는 어린이들의 권리를 찾아 주는 것이다. 결국 이크발은 한 번의 실패 끝에 탈출에 성공한다. 탈출한 소년은 ‘미성년자 노동해방전선’ 활동가들의 도움으로 자유의 몸이 된다. 그리고 카펫 공장의 친구들도 함께 자유의 몸이 됐다.

다른 아이들은 자기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갔다. 이크발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크발은 그 곳에 남아서 활동하겠다고 말한다. 다른 활동가들이 이크발이 너무 어리다고 말하자 이크발은 단호하게 말한다. “난 무섭지 않아요.”이제 이크발은 세계에서 가장 어린 노동 운동가다. 몸에 비해 확성 나팔이 아주 무거워 보이지만, 아동 노동자의 권리를 외치는 목소리는 누구보다도 결연하다. 이크발은 날마다 사장들이 고용한 마피아들에게 살해 위협을 당한다. 언론은 어린이의 순수함을 이용한 부끄러운 짓이라며 이크발을 매도했다. 뇌물을 받은 경찰들도 소년의 편이 아니었다.

그럴수록 이크발의 목소리는 커졌다. 이크발은 세계에 알려졌고, ‘행동하는 젊은이 상’을 받는다. 스웨덴에서 열린 노동 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 회의에도 참여했다. 이크발은 회의에 참여해 이렇게 말했다.

“파키스탄에는 7백만 명의 어린이들이 깜깜한 새벽에 잠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그 어린이들은 밤까지 일합니다. 아이들은 노예입니다. 어린 시절을 잃어버린 채 매를 맞고 학대받는 어린이가 한 명이라도 있는 한 우리는 그 누구도 그 일이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희망이 없다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저를 보십시오. 저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용기를 내십시오.”그러나 비열하고 무자비한 자본가들은 이크발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결국 어린 노동 운동가는 그 상을 받고 얼마 뒤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 1995년, 그의 나이 13세였다. 이크발은 비록 죽었지만, 아크발이 남긴 감명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이크발은 2000년 ‘세계 어린이 상’의 첫 수상자가 됐다.

월드컵 열기가 한창이다. 많은 사람들이 멋진 골에 열광할 때 한 인도 소녀가 가슴 아픈 사연을 말하러 한국에 왔다. 그 소녀는 5살 때부터 축구공을 만들다 7살 때 시력을 잃었다. 인도 어린이 2만 명과 그보다 훨씬 많은 파키스탄 어린이들이 축구공을 만든다고 그 소녀는 고발했다. 12시간 넘게 고된 노동을 하고 받는 돈은 겨우 3백 원 정도다. 시력을 잃은 인도 소녀는 “변호사가 돼서 어린이들이 학교에 갈 수 있도록 일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크발은 죽었지만, 아동 노동을 철폐하기 위한 운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아동 권리에 관한 협약을 보면 ‘아동은 완전하고 조화로운 인격 발달을 위해 가족적 환경, 행복, 사랑, 이해의 분위기 속에서 성장해야 한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지금 3억 명에 달하는 어린이들이 하루 12시간이 넘는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이 책은 아동 노동 현실에 용감하게 저항하다 목숨을 잃은 ‘아름다운 소년’ 이크발에 대한 이야기다.

승영


진화의 패턴

인류가 봉건제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도약하던 몇 세기 전, 단 한 번도 도전받지 않았던 기존 관념들이 새로 등장한 혁명적 사상들과 충돌했다.

특히, 과학의 발전 덕분에 기독교적인 지배 관념을 송두리째 뒤엎는 이론들이 생겨났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신의 생명 창조를 부정한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다.

진화론이 세상에 발표된 지 140여 년이 지난 지금 자본주의는 아주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다.

우리는 인간을 달에 보내고 유전자를 조작하고 일식 같은 사건들을 예보할 수 있다. 또 지구와 우주의 운동을 측정할 수 있는 세계에 살고 있다. 그러나 세계 제일의 선진 과학 기술을 갖고 있는 미국에서조차 사람들의 55퍼센트 가량은 인간이 원숭이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는 여론 조사가 발표됐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 캔자스 주 교육위원회는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을 금지했다.

로저 르윈은 《진화의 패턴》에서 명쾌한 이론이었지만 창조론자들의 독기어린 비판에 모든 답변을 할 수 없었던 진화론이 《종의 기원》 이후 어디까지 발전했는지 설명하고 있다.

또 인류학, 계통학, 비교해부학, 가장 최근에 대열에 합류한 분자생물학 등 진화의 패턴을 밝히려는 학문이 어떻게 분화·발전·통합하는지를 설명한다.

저자는 진화론에 대한 오해나 미래의 부풀려진 환상을 지적한다.

진화론을 비판하는 창조론자들이 흔히 제기하는 문제 중 가장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는 ‘잃어버린 고리’에 관한 것이다. 종과 종 사이에는 커다란 형태 차이가 있는데도 현대의 종 사이의 고리, 즉 중간 단계의 생명체는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단계, 모든 고리를 찾아내야 진화론의 타당성이 입증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진화가 어떤 식으로 일어나는지 분석하는 데 과학자들 스스로 만족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적어도 30년 전까지는 그랬다.

1975년 킹과 윌슨은 새로 도입한 분자생물학적 방법으로 얻은 결과와 기존의 형태학적 분류를 비교 분석했다. 그 결과 생물체의 유전자는 끊임없이 진화하지만 생물체 전체의 구조를 조절하는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겼을 때 훨씬 극적인 형태 변화가 ─ 종종 폭발적으로 ─ 일어난다는 결론을 얻었다. 유전자와 형태학적인 진화는 서로 연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고리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자연 선택’ 이론은 이보다 훨씬 전부터 창조론자들의 주된 공격 대상이었다. 심지어 진화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조차 이 이론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와 불충분한 과학 기술 때문에 종종 함정에 빠지곤 했다.

진화의 발단이라고 할 수 있는 유전자 돌연변이가 생겨나는 즉시 ‘좋은 것’으로 선택돼 다수의 종을 이루거나, ‘나쁜 것’으로 선택돼 제거된다면 진화의 동력은 ‘선택’ 자체이고 이는 초자연적인 ‘의지’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실험들은 그런 변화의 기원이 선택이나 의지와는 무관하게 중립적으로 진행됨을 밝혀냈다. 리처드 르원틴을 비롯한 유전학자들은 초파리, 옥수수, 실험용 생쥐 등을 이용해 모든 개체의 단백질이 각 개체당 평균 30퍼센트 정도에서 하나 이상의 변이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리고 그 기원이 되는 유전자의 10퍼센트 정도가 다형현상(원래의 유전자에서 부분적인 변이를 일으킨 유전자)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진화의 시작, 즉 유전자의 돌연변이는 해부적 특성과 환경의 상호관계에 의해 선택이 일어나기까지 상당 기간 축적된다. 그리고 선택은 자연계의 한 구성원으로서 그 종이 얼마나 적합한지에 따라 결정된다. 자연계 역시 그 모든 종들의 종합물이고 종들의 진화에 영향을 미치면서 역동적으로 변해간다. 분자생물학 연구는 최근 인류의 기원을 연구하면서 중요한 사실들을 밝혀냈다.

인류는 10만 년 전 지금의 아프리카에서 살던 한 집단에서 기원했다.

유인원과 구별되는 인간이 지구에 등장한 5백만 년 전부터 각 지역에 흩어져 살던 원시 인류의 다른 집단은 모두 멸종되고 비교적 최근에 단일한 집단이 세계에 퍼져 살게 되었다. 이는 언어역사학 연구 결과에 의해 그 타당성이 입증됐다.

마지막으로 ‘쥐라기 공원’은 현재의 화학, 물리학이 완전히 뒤집히지 않는 한 불가능함이 증명됐다. 너무 심하게 부패한 고기는 맛을 느낄수 없는 것처럼 엄청난 시간이 지나 분해돼 버린 유전자를 원래의 생명체가 갖고 있던 유전자로 복원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로저 르윈은 우리가 개구리든 공룡이든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유전자 지도를 그리는 것은 전체 과정에서 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또 넘어야 할 장벽이 유전학만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 책에는 전문 생물학 용어들이 많아 읽는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독자들은 이 책에서 진화론을 지지하는 풍부한 역사적 사례들과 수십 년에 걸친 실험 결과들을 보게 될 것이다.

스티븐 제이굴드나 리처드 르원틴같은 저명한 과학자들을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는 것 또한 다른 즐거움을 줄 것이다.

장호종

경제학의 역사

경제학이 어려운 용어들과 수식들로 가득차 있는 것으로만 여기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사람들에게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는 말한다. 경제학은 “사유재산 제도와 부의 추구에 결부돼 있는 권력과 인간의 동기와 행동에 의문을 제기”하는 행위다. 갤브레이스의 말처럼 경제학은 “세계를 반영하는” 작업이다. 갤브레이스는 이것을 《경제학의 역사》에서 이렇게 정리한다. “애덤 스미스의 학설은 산업혁명 초기의 충격 속에서, 데이비드 리카도의 학설은 산업혁명이 더 성숙해진 단계에서, 마르크스의 학설은 자본가 권력에 의한 압박의 시대에서,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학설은 대공황이라는 엄청난 재앙에 대한 반응으로서 각각 발전해 나온 것”이다.

갤브레이스는 야심차게도 그리고 친절하게도 그리스 로마 시대의 경제학부터 더듬어 간다. 당연하게도 당시 경제학은 농업을 찬미했다. 노예 제도의 효율성에 대한 의문도 있었다. “아무 희망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일을 맡기는” 것은 “가장 나쁜 방법이다.”(플리니, 23년경∼79년) 이런 견해는 노예 노동에 의존하는 사회의 비효율성을 반영한다. 기독교와 경제학의 관계를 설명한 제3장의 내용도 흥미진진하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경제학의 주요 관심사는 가격, 임금, 이자, 이윤이 어떻게 결정되느냐는 문제에 집중됐다. 19세기 당시에는, 이윤이 절제의 대가라든지, 기술 혁신과 위험을 감당하는 것에 대한 보수라는 주장이 유행하기도 했다. 갤브레이스는 위와 같은 주장이야말로 설득력이 없었던 19세기 경제학의 최대 약점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뭐니뭐니 해도 근대 경제학은 《국부론》의 등장과 관련있다. 애덤 스미스는 다음과 같은 핵심적인 문제들을 제기했다. 이윤의 원천은 무엇인가? 무엇이 상품의 가격을 결정하는가? 애덤 스미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노동이 모든 상품의 교환가치의 진정한 척도다.” 만약 노동의 양과 그것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용이 가격을 결정한다면? 그리 되면 이윤을 자본가들의 ‘수고’에 대한 대가라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애덤 스미스는 스스로 던진 이 민감한 물음에 애매하고 모순되게 답했다.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데이비드 리카도는 애덤 스미스가 남긴 공백을 메우려 했다. 리카도의 말처럼 이윤은 “과거 노동에 대한 연불”이다. 리카도는 모든 기계나 설비는 날짜 붙은 노동량으로 환산할 수 있다고 봤다. 리카도는 꽤 분명하게 자본가에 대한 보수는 노동자들의 노동에 의한 것임을 증명했다. 지주의 불로 소득에 반대해 산업 자본가의 이익을 옹호하고자 했던 주식 브로커 리카도가 노동자 반란에 불을 당기는 데 기여한 셈이다. 이 책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에 대한 예리하고 통쾌한 비판으로 가득하다. 저자는 고전파 체계의 중요한 특징을 “불황 이론의 결여”라고 말한다. 고전파 체계는 “[불황의] 기원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세이 법칙은 고전파 경제학의 불문율이다. 사는 사람이 없어 물건이 창고에 쌓이는 일이 있을 수 없다. 왜? 세이는 말한다. “공급은 항상 수요를 낳기 때문에, 수요 부족은 있을 수 없다.” 만일 신고전파 이론대로 불황이 이론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 불황에 대한 치유책도 있을 수 없다.

갤브레이스는 케인스의 《일반이론》이 주목받을 수 있었던 주된 이유도 대공황에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대처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저자는 고전파 이론이 미국에 도입되는 과정도 꼬집고 있다. 저자는 경제학의 한 조류가 지배계급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양한 사회 이론과 어떻게 결합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적 다원주의는 고전파 경제학이 자연스럽게 미국에 정착하게끔 하는 윤활유 역할을 했다. “부자란 다원적인 과정에 따라 자연적으로 선택된 존재라고 말함으로써 스펜서는 금전적으로 혜택받은 사람들한테서 모든 죄책감을 해방시켰고 빈곤한 사람들에 대한 의무감과 관심을 모두 제거했다.” 그러나 20세기가 지나면서 이 이론은 지배자들 내에서도 금세 인기를 잃었다. 자본가들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방식이 너무 “품위 없어” 보인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그러나 갤브레이스는 국가의 사회보장 역할을 강력하게 부인하는 경제학자들의 주장에서 허버트 스펜서의 목소리를 여전히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책에는 수많은 경제학자들의 생애와 이론이 친절하고도 재미있게 소개돼 있다. 그리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곰곰히 따져 가면서 더듬어 봐야 할 부분도 많다. 용어, 개념, 인물을 꼼꼼하게 노트 정리하면서 저명한 경제학자들의 체취를 느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김어진

오래된 미래

2002년 9월 요하네스버그에서 세계 지속 가능 발전에 관한 정상회담(WSSD)이 열린다. 리우 선언 뒤 지난 10년 동안 온실 가스의 주범인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9퍼센트 이상 늘었다. 1990년대 초반 수십 개에 지나지 않던 자유무역협정은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하자 무려 162개로 늘었다. 전쟁 위협과 군사적 갈등은 점점 더 고조되면서 인간 사회와 지구를 파괴하고 있다. 매일 5천5백 명의 어린이들이 오염한 물과 음식 때문에 병에 걸려 죽어간다. 아프가니스탄, 버마, 시에라리온 등 세계 30개 국가에서 30만 명 가량의 18살 소년이 전쟁에 병사로 동원되고 있다.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5살 이하 어린이의 영양실조율은 1990년 보다 증가했다. 유엔은 부자 나라의 빈곤국 지원 목표를 국민총생산의 0.7퍼센트로 설정해 놨다. 하지만 여전히 국민총생산의 0.2퍼센트밖에 지원하지 않는다. 최고 부자 나라인 미국은 고작 0.1퍼센트 지원한다.

《허울뿐인 세계》로 우리에게 친숙한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오래된 미래》에서 라다크를 통해 시장이 인간과 자연을 어떻게 망치는지를 보여 준다. 1974년에 인도 정부가 라다크 지역을 관광객들에게 개방하면서 그 곳은 서서히 변했다. 서구식 개발의 물살이 밀려 오면서 라다크에 사는 사람들의 삶과 세계관도 변하기 시작했다.

세계의 농촌 지역에 있는 수백만의 젊은이들은 현대 서구 문화를 자국 문화보다 훨씬 우월하게 본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겉만 보면 현대 세계의 물질적인 면, 즉 서구 문화의 뛰어난 면만이 보일 뿐이다. 그 젊은이들은 산업사회가 달고 다니는 스트레스와 환경 파괴, 인플레이션, 실업 등을 보지 못했다.

한편, 라다크 마을 주민들은 자기들 문화가 한계가 많고 불완전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전통 문화를 유지한 마을 사람들은 돈 없이도 기초적인 욕구를 충족했다. 주민들은 1만2천 피트 고도에서 보리를 키울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 더 높은 곳에서는 야크나 다른 짐승들을 키운다. 마을 사람들은 자기 손으로 가까운 주변에 있는 재료를 이용해 직접 집도 짓는다. 전통적으로 사람들은 자원의 한계와 그들 각자의 책임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라다크가 서구식으로 개발되자 주민들은 국제적인 현금 경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라다크 사람들은 세계 경제를 관리하는 사람들의 통제를 받았다. 라다크에서 2천년 동안 보리 1킬로그램은 그냥 보리 1킬로그램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값이 얼마인지 확신할 수 없게 됐다. 곡물 시장이 요동침에 따라 내일 보리 값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끔찍해요”라고 라다크 친구들은 말한다. “모두 너무나 탐욕스러워져 가요. 전에는 돈이 전혀 중요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돈뿐이에요.”1970년대 라다크의 여러 마을에 서구식 교육이 도입됐다.

오늘날에는 약 2백여 개의 학교가 있다. 기본 교과 과정은 인도의 다른 지역에서 가르치는 것을 어설프게 흉내낸 것이고, 영국 교육을 어설프게 모방한 것이다. 거기서 라다크 고유의 것을 찾기는 힘들다. 한 번은 저자가 ‘레’라는 동네의 한 교실에 가 보았는데, 교과서에 런던이나 뉴욕 아이들이 갖고 있을 만한 침실이 그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림에는 깔끔하게 접은 손수건 무더기가 기둥 달린 침대 위에 놓여 있고 그것을 화려한 옷장의 어느 서랍에 넣을 것인지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었다. 기울어진 피사탑과 땅이 이루는 투사각을 계산하는 문제가 숙제로 나온 적도 있었다. 저자는 학생들이 《일리아드》를 영어로 번역하느라 고생하는 모습도 보았다. 한 마디로 서구의 교육 체계는 온 세계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의 환경과 무관한 내용을 가르침으로써 우리의 몸과 마음을 더 빈곤하게 만든다. 자본주의 산업 문명의 유입으로 사회는 여러 면에서 분열한다. 나이든 사람과 젊은 사람, 남자와 여자, 부자와 가난한 자, 불교도와 무슬림 사이에 간격이 생겨났다. 가장 큰 분열 요소는 남자와 여자의 기능이 갈수록 달라지는 것이다. 남자들은 집 밖의 기술 중심 생활의 일부가 되고, 사회의 유일한 생산 구성원으로 여겨진다. 서구 핵가족이 이제는 규범이 되자 라다크 사람들은 전통적인 일처다부의 관행을 부끄럽게 여기기 시작했다.

이 책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세계와 풍요를 의심해 보라고 말한다. 하지만 산업사회 이전의 전통사회로 복귀하자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라다크 현지 재료를 이용해 트롱브(trombe)벽이라는 난방용 태양열 기술을 개발한 것처럼 현대의 발전된 기술과 과학은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 우리가 지적해야 할 것은 산업사회 그 자체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이윤 지상주의 논리다.

대안이 미흡하지만 이 책은 자본주의가 어떻게 인간과 사회를 변화시키는지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보여 준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 라다크 사회에 대한 인류학적인 단면을 보는 즐거움도 느낄 수 있다.

조상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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