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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사회주의 중국”

흔히 중국을 사회주의 국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중국을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조차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중국에는 여느 자본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미국, 유럽, 한국 등 자본주의 국가에서 만든 상품이 많이 있고, 세계가 알아주는 ‘초일류 노동자 탄압’ 기업 삼성 ― 역설적으로 중국의 삼성은 공산당원에게 일반인보다 가산점을 많이 준다 ― 이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사회공헌 제일 많이 한 기업”으로 선정됐다. 그러면서 앞에서 말한 것과 어울리지 않게 우리로 따지면 구청이나 학생회관 같은 곳에 어김없이 공산당과 공산주의청년단 지역위원회, 대학위원회가 있으며, 중국중앙방송(CCTV)에서 뉴스를 시작할 때면 어김없이 공산당과 정부가 내린 결정과 이번 후진타오 지도부의 목표인 “사회주의 조화 사회”의 진행 과정을 먼저 보도한다.

또 거리 곳곳에는 과거 중국의 게으름, 남을 속이는 것, 과학 경시와 같은 부정적인 면을 극복하고 강력한 중국 국가를 만들자는 내용의 ― 차라리 중화민족 8대 영진관이라 해도 나쁘지 않을 ― “사회주의 8대 영진관을 수립하자”는 포스터와 모택동 동상이 중국의 사회주의는 아직 죽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내가 본 중국은 “사회주의”라기보다는 오히려 크리스 하먼이 소련의 붕괴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쓴 ‘국가자본주의에서 시장자본주의로 게걸음 친 체제’의 전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중국의 피씨방에는 한국의 카트라이더나 미국의 워크래프트, 스타크래프트 등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행하는 게임이 많다. 그러나 한국과 다른 점이 있다면, 중국 정부에서 인터넷에서 반정부성 글을 쓰는 것을 통제하기 위해 피씨방 이용시 신분증을 제시하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내 여권을 피씨방 주인에게 제시하고, 주인이 나의 여권 번호를 컴퓨터에 입력한 다음에야 입장 할 수 있었다.

지성의 공간이자 제일 자유로울 것 같은 대학도 마찬가지였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내가 다녔던 대학 역시 공무원 채용 시험 광고와 삼성 채용 박람회, 취미활동에 관한 포스터도 많다. 그러나 이와는 어울리지 않게 70년대 한국만큼은 않지만, 학내 군데군데 경찰 순찰차가 세워져 있고, 학교에 문제제기를 할 경우 경찰에 잡혀갈 수도 있다.

사이버 공간도 예외가 아니다. 물론 중국도 역시 한국의 ‘싸이월드 미니홈피’와 같은 것과 ‘네이트온’, 구글 같은 사이트와 프로그램들이 많다. 그러나 북아일랜드 전쟁저지연합의 레이시온 점거농성을 알리는 사이트는 차단돼 있었으며, 북한이 핵 보유를 선언한 지 3주 지난 이후에는 그 전까지는 보는 데 전혀 지장이 없었던 ‘다함께’의 주간신문 〈맞불〉과 ‘다함께’의 자매조직 국제사회주의경향(IST)의 여러 나라 단체에서 발행하는 모든 신문의 서버가 차단돼, 나는 신문은 물론, 〈맞불〉서버로 돼 있는 사회연대전략에 대한 동영상조차 볼 수 없었다.(이 글 역시 중국에선 읽을 수 없을 것이다.)

또, 때때로 ‘다함께’ 사이트 접속 속도가 이상하게 느려지기도 했으며, 〈민중의 소리〉블로그조차 차단되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한 중국 신문에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중국이 아프리카에서 하고 있는 행위가 한때 중국 정부가 그토록 비판하던 과거 유럽과 미국의 제국주의 국가들과 다를 바 없다는 반공 극우신문 〈조선일보〉의 사설 전문이 실리기도 했다.)

내가 살던 도시 ‘항주’는 중국인들이 나이가 들면 꼭 살고 싶어 할 정도로 아름다운 경치가 있다 해서 “인간천당”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서울과 다를 바 없이 큰 건물들이 있고, 젊은이들을 겨냥한 고급 음식, 옷을 판매하는 거리와 매일 같이 들려오는 폭죽소리로 사람들의 잠을 깨우곤 한다.

그러나 바로 이 “인간천당”에서조차 조직폭력배들이 존재하고 ― 그래서 항저우시 공안국(경찰청)에서는 범죄 근절을 위해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직폭력배들을 공안국 광장에 세워 놓기도 했다 ― 또한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고자 하는 한국인들에게 [걸인들이] “사장님 천원만” 달라고 한국말로 구걸하는 걸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내가 공부하던 당시 중국의 ‘국회의원’이라고 할 수 있는 인민대표를 뽑는 대회가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시내 곳곳에는 ‘법 앞에 공민은 모두 평등하다’, ‘인민대표제도는 우리 나라의 근본 정치제도다’, ‘투표를 해서 인민의 권리를 행사하자’와 같은 플레카드가 곳곳에 있었으며, 몇몇 지역에서는 실제로 투표가 이뤄지기도 했다.

이것만 보면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민주적 권리를 향유하는 것으로 보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선거캠페인에 대한 그럭저럭 잘 사는 중국 사진가 친구의 반응은 “나의 일이 아니다”였다.

이러한 중국 사회에서 6개월 동안 살면서 내린 나의 결론은 “중국은 사회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국가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설명한 걸 조금만 보충하자면, 공산당원들조차 그들의 체제가 진정 ‘사회주의’인지, ‘자본주의’인지 모르겠다고 혼란스러워 할 정도로 자본주의가 일상이 돼 있고, 성도의 유명한 기업인이 술자리에서 자신이 성도시장를 부르면 그는 반드시 달려온다고 장담할 정도로 국가 관료와 자본가가 유착돼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러한 중국 정부가 그들이 대표한다고 말하는 ‘노동계급’에 의해 타도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글을 읽는 어떤 사람들은 이런 주장이 실현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은 중국 정부가 시장경제를 도입한 이후로 심해진 빈부격차를 해결하고자 ‘사회주의 조화 사회’를 주장하고, 직접 선거와 양당제를 도입해서 정치적 민주화를 서서히 완성시키다보면 혁명 없이 좀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할 것 같다.

그러나 중국 한 나라에 포르투갈(상하이)과 나미비아(윈난성)가 존재할 정도로 빈부 격차가 심하고, 독립노조나 공산당에 반대하는 어떤 행위도 금지되고 있는 엄혹한 현실에서 독립 노조가 서서히 건설되고, 10만 명 이상이 참가하는 거대한 시위가 자주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공산당이 실시하는 이러한 ‘위로부터의 개혁’이 성공을 거두기는커녕, 1989년 덩샤오핑이 천안문에서 민주화를 요구한 대중들을 인민해방군으로 진압하는 것과 같이 스스로 실시한 개혁조차 일관되게 실시하지 못할 것 같다.

따라서 아직 그 가능성을 직접 내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중국의 노동계급이 진정한 ‘국민의 지도자’로서 농민과 빈민들을 지도해서 1949년과 달리 진정한 의미에 ‘노동자 권력’을 탄생시킬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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