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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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지지
정진희
여성 해방을 위해 박근혜를 ‘활용’하자는 박근혜 활용론이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꽤 지지를 얻어가고 있다.
지난 3월 처음으로 박근혜 지지를 표명한 최보은과 재빨리 이를 지지한 장정임에 이어 〈한겨레〉 논설위원 김선주까지 박근혜 지지 대열에 합류했다. 김선주는 4월 22일치 〈한겨레〉 칼럼에서 “여성들도 필요하면 박근혜 의원을 활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페미니스트들 사이에 꽤 인기 있는 잡지인 《이프》 편집위원 이숙인은 박근혜 지지를 분명히 밝히지는 않지만 박근혜에 거는 기대를 숨기지 않는다. 그는 “여성 단체가 중요한 압력 단체가 되어 여성의 이름으로 그녀를 압박한다면 남자 후보들다는 더 많은 여성 정책을 획득하지 않을까 하는 낙관적인 생각도 해 본다.”(《말》 2002년 6월호.)박근혜가 신당을 창당해 대선 출마 가능성이 높아지자 최보은과 장정임은 다시 한 번 박근혜 지지론의 불씨를 지피고 있다. 이들은 각각 《말》 6월호와 《사회평론》 여름호에 기고한 글에서 거듭 박근혜 지지의 ‘진보성’을 주장했다.
박근혜 ‘활용’론자들은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면 여성의 지위가 높아질 것이라는 커다란 환상에 사로잡힌 나머지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 냉전 우익을 반대한다는 〈한겨레〉의 논설위원인 김선주가 뻔뻔스럽게 냉전 우익 박근혜를 지지하는 칼럼을 쓰며, “지나친 결벽주의를 버리고” 여성도 “지저분해”지자고 말하는 것을 보라.
박근혜 활용론자들이 박근혜가 냉전 우익이라는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운동권 출신이라는 최보은과 전교조 해직 교사 출신인 장정임이 박근혜가 우리 사회에서 어떤 구실을 해 왔는지 모를 리가 없다. 이들에게는 박근혜가 어떤 여성인지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그저 여성이면 충분하다. 장정임은 노골적으로 말한다. “박근혜면 어떻고 누구면 어떤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최보은도 같은 생각이다.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고 억압하는 제국주의 국가의 지배 계급 여성들이라도 상관 없다. 그는 미국과 영국, 프랑스의 여성 우익들 ― 매들린 올브라이트, 마거릿 새처, 최근 임명된 프랑스 국방장관 미셀 알리오-마리 ― 를 가리켜 “그들은 그 존재 자체로 세상을 향해 여성도 국무장관이나 국방장관을 할 능력이 있다는 중요한, 우리 입장에서 보면 혁명적인 발언을 하고 있[다]”고 예찬했다. 그러나 문제는 모든 고양이가 쥐를 잡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이들은 여성이 억압받는다는 이유만으로 동일한 이해 관계를 갖는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에서 여성의 이해 관계는 계급에 따라 크게 다르다. 주식만 2천4백69억 원어치를 가진 신세계 그룹 회장 이명희(삼성 그룹 이병철의 딸)가 신세계 백화점 여성 노동자와 이해 관계가 같지 않다. 서울 힐튼 호텔을 운영하는 대우개발 회장 정희자(김우중의 처)가 재작년 힐튼 호텔 파업 때 여성 노동자들에게 어떤 ‘자매애’를 베풀었는가?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면 여성의 삶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는 부와 특권이 있는 여성들에겐 맞지만 대다수 여성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면 최보은과 장정임이 손꼽아 기대하듯 여성 각료 자리가 증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엘리트 여성에게는 출세길을 열어 줄지언정 대다수 여성들의 삶이 향상되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박근혜가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쥐어짜 부자의 몫을 늘리는 신자유주의의 신봉자이기 때문이다.
시장 정책과 여성들의 삶 향상이 함께 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순전한 사기다. 신자유주의가 대다수 여성의 삶을 황폐하게 만든다는 것은 이미 김대중 정부에서 4년 넘게 지긋지긋하게 경험했다. 대량 해고와 임금 삭감으로 많은 가정이 빈곤에 시달리고 있고 이것은 여성을 더 고통스럽게 했다. 아이와 노인과 환자를 돌보는 일이 개별 가정에 떠넘겨져 여성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시장주의는 대다수 남성뿐 아니라 대다수 여성의 삶도 후퇴시키는 중대한 공격이다. 그런데도 장정임은 시장주의가 별 것 아닌 양, 박근혜가 만들고 싶은 나라가 “시장 경제 체제를 제외하고는 진보주의자들의 비전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장정임은 진보 진영 일부 남성들의 여성 차별 태도를 이유로 “민노당 사람도 민주당 사람도 한나라당 사람도 모두 그게 그거”라며 ‘여성 연대’를 목청 높여 외친다. 그러나 막상 그 자신은 지독한 여성 차별론자 조지 W 부시의 아프가니스탄 여성 학살에 지지를 보냈다.(장정임이 미국의 전쟁을 지지했다고 실토한 것은 《말》 2002년 4월호에 나와 있다.)박근혜 지지론은 그 겉포장이 무엇이든 대다수 사람들의 삶을 짓밟는 지배 계급에 대한 투항이다. 최보은과 장정임은 자신들이 박근혜 대변인이 아니라고 항변하지만, 사실 실제 대변인도 하기 어려운 역할을 하고 있다. ‘박근혜 활용론’은 냉전 우익 박근혜에 대한 대중의 반감을 없애 주는 연막탄 노릇을 하고 있다. 박근혜 활용론은 망상일 뿐이다. 지배 계급 여성을 평범한 여성들더러 ‘활용하라’니 도대체 누가 누구를 활용하는가. 박근혜를 냉전 우익 정치인이 아닌 차별받는 여성 정치인으로 부각시키는 것은 박근혜를 활용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박근혜에게 활용당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