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령 종식과 즉각 철군만이 또 다른 비극을 막을 수 있다 - 이라크와 레바논에서도 즉각 철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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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이 인쇄에 들어가기 직전 탈레반이 남은 피랍자 19명 전원을 석방하기로 했다는 발표가 나왔다.
피랍 한국인 석방 합의 소식은 정말이지 다행스런 일이다. 그 동안 피랍자들은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위험 속에서 끔찍한 공포에 떨어야 했다. 피랍자 가족들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겪었을 고통을 어찌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석방 합의의 핵심은 ‘아프가니스탄 주둔 한국군 연내 철군’과 ‘선교 활동 중지’다. 탈레반 측 협상단도 같은 내용을 확인했다.
이것은 한국군 철군이 피랍자 무사귀환의 핵심 열쇠라는 반전 운동의 주장이 옳았음을 입증한다. 한국군 철군은 탈레반의 주요 요구가 아니고 피랍자 석방에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주류 언론과 정부의 주장이 거짓말이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연합뉴스〉도 “탈레반이 인질 억류 초기단계에서 뿐 아니라 우리 정부 협상단과 직·간접 협상에서도 한국군의 철군을 … 석방의 핵심 조건으로 내세웠[다]”고 뒤늦게 시인했다.
남은 피랍자 19명이 석방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두 명의 피랍자가 허망하게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이것은 온전히 노무현 정부의 책임이다.
살인 정부
노무현 정부가 애당초 국민 다수의 뜻을 거슬러 파병을 강행·연장하지 않았더라면 아프가니스탄에서 무고한 한국인들이 납치되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탈레반이 ‘연내 철군’을 조건으로 피랍자 전원을 석방했음을 볼 때 한국 정부가 ‘즉각 철군’을 선언했더라면 진작에 모든 피랍자가 석방될 수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랬다면 배형규, 심성민 씨가 살해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한국 정부가 ‘파병 국가’로서의 ‘체면’을 차리려 버티는 통에 두 명이 허망하게 목숨을 잃은 것이다. 따라서 노무현 살인 정부는 지금 “참 다행이다”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은 탈레반의 피랍자 석방 결정이 탈레반이 요구한 수감자 석방이 “우리의 권한과 능력 밖에 있다는 점을 충분히 설명”한 덕분이라고 말했다. 물론 그 “권한과 능력”이 부시 정부에게 있다는 것은 처음부터 명백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결코 공식적으로 부시 정부에게 그런 요구를 하지 않았다. 조·중·동은 “반미는 안 된다”며 그런 요구를 입 밖에도 올리지 말라고 윽박질러댔다.
이처럼 노무현 정부가 쉽고 확실한 길을 놔둔 채 행여나 부시의 심기를 건드릴까 눈치를 살피며 시간만 끄는 동안 배형규·심성민 씨는 비참하게 죽어갔다.
탈레반의 피랍자 석방 결정이 “국제사회의 협력[의] 결과”라는 말도 터무니없다. 천호선이 언급한 “감사”의 대상, 즉 “아프가니스탄 정부와 우방[즉, 미국], 다국적군”은 사태 해결을 돕기는커녕 시종일관 피랍자들을 사지로 몰아넣을 짓만 골라서 해왔다. 부시는 피랍 사태 와중에 탈레반을 “살인마”라 부르는 도발을 서슴지 않았고, “어떠한 타협도 없다”며 협상에 찬 물을 끼얹었다.
심지어 아프가니스탄 정부군과 다국적군은 탈레반에 대한 공세를 크게 강화했다. ‘빨리 죽이고 끝내자’고 고사를 지낸 셈이다. 오죽하면 탈레반이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인질 전원을 한꺼번에 살해해 이번 사태를 일거에 종결토록 우리를 몰아가고 있다”고 했겠는가.
피랍자 석방이 ‘합의’되긴 했지만 아직 피랍자들이 안전하게 풀려난 것은 아니다. 만약 한국 정부가 탈레반과의 합의를 어기려든다면 피랍자들의 생명은 다시 위험에 처할 것이다. 한국 정부는 철군 약속을 즉각 이행해야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비슷한 비극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한국 정부가 아예 ‘테러와의 전쟁’에서 발을 빼는 게 최선이다. 즉, 아프가니스탄 뿐 아니라 이라크와 레바논에 파병된 한국군도 모두 당장 철수해야 한다. 그러지 않는 한 언제든 비슷한 비극이 ― 심지어 국내에서도 ―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반전 운동
김선일 씨와 윤장호 병장이 죽었을 때 반전 운동이 이 점을 경고했지만 노무현 정부는 이를 철저히 무시했고, 그 결과 이번 피랍 사태 같은 비극이 재연됐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심지어 노무현 정부는 다산·동의 부대를 철군시킨 뒤 ‘지역재건팀’이라고 이름만 바꾼 또 다른 점령지원군을 아프가니스탄에 다시 파병하려 할 수도 있다. 반전 운동은 노무현이 이러한 꼼수를 부리지 못하도록 눈을 부릅뜨고 있어야 한다.
반전 운동은 이번 피랍 사태 와중에 중요한 구실을 했다. 반전 운동이 부시의 ‘테러와의 전쟁’과 이에 동참한 노무현 정부의 파병 정책의 책임을 따져 묻지 않았다면, 정부와 우파들이 ‘쟁점 흐리기’를 통해 사태의 본질을 가리기가 훨씬 쉬웠을 것이다.
정부가 탈레반의 핵심 요구인 철군을 수용하자 〈연합뉴스〉는 이것이 “대테러 전쟁에 동참하고 있는 한국의 국격(國格)에 적지않은 손상”을 줬다고 지적했다. 〈조선일보〉도 “이것이 앞으로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에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을 걱정하고 있다.
이번 피랍 사태는 ‘테러와의 전쟁’이 피점령국은 물론 점령국의 국민들도 위험으로 내몰 수 있음을 다시 보여줬다. 이 비극과 재앙의 뿌리를 도려내기 위해 반전 운동은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