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 한국인 피랍 사건:
석고대죄해야 할 것은 노무현 정부다. 책임 떠넘기기 중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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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와 주류 언론이 피랍 사태의 비극을 희생자들 탓으로 돌리는 파렴치한 선동에 나섰다.
피랍자 석방 합의 직후 청와대 대변인 천호선은 “파병 때문에 [피랍 사태가] 발생한 것으로 보는 것은 무리한 주장”이라며 도리어 “[피랍 당사자들에게] 구상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다른 주류 언론들도 “무모한” “공격적 선교”를 다시 들먹이며 이러한 책임 떠넘기기를 적극 돕고 있다.[3면의 관련 기사를 보시오.]
이것은 뻔뻔하기 그지없는 거짓말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인들이 집단으로 납치돼 살해된 이유는 단 하나, 노무현 정부가 미국의 침략 전쟁을 도와 아프가니스탄에 군대를 보냈기 때문이다.
탈레반은 피랍자 석방 뒤 발표한 공식 성명에서 “우리의 행동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국민에게 자행하고 있는 야만적 행위에 대한 반작용[이고] … 한국 정부는 2백 명의 군대를 아프가니스탄에 파견해 미국이 주도하는 연합군의 작전을 돕고 있다”고 말했다.
천호선은 “인도는 파병국이 아닌데 3번이나 피랍됐다”고 했다. 그러나 인도인 납치 사건들도 인도 정부가 아프가니스탄 점령에서 한 구실에 그 뿌리가 있다. 2001년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인도 정부와 기업들은 이른바 ‘재건’ 사업에 적극 참가해 왔다.
불똥
이러한 재건 사업은 외국 기업과 부패한 아프가니스탄 관리들의 배만 불려 왔고, 상당수는 점령군을 돕는 병참 지원 사업에 불과했다. 인도인 납치와 피살은 인도 정부가 이러한 재건 사업 참가를 중단하라는 탈레반의 요구를 거부한 결과였다.
탈레반과의 협상 때문에 한국 정부의 “국격(國格)”과 “국익”이 “훼손”됐다는 조·중·동의 주장은 더욱 역겹다.
대체 침략 전쟁에 동참해 애먼 자국민들을 위험과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만큼 “격”이 떨어지는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생명보다 더 중요한 “국익”은 또 무엇인가?
조·중·동은 “특사 파견”도 문제이고, “구출작전 배제”도 문제이고, “직접 협상”과 “철군 약속”은 더욱 문제였다고 투덜댄다. 피랍자들이 죽도록 그냥 내버려 뒀어야 한다는 얘기다.
비정하기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가한 다른 동맹국 지배자들도 마찬가지다.
한국인 피랍자 석방 합의 소식이 전해진 뒤 아프가니스탄, 독일, 캐나다 정부 등은 한목소리로 한국 정부의 직접 협상과 철군 약속을 비난했다. “[탈레반과의] 협상은 테러 활동을 부추길 뿐”(캐나다 외무장관 막심 베르니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제국주의 점령국들이 아프가니스탄 민간인들을 상대로 벌이는 끔찍한 “테러”야말로 진정한 문제다. 탈레반 스스로 밝혔듯이, 탈레반의 행동은 “[이런] 야만적 행위에 대한 반작용”이기 때문이다.
첫 희생자인 배형규 씨가 살해된 날인 7월 25일 외교장관 송민순이 국방장관 김장수에게 건넨 쪽지의 내용(이른바 “8+6+9” 메모)은 한국 정부가 “탈레반이 위협에 그치지 않고 실제 인질 살해까지 염두에 둘 만큼 위기상황이었던 것도 알고 있었”(〈연합뉴스〉)음을 보여 준다. 누군가 죽을 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방치한 것이다.
정부와 우파들이 피랍자들에게 비극의 책임을 떠넘기려 안달인 것은 이번 사태의 불똥이 다른 곳으로 튈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파병 정책이 비극의 원인으로 지목되면 이라크와 레바논에서도 철군해야 한다는 압력이 커질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전쟁과 점령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은 비극의 뿌리가 점령과 파병 정책에 있음을 단호히 주장해야 한다. “석고대죄”해야 할 것은 노무현 정부이지 피랍자들이 아니다.
“또 다른 한국인이 참극을 당하기 전에 … 이라크에서는 자주적 결정으로 철군해야 옳다. 그것이 또 다른 참극을 막는 유일한 길이다.”(손석춘 전 〈한겨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