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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88만 원 세대》 우석훈·박권일 | 레디앙:
누구에게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던져야” 하나?

시도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 책은 어린 나이에 IMF 위기를 접하고 미래가 암울하다는 것을 감지한 세대인 현재의 20대가 처한 어려움을 공론화하고, 이를 통해 한국 사회의 문제를 드러내려고 시도한다.

‘88만 원 세대’라는 제목도 눈에 확 띄고 의미심장하다. 현재 비정규직의 평균 임금은 1백19만 원. 여기에 20대가 받는 평균적인 급여 비율 74퍼센트를 곱하면 88만 원이 된다. 이렇게 해서 현재의 20대는 ‘88만 원 세대’라고 명명됐다.

저자들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 첫 섹스와 동거 그리고 부모로부터 독립이 유난히 늦은 ‘88만 원 세대’를 발견한다. 그리고 한국의 20대가 유달리 늦게 독립하는 이유는 그들의 유약함 때문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높은 주택비·대학등록금과 생계 때문에 10∼20대의 대부분이 뛰어들게 되는 알바 시장의 열악함 등은 “10대들의 동거를 가로막는” 주요 요인이다.

이렇게 “청소년들이 20대에 독립을 하거나 더 일찍 동거를 시작하지 … 못하는 시스템은 경제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해 꽉 막혀 있고, 당연히 갖추고 있어야 할 장치들을 갖추지 못한 경우라고 진단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속에서 젊은 세대는 극한의 경쟁을 벌인다. 극소수의 승자를 제외한 나머지 패자들은 “개미지옥의 가장 밑바닥에 누구를 밀어 넣느냐, 즉 ‘누가 가장 먼저 잡아먹힐지’를 결정하는” 처절한 경쟁을 한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저자들이 ‘88만 원 세대’의 문제를 “40대와 50대 남자가 주축이 된 한국 경제의 주도 세력이 10대를 인질로 잡고 20대를 착취하는 형국”이라고 규정하고, 이 문제의 해법을 “세대 간의 문제와 다음 세대의 문제라는 축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촉구하면서 온갖 혼란이 발생한다.

세대 간 착취?

예를 들어, 저자들은 “KTX의 여승무원과 철도공사 이철 사장 사이에서 벌어진 정규직 전환 투쟁”을 “유신 세대와 20대가 갈등하는 … 대표적인 사례”로 본다.

대부분 유신 세대일 이랜드의 나이 든 여성 노동자들이나 외주화 위협을 받는 50∼60대 환경미화원 노동자들이 도대체 어떤 식으로 철도공사 사장 이철과 함께 20대를 착취하고 있다는 것일까?

저자들 자신도 “[유신 세대는] 종신 고용 모델이 조기퇴직이나 명예퇴직으로 사라졌기 때문에 … 20대만큼이나 위태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며 “[그들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사회안전망 속에서 불안한 노년을 기다리고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또, 저자들은 교육 개혁을 이룬 프랑스의 68세대와 달리 우리 나라의 386세대는 학벌사회를 오히려 강화해 역사에 대한 일종의 배신을 했다고 비판하지만, “이 잔혹극[입시경쟁]은 중고등학생은 물론이고 그들의 부모들[386세대]에게 결정적 타격을 끼치게” 된다고도 지적한다.

이렇듯 이 책은 앞에서 한 주장을 뒤에서 뒤집기 일쑤다. ‘세대 착취’라는 이들의 인식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저자들 스스로 인정하듯이 “세대에 관한 이야기들을 전개하다 보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빠지기 쉽고 … 언제든 사이비 과학이 될 위험이 있다.”

저자들은 “우리가 이렇게 못 살게 된 것은 다 20대들이 게으르고, 부모들의 뼛골을 빼먹기 때문이다”는 주장을 ‘사이비 과학’이라고 규정한다. 그렇다면 이런 주장의 거울 이미지인 ‘40∼50대가 20대를 착취한다’는 이 책의 주장도 과학이 아니다.

이렇게 계급을 분열시키는 ‘세대 착취’ 논리는 우파들에게 이용되기 십상이다. 〈조선일보〉의 한 칼럼니스트는 이 책을 인용하며 “386과 포스트 386은 경쟁사회의 원리에 따라 한판 승부를 벌일 때가 됐다”고 선언하고는 20대가 나서서 우파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악선동을 해댔다.

이 책을 출판한 인터넷 언론 〈레디앙〉의 핵심 칼럼니스트 이재영은 “386과 포스트 386은 정치적으로든 이념적으로든 전혀 대립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이런 반박은 이 책의 핵심 논지인 ‘세대 착취’도 반박하는 것이다.

다행히도 저자들은 ‘세대 착취’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여 계급 분열적 주장에 도달하지는 않는다. 이 책의 대안은 “단절된 세대간 소통의 통로를 열어야 한다”는 정도다.

저자들은 “20대여, 토플책을 덮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 하고 선동한다. 그러나 그 내용은 20대의 1만 명 정도가 기성세대가 운영하는 스타벅스에 가기를 거부하고 대신 20대가 운영하는 커피숍에 가겠다고 선언하는 상징적인 반항이다. 오히려 20대에게 ‘사회 문제에 관심 좀 가져라’ 하고 말하는 여느 훈계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바리케이드

또, 저자들의 대안은 새롭지도 급진적이지도 않다. ‘세대 갈등’을 ‘세대 화합’으로 바꾸길 바라는 이들은 불공정한 현실의 원인인 (자본의) 세계화를 인정하고 혁명이라는 방법은 통할 수 없다고 전제한다.

결국,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은 “기성세대 혹은 기성세대의 누군가에게 갈 몫을” 일부 돌려, 감원 대신 감봉을 택해 일자리를 나누는 스웨덴 볼보주의 정책을 도입하고, 20대 창업지원금으로 2조 원을 확보하거나 지자체가 알바 보조금을 지원하자는 것들이다.

저자들이 뭉뚱그려 말하는 “기성세대의 누군가”에는 지배 계급도 있고 노동자도 있다. 이 문제에 분명하게 답하지 않기 때문에 이 책의 대안은 노무현 정부가 줄곧 주장해 온 ‘대기업·정규직 양보론’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비록 저자들이 ‘88만 원 세대’ 문제의 주요 책임을 노무현 정부에 돌리고 있지만 말이다.

시작은 창대했지만 그 끝이 미약하다. 저자들이 ‘이태백’(20대 태반이 백수)과 ‘청백전’(청년백수 전성시대)을 화두로 글을 쓰기 시작했더라도, ‘사오정’(45세가 정년)과 ‘오륙도’(56세까지 직장에 남아있으면 도둑놈)도 염두에 뒀더라면 괜찮은 글이 나왔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88만 원 세대’의 문제가 세대 간 문제가 아니라 계급 문제라는 것도 더 분명하게 드러났을 것이다.